1868화. 여인
*
두 시진 뒤 음괄이 백리염의 감방 안에서 빠져나왔을 때 다섯 명의 수사들은 전부 핏물 위에 쓰러져 있었다.
음괄도 무리를 했는지 안색이 부쩍 어두워져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음괄대인. 쓸만한 괴뢰들을 얻으셨습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회의 거한이 살갑게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내게 큰 도움이 될 괴뢰들이니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한다, 음선.”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혼충이 융합되고 이들이 깨어나는 즉시 현음궁(玄陰宮)으로 데려와라. 도중에 다른 구역 인물들에게 들켜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번에 유혼충을 다섯 마리나 심으셨는데 몸은 괜찮으신지요?”
“괜찮다. 본원 흉살력을 약간 소모했을 뿐이니 잠시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상을 내리겠다.”
음괄은 요양이 급한지 급히 사라졌고 회의 거한은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한참 만에 몸을 폈다.
그가 냉소를 지으면서 한립 일행에게 다가가는데, 핏빛 신영이 계단을 통해 9층으로 내려왔다.
바로 유락이었다.
“유락 낭자께서 어쩐 일로 이곳까지 와주셨습니까? 제가 미리 알았다면 마중을 나갔을 것인데요.”
움찔한 회의 거한은 곧바로 호의적인 미소를 띠고 그녀를 맞이했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는가?”
유락이 힐끗 그를 보았다.
“아닙니다! 유락 낭자야 언제든 환영이지요. 저기 그런데,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회의 거한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유락은 대답하지 않고 한립 등이 있는 감방으로 걸어갔다.
거한은 음괄이 남기고 간 말이 떠올라 안색이 어두워졌다.
“음괄 대인도 보면 참 인정머리가 없어. 어차피 괴뢰로 제련할 이들을 이리 엉망으로 만들어 놔서야……. 그렇지 않아?”
유락이 탄식하며 회의 거한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 말에 회의 거한은 쩔쩔매면서 차마 음괄의 뒷말을 하지 못했다.
유락은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다섯 감방의 금제로 어둑한 빛을 쏘아 보냈다.
“유락 낭자, 뭐 하시는 겁니까?”
회의 거한이 깜짝 놀라 막으려다가 유락의 어둑한 빛들이 촉수처럼 한립 등의 미간을 잠깐 건드리고 돌아 나오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강제로 유혼충을 다섯 명의 혼백 속에 집어넣어 뒀군. 이렇게 되면 유혼충이 혼백과 융합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말이야. 내게 천음속혼단(天陰速魂丹)이 있으니 가져다 저들에게 매일 한 알씩 먹이면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일세.”
유락은 검은 옥병을 거한에게 던져주었다. 병 안에서 정순한 혼백 파동이 흘러나왔다.
“천음속혼단!”
그것은 의식과 혼백을 치료하는 단약으로 대라경 수사에게도 효과가 있어 구유족 내에서 아주 유명했다.
원래 보름은 걸리겠지만 이 단약이 있으면 닷새 안에 저들을 깨울 수 있을 것이다.
회의 거한은 그저 유락이 어째서 이런 진귀한 단약들을 가져다 음괄을 돕는 것인지 그게 의문이었다.
“대의를 위해 이런 것까지 준비하시다니, 음괄대인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회의 거한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감사를 표했다.
“남은 천음속혼단은 음선주관이 쓰게. 100년 전에 막 태을경 중기에 이르러 아직 경지를 다질 때가 아닌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떤 분부를 내리시든 최선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저들이 깨어나는 데로 잠시 빌려다 써야겠네.”
유락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웃음 지었다.
“예?”
“왜 그러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저야 당연히 돕고 싶지만 이들은 음괄대인께서 제련을 위해 데려다 놓은 자들입니다. 빌리시려면 음괄대인께 허락을…….”
“음괄대인은 오늘 유혼충 다섯 마리를 심느라 원기를 크게 상했을 것이야. 한 달 동안은 출관할 수 없겠지. 겨우 2, 3일만 빌려다 쓰면 되는데 자네가 말하지 않으면 음괄대인이 어찌 알겠나?”
“그게…….”
회의 거한은 손에 든 검은 옥병을 보고 주춤거렸다.
“나중에 알게 된다고 해도 내가 귀한 천음속혼단까지 써서 제련을 도와줬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실 걸세.”
“그럼 직접 음괄대인을 찾아가 말씀을 나누시는 게…….”
“내가 이들을 빌려 가려는 것은 역주대인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네. 음선주관이 도움을 주지 않아 그 일에 문제가 생기면 자네의 이름을 보고해도 되겠지?”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진 유락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역주대인을 위한 일인데 제가 어찌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화들짝 놀란 회의 거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자네만 믿고 있겠네.”
유락이 활짝 웃으며 가볍게 거한의 어깨를 두드리고 떠났다.
* * *
쿠르릉!
한립은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천둥이 치는 소리를 들었다. 천둥소리가 들릴 때마다 척추를 타고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이렇게 끝인 건가…….”
절망이 그를 잠식하는 가운데 한립이 눈을 떴다.
어째서인지 어둡던 유뢰가 밝아지고 방 안에 누군가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흐릿한 장면이 또렷해질수록 묘령 소녀의 모습도 분명해졌다.
‘완이!’
꿈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그녀는 남궁완이었다.
그가 막 입을 떼려는데 바닥이 진동하면서 주위 풍경이 무너져 내리고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머릿속에 불현듯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 고통을 경감시키고 뇌전의 습격을 늦추고 있었다.
“엇!”
회의 거한이 번득 이동해 한립 앞으로 이동하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겨우 나흘 만에 의식을 되찾다니, 의식의 강대함이 대단하군.”
한립은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힘겹게 눈을 떴으나 무력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깨어난 김에 이것도 삼키거라.”
회의 거한은 다섯 번째 검은 단약을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이 단약이 아니었으면 십여 일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을 거야.”
냉소를 흘린 회의 거한이 멀어져 갔다.
한립은 서둘러 몸속 상황을 확인했다. 단전과 머릿속의 금제는 그대로였고 몸도 꼼짝할 수 없었다.
‘설마 유혼충이 완전히 녹아든 것인가?’
그런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아니지, 그럴 리가.’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의식 속의 괴충은 전신이 투명한 사슬 금제에 둘둘 말려 굳어있었다. 사슬이 아교처럼 녹아 유혼충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방금 뱃속으로 들어온 검은 단약이 녹으면서 따뜻한 기운으로 변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러자 남아 있던 고통이 줄어들고 뻣뻣하던 몸도 편해졌다.
한립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더는 생각하지 않고 눈을 감고 몸 상태를 정비했다.
* * *
반나절 후 한립은 번쩍 눈을 뜨고 힘을 끌어모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고는 손끝에서 만환초를 불러내 입에 집어넣고 씹어 삼켰다.
백발노인이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한립은 철창에 기대 고개를 내리깔고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그의 의식세계에서는 의식의 힘으로 주변의 파문금제를 부수느라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다섯 개의 검은 단약 덕인지 의식의 힘이 더 강해져서 검은 파문금제도 부들부들 떨렸다. 그 안에는 만혼초의 힘도 있었다.
혼령들이 응집한 심원 속에서 무수히 많은 원념이 결집해 만들어진 만혼초의 약성을 직접 혼백의 힘으로 바꾸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낭비도 많았다.
그래서 흡수하지 않고 그 힘으로 검은 파문금제를 직접 때리고 있었다.
* * *
다음 날, 한립은 여전히 철장에 기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격노한 파도가 치는 것처럼 의식의 힘이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파문금제가 수십 갈래로 갈라져 그 균열마다 의식 사슬들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의식의 힘과 만혼초의 힘이 수없이 강타해도 검은 금제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대라경 수사가 펼친 봉인답구나.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의식 소모도 크고 만혼초 약성도 얼마 남지 않자, 한립은 굳게 마음을 먹고 수십 가닥의 의식 사슬에서 맹렬히 빛을 발했다.
촉수처럼 변한 사슬들이 사방을 가르면서 검은 파문금제를 난도질했다.
‘깨져라!’
감은 두 눈이 새빨갛게 물든 한립은 마음속으로 포효했다.
의식의 힘이 야생마처럼 의식 사슬 안으로 달려 들어가 금제의 균열을 넓혔고 만혼초의 역량이 금제 바깥에서 거대 손으로 변해 힘껏 잡아당겼다.
‘염검결!’
남은 의식의 힘이 수정 검빛들로 변해 거대 수정검으로 합쳐지고 검은 파문금제를 찔러 들어갔다.
차칵.
검은 파문 금제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수정 검빛과 만혼초 약성이 흩어져 버렸다. 의식의 힘을 크게 소모한 한립은 숨을 헐떡이면서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안 돼, 이대로 잠들면 끝이야.’
이를 악문 그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두 시진을 버텼다. 그제야 혼백의 힘이 약간 회복되어 몸을 살필 수 있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단전의 살뢰금제는 여전히 굳건했다.
그가 해 도인의 도움을 받아 살뢰금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을 때 멀리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른 의식 거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
9층 입구에서 나타난 것은 회의 거한과 소녀 유락이었다. 곁눈질로 소녀를 본 한립은 애써 의아함을 숨겼다.
그녀가 거한에게 주고 간 약이 그를 구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럴 줄 모르고 한 행동인가? 아니면 그녀 혹은 구유역 역주에게 남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다른 목표가 있단 말인가?’
“벌써 한 명은 깨어났군.”
유락은 감방을 하나씩 훑어보고 마지막에 한립을 쳐다보았다.
“의식의 힘이 강대해서 어제 정신을 차렸습니다. 유락 낭자의 천음속혼단이 그만큼 좋은 물건이기도 했고요.”
“다른 이들도 반드시 오늘 내로 깨워야 하네. 역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말이야. 내가 도울 것이니 단약을 먹이게.”
소녀의 말에 회의 거한이 수결을 맺고 백리염의 감방으로 단약을 쏘아 보냈다.
난초 비슷한 모양의 이상한 수결을 맺은 유락이 주술문자를 불러내 검은 연꽃을 이루고 백리염의 미간으로 쏘아 보냈다.
화앗.
온몸이 까맣게 변한 백리염의 몸 위로 맨발로 연화대(蓮花臺)에 앉은 여인의 허상이 나타나 만물의 어머니처럼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인 허상이 백리염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아이를 깨우듯 속삭이고 불경 소리가 허공을 웅웅 울렸다.
백리염은 곧장 몸을 바르르 떨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여인 허상과 백리염 머리 위의 검은 빛이 사라져갔다.
“유락 낭자의 환혼주(喚魂呪)는 몇 번을 보아도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사흘이 지나기 전에 시체가 온전하면 흩어지지 않은 혼백을 불러 부활시킬 수 있다던데 사실인지요?”
“다음.”
유락은 회의 거한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눈을 반짝였다.
“예!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회의 거한이 싹싹하게 답하고 서둘러 호삼에게 단약을 날렸다. 같은 방식으로 두 사람은 마광과 석천공까지 일행들을 모두 깨웠다.
“음선주관, 앞으로 일어날 일은 극비에 속해서 모르는 것이 나을 것이네.”
유락은 회의 거한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흠칫 놀란 거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결을 맺어 한립 등 다섯 사람의 감방 금제를 풀어주었다.
“천천히 일 보시고 저를 불러주십시오.”
회의 거한이 고개를 숙이고 바깥으로 향하는데 그가 뒤를 돈 순간 유락이 번개처럼 뇌전을 날렸다.
거한은 분노했으나 얼굴이 검은빛으로 둘러싸여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한립 일행이 그 모습을 보고 표정이 가지각색이 되었다. 손을 거둔 유락은 사뿐사뿐 한립의 감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화를 들으니 우리에게 시킬 일이 있는 듯한데 무엇입니까?”
한립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소녀를 마주 보고 물었다. 소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새하얀 빛을 날려 그를 묶은 수갑을 풀어주었다.
“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저를 못 알아보는 건가요?”
한립의 질문에 유락이 싱긋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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