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67화 (1,624/2,000)
  • 1867화. 유혼충

    *

    호흡이 거칠어진 귀 큰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각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았겠지? 제련하기 위해 육신을 단련해 두는 작업이다. 유뢰에 잡혀 온 순간, 너희의 운명은 정해진 거야. 영원히 구유족의 노예가 되는 것! 그런데 어딜 달아날 생각을 하는 것이냐?”

    “노예…….”

    “그래, 노예! 영원히 구유족의 꼭두각시가 되어 평생토록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야 한단 말이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석천공을 향해 포효하듯 외친 사내는 힘이 빠졌는지 철창에 등을 기대고 늘어졌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똑바로 설명해 보세요!”

    광원재 소주로 존귀한 신분을 지녀 뼛속까지 오만함이 가득한 석천공은 영원히 누군가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수사께서는 구유족의 괴뢰술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저도 백장구 연귀보 내부를 살핀 적이 있는데 그곳 상황이 위층들과 비슷하더군요.”

    한립이 가만히 듣고 있다 물었다. 귀 큰 사내는 눈동자를 굴려 힐끗 그를 보고는 답을 주지 않았다.

    “구유족의 괴뢰술은 회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됩니다. 백장구에서 제련하는 것들은 대부분 힘만 쓰는 조잡한 수준의 괴뢰라 체내에 유혼충(幽魂蟲)을 심지 않지요. 제련을 당해 괴뢰가 되면 기본적으로 의식이 소실되어 어떻게 보면 통쾌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온 당신들은 유혼충이 체내에 심어져 마음대로 목숨을 끊을 자유도 없이 영원히 구유족의 노예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노쇠한 목소리가 다른 감방에서 들려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회계의 이종족으로 생김새는 인족과 비슷했으나 인상이 사나웠고 뒤쪽으로 길게 검은 뱀 꼬리가 자라있었다.

    “유혼충이요? 그게 무엇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한립은 백발노인을 향해 물었고, 석천공 등도 노인만을 바라보았다.

    “허허, 알고 싶다면 말해 드리겠습니다. 유혼충은 구유족 특유의 신통으로 다른 이의 혼백의 힘을 뽑아내서 제련한 벌레입니다.”

    백발노인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만든 유혼충을 직접 체내에 심는단 소립니까?”

    “그렇습니다. 타인의 혼백에 침식한 유혼충은 주객이 전도되어 대상의 행동과 육체 심지어 사고까지 통제합니다. 이렇게 유혼충으로 제련한 괴뢰의 경지가 가장 높아 의식이 존재하고 모든 신통과 법칙의 힘까지 그대로 발휘할 수 있고요.”

    “그런 기이한 술법이 있다니! 그렇다면 스스로 원영을 훼손해 목숨을 끊을망정 평생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소리에 석천공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소리를 쳤다.

    “원영을 스스로 훼손하겠다고요? 아직 끝을 본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명을 포기하겠단 말입니까?”

    마광이 석천공을 보고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휴우,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는 한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호삼이 한숨을 내쉬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구유족이 구유역을 오랜 세월 통솔한 이유가 있었군요.”

    백리염도 탄식하는데 한립만이 말없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혼백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유혼충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백발노인이 그의 생각을 읽고 말했다.

    “수사들의 몸에는 이미 유혼충이 심어 있겠군요?”

    한립은 백발노인과 큰 귀 사내를 훑었다.

    “그렇습니다. 9층에 있는 사람은 당신들 다섯을 제외하고 전부!”

    백발노인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이 뿌려진 듯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괴뢰가 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는 겁니까?”

    “우린 이미 희망이 없습니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어서 자결해야 할 거예요. 일단 유혼충이 심어지면 그것도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한립은 백발노인을 향해 공수하고 더는 입을 떼지 않았다. 석천공, 호삼 등도 조용해졌다.

    한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흉살기 침식의 고통을 참아가며 몸 안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의식세계 안에는 검은 파문이 가득해 혼백과 의식의 힘을 봉인했고 단전에는 검은 뇌전실이 가득 차서 전혀 틈이 없었다.

    원영도 검은 뇌전실 속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그와의 연계도 단절되었는데 쉼 없이 검은 안개가 스며들어 원영과 그의 오장육부를 침식했다.

    몸이 워낙 튼튼한 터라 오장육부는 어느 정도 흉살기 침식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원영은 벌써 얼굴에 옅게 검은 기운이 드리워 표정이 사나워져 있었다.

    ‘제길!’

    이대로 원영과의 단절이 계속되면 엄청난 손상을 입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노기를 가라앉히고 손끝을 힐끗 보았다.

    유락이 저물법기를 회수해 갈 때 화지 공간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의 재산 중 절반은 화지 공간 안에 있었다. 장천병도 그중 하나라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천호화혈도는 저물법기 안에 넣어 두어서 구유족에 대해 잘 아는 석경후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한립은 주변을 살펴 그들을 감시하는 금제가 없다는 확신이 들어 창살에 등을 기대고 흉살기 침식에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사실 그는 전력으로 의식의 힘을 발동해 검은 파문을 뚫으려 하고 있었다.

    파문 금제는 의식의 힘을 머릿속에 잡아두기는 해도 완전히 가둬두지는 못했다.

    금선 최고봉에 이르고 회계로 와서 틈날 때마다 연신술을 수련한 그의 의식의 힘은 이전보다 발전해 있었다.

    “소용이 있어!”

    강대한 검은 파문과 의식의 힘이 충돌하자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한립은 기뻐했다.

    연달아 의식의 힘으로 검은 파문을 들이받던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선령력이 봉인되어서 장기간 의식의 힘을 조종하는 게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음괄이 언제 돌아와 유혼충을 강제로 심을지 모르는 상황에 피곤하다고 쉴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기에 한 시진이 넘게 의식의 힘을 충돌해 검은 파문 곳곳에 구멍을 뚫었다.

    검은 파문의 진동이 심해지고 특히 의식세계 중앙에 공간이 생겼다.

    ‘염검결!’

    눈을 번득인 한립이 마음속으로 외치자 의식 안에서 흐릿한 수정빛 검 허상이 나타나 검은 파문을 갈랐다.

    촤악!

    드디어 검은 파문에 가느다란 균열이 생겼고 의식의 검이 그 사이로 빠져나와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의 화지 공간으로 흘러 들어갔다.

    다음 순간, 수정빛이 화지 공간에 나타나 흐릿한 한립의 신영으로 바뀌었다.

    “한 수사, 무슨 일입니까? 아까부터 갑자기 연계가 끊겼던데요.”

    죽루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해 도인이 다가왔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설명하자면 깁니다. 누군가에게 들켜 선령력을 봉인 당…….”

    흐릿한 신영은 바깥에서 벌어진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뇌전법칙에 정통한 해 도인이 혹시 그의 체내의 금제를 없애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살뢰법칙……. 기억 속에 관련 소식이 있기는 합니다. 살뢰법칙과 뇌전법칙은 그 근원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어서 제가 단전을 장악한 금제를 풀어 볼 수는 있습니다. 다만 대라경 수사가 펼친 것이라 성공할 거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약간이라도 통하기만 하면 됩니다. 해 수사께서 단전의 금제에 틈을 만들면 시간법칙을 발동해 스스로 금제를 풀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해보겠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준비해주세요. 잠시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흐릿한 한립 신영이 죽루 바깥으로 날아가 약재밭 구석으로 향했다. 기이한 향기를 흘리면서 자라고 있는 새까만 영초는 만혼초였다.

    만혼초를 오래 옥함에 보관하면 약효에 영향을 미칠까 일부러 화지 공간 안에 심어 두었었다.

    실낱같은 빛줄기를 날려 만혼초를 불러들인 한립은 희색을 드러냈다.

    만혼초의 힘을 빌리고 안팎에서 공격하면 머릿속 검은 금제를 파훼할 가능성이 5할은 되었다.

    의식이 자유를 찾으면 해 도인의 힘을 빌려 단전의 살뢰금제를 풀 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 만혼초를 들고 막 날아오르려던 신영의 얼굴이 굳었다. 유뢰 9층에 검은 장포를 입은 음괄이 표표히 내려서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 한립이 고개를 숙였다.

    백발노인 등도 음괄의 등장에 다들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런데 음괄은 바로 한립이 갇힌 감방 앞으로 와서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그간의 노력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만단 말인가?’

    팟!

    그는 한립이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손을 저어 감방의 금제를 풀고 들어왔다. 지면의 검은 뇌전빛이 거대 손 두 개로 변해 한립의 몸을 움켜쥐고 있었다.

    “날 유혼충 괴뢰로 제련할 생각입니까?”

    한립은 반항하지 않고 음괄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 이미 알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시간법칙을 수련한 것을 보면 너도 인재는 인재야. 얌전히 내 옆에서 명을 따르면 너를 섭섭지 않게 대우할 것이다.”

    담담히 웃은 음괄은 손끝을 튕겨 은색 문양이 들어간 검은색 타원형 구슬을 불러냈다.

    표정이 신중해진 음괄은 알처럼 보이는 구슬에 법결을 던져 넣어 손톱 크기의 검은 괴충(怪蟲)이 알을 뚫고 나오게 했다.

    민달팽이를 닮은 괴충은 머리에 수십 가닥의 길고 짧은 더듬이가 달려있었고 어두운 기운으로 가려진 복부에는 음괄을 닮은 얼굴이 있어 소름 끼쳤다.

    “유혼충!”

    “허튼 생각 말고 이제 혼백에 깃드는 과정을 즐기거라.”

    음괄은 냉랭하게 말하고는 수결을 맺어 괴충을 가리켰다.

    슉!

    음혼충이 한립의 이마로 떨어져 빠르게 안으로 스며들었다.

    눈앞에 깜깜해진 한립은 불로 달군 못들이 머리를 찌르는 극통 속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내게 깃들 수 있을 것 같으냐, 염검결!’

    괴충이 의식세계로 진입하자 검은 파문 속에 한립과 똑같이 생긴 소인이 나타났다.

    노호성을 터트린 소인이 몸에서 수정빛 검 허상이 날아가 유혼충을 베었다.

    촤악!

    두 동강이 난 유혼충은 폭발에 검은 안개로 돌아갔으나 곧바로 다시 뭉쳐 원래 모습을 되찾고 혼백을 향해 다가왔다.

    소인은 깜짝 놀랐으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다시 수정빛을 반짝여 의식 사슬로 유혼충을 감쌌다.

    그러나 유혼충은 비웃는 얼굴로 몸을 터트려 의식 사슬을 벗어나 검은 안개로 변해 날아들었다.

    한립의 혼백과 유혼충은 금방 맞닥뜨렸다.

    검은 안개가 유혼충의 모습으로 돌아가 소인에게 들러붙더니 꿈틀꿈틀 안으로 파고들었다.

    기함한 소인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전신에서 수정빛을 방출했다. 의식 사슬 여러 개가 날아올라 유혼충의 침입속도를 늦추었다.

    “음…….”

    눈썹을 끌어올린 음괄이 서늘한 눈빛으로 전신을 덜덜 떠는 한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녀석. 고통을 자처하겠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주문을 왼 그가 손을 앞으로 뻗어 다섯 손가락에서 검은빛을 내뿜어 한립의 머리에 주입했다.

    눈, 코, 입, 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발작하듯 몸을 꿈틀거린 한립은 참혹한 비명을 터트렸다.

    그걸 본 석천공 등의 안색이 어두워졌으나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백발노인이나 큰 귀 사내는 조언을 듣지 않더니 결국 저렇게 되는구나 싶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흐흐, 재미있구나? 얼마나 버티나 보자.”

    음괄은 잔인한 얼굴로 다섯 손가락에서 더욱 굵은 빛을 뿜었고 장장 일각이 지나서야 수결을 풀고 한립을 붙들고 있던 거대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피로 얼룩진 한립은 의식을 잃고 늘어졌다.

    “같잖은 것 같으니라고.”

    냉소를 흘린 음괄은 한립의 감방을 나와 석천공을 쳐다보았다. 그 싸늘한 눈빛에 석천공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음괄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일사천리로 그의 감방 금제를 풀고 들어가 두 개의 거대 손으로 상대를 붙들고 머리에 바로 검은 기운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석천공이 처절하게 울부짖고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철철 흘린 다음에야 음괄은 손을 풀었다.

    털썩.

    석천공은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다음으로 음괄이 쳐다본 것은 호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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