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66화 (1,623/2,000)
  • 1866화. 무간옥(無間獄)

    *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유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한립을 향해 암홍색 빛을 날렸는데 검은 외전이 날아들어 흩어버렸다.

    천천히 손을 거두는 음괄의 손끝에서 검은 뇌전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유락, 역주 대인의 총애를 받는다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지요! 나생구에서 잡은 침입자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안색이 돌변한 음괄이 서늘하게 말했다.

    “제가 도움을 드린다고 했지 언제 참견하겠다고 했던가요? 도움이 필요치 않으시다면 됐습니다. 그나저나 나생구에 침입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역주 대인께서도 아셔야겠지요?”

    유락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삼역회맹을 주관하느라 바쁘신 분을 이런 사소한 일로 성가시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심문해서 결과가 나오면 제가 직접 아뢸 겁니다.”

    “뭐 그렇기도 하지만 제가 알게 되었으니 역주 대인을 뵈면 대신 전해 드려도 될 것 같아서요.”

    “빙빙 돌리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시지요.”

    음괄은 유락을 노려보다 냉정을 되찾았다.

    “이들의 수행으로 보아 지닌 보물들도 쓸만할 것 같군요. 저들은 수사가 데려가시고 침입자들을 제압하는 데 힘을 보탠 제게는 보물만 넘겨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진선계에서 온 보물이니 수라성에서 이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유락 낭자뿐이겠지요. 좋습니다, 가져가세요.”

    유락의 제안에 음괄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유락도 딴말하지 않고 암홍색 빛으로 다섯 사람의 선기와 저물법기를 모조리 챙겨갔다.

    한립은 음괄과 싸우느라 불러낸 청죽봉운검까지 빼앗기자 눈꺼풀을 떨며 이를 악물었다.

    “물건들이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저는 그럼 이만.”

    선기들을 훑은 유락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욕심 많은 년.”

    음괄은 유락이 떠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놈들을 유뢰(幽牢)에 처넣어라.”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명을 내리고 번득 사라졌다.

    소뿔이 달린 이종족 두 명이 바닥에서 다섯 사람을 들어 올려 검은 사슬을 거두고 수갑을 채워 상반신만 구속했다.

    한립 무리는 이종족들이 이끄는 대로 환형 건물을 나와 철창이 달린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철창 안에서 다섯 사람은 시선만 주고받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반나절 후 나생구의 검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네모난 건물 벽에는 수많은 검은 구슬들이 박혀서 현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뿔이 달린 이종족 한 명이 그들을 철창에서 끄집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쳤지만 음괄에 의해 선령력과 육신의 힘을 봉인 당한 이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한립이야 원체 몸이 튼튼해서 별 느낌이 없었지만 호삼 등은 끙끙거리며 앓았다.

    오래지 않아 건물 안에서 회색 의복을 걸친 거한이 걸어 나왔다. 머리에 세 개의 혹이 난 추악한 생김새의 구유족인이었다.

    태을경 경지에 이른 회의(灰衣) 거한 뒤로 가죽 채찍을 든 유노 병사 두 명이 따라왔다.

    “흠? 진선계 수사가 아닙니까. 어디서 잡아 온 겁니까?”

    “음괄 대인께서 직접 잡은 이종족들입니다. 유뢰의 가장 아래층에 가둬 놓으라 하셨습니다.”

    거한의 물음에 소뿔 이종족 중 하나가 답했다.

    “음괄 대인께서 직접 잡은 자들이라…….”

    “쓸데가 있으니 특별히 주의해서 관리하라 하셨습니다.”

    “음괄 대인의 명령이라니 알겠습니다. 알아서 처리하지요.”

    소뿔 이종족이 떠나고 회의 거한이 한립 등을 향해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쥐새끼 같은 놈들, 어서 따르거라!”

    회의 거한이 앞서고 그들을 사이에 둔 채 회색 갑옷을 걸친 유노 병사 두 명이 뒤에서 따라왔다.

    검은 건물로 들어간 그들은 중앙의 돌로 된 제단으로 향했다

    여덟 개의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제단에는 검은 전송진법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르거라.”

    거한이 먼저 제단에 올라가고 한립 무리가 고분고분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데, 가장 마지막에 걷던 백리염이 걸음을 늦추자 순식간에 병사의 채찍이 날아들었다.

    “서둘러라!”

    채찍으로 등이 찢긴 백리염은 구르다시피 하며 제단으로 올라가야 했지만 거한은 쳐다보지도 않고 진법을 발동시켰다.

    웅-!

    그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 * *

    다음 순간, 눈앞이 밝아진 한립은 수많은 풍경을 지나 한참 만에야 어두운 대전 안에서 시야를 회복했다.

    흉살기가 짙고 음산한 기운이 흐르는 곳이라 그의 강건한 육체도 바르르 떨려왔다.

    “안 가고 뭐 하는 것이냐!”

    회의 거한이 냉소를 흘리고 걸어갔고, 한립 무리도 말없이 바닥에서 일어나 그를 뒤따랐다.

    대전을 나서자 나타난 기다란 통로의 양쪽에 감방들이 보였는데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처절한 비명이 앞쪽에서 들려왔다.

    “이곳이 유뢰입니까?”

    한립이 감옥들을 살피다 소리를 내어 물었다. 그 말에 회의 거한이 우뚝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보더니 흉흉한 눈빛으로 다가섰다.

    “여기까지 와서도 아무 말이나 지껄여 대다니 간에 배밖에 나왔구나.”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갈고리가 가득 달린 검은 가죽 채찍을 불러냈다. 유노 병사들이 든 가죽 채찍보다 배는 크고 훨씬 흉악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저는 그저 물어봤을 뿐입니다. 유뢰에서는 입을 열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습니까?”

    한립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차분히 물었다.

    “그래, 말할 수 있지. 이 귀극편(鬼棘鞭)에 맞고도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회의 거한은 가소롭다는 얼굴로 팔을 휘두르자 검은 채찍이 독룡(毒龍) 허상 같은 그림자로 변해 한립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팟.

    검은 채찍은 그의 눈동자를 한 치 앞두고 멈추었고, 한립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채찍을 응시했다.

    “배짱이 있구나. 음괄 대인께서 직접 잡아 올만하다. 이번만은 용서해줄 테니 앞으로 또다시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라.”

    지긋이 그를 보던 회의 거한은 검은 채찍을 거두고 앞으로 걸어갔다. 눈빛이 반짝인 한립은 성큼성큼 따라가면서 입을 다물었다.

    “려 수사,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석천공이 그의 옆에 붙어 전음을 보냈고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충동적으로 시비를 건 것이 아니라 회의 거한의 태도를 확인해 본 것에 불과했다.

    음괄과 유락 두 사람이 그를 두고 보인 행동과 말이 왠지 불안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거대한 공간이 나타나고 주변도 급격히 뜨거워졌다.

    고리형 건물 내에 있던 지하광장처럼 열기가 이글거려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화염을 삼킨 듯 괴로웠다.

    광장의 돌기둥에는 수감자들이 묶여서 몸이 화염에 구워질 때마다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고, 그 옆에서 회색 의복을 입은 현장 감독들이 물병에 든 우윳빛 액체를 다 죽어가는 수감자들의 입에 흘러 넣었다.

    하얀 액체를 마신 수감자들은 약간의 기력을 되찾고 계속해서 화염에 구워졌다. 그걸 본 한립 일행의 표정이 미미하게나마 달라진 것은 당연했다.

    “흐흐, 내 채찍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설명해 주마. 이곳은 9층 유뢰의 제1층 연옥(煉獄)이다. 천천히 즐겨보거라.”

    회의 거한이 그들을 훑고 웃음을 흘렸다.

    “총관 대인 오셨습니까!”

    근처에 있던 감독이 회의 거한을 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회의 거한은 대충 손을 젓고는 한립 등을 데리고 아래로 통하는 계단 입구로 걸어갔다.

    아래층에도 거대한 광장이 있었고 검은 연못들에서 뼈가 시린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층은 한옥(寒獄)이다.”

    회의 거한은 한마디를 하고 바로 다음 계단을 통해 세 번째 층으로 내려갔다.

    세 번째 광장에도 연못들이 있었지만 위층과 달리 물이 아닌 독사와 독전갈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수감자들은 독충들 속에 떨어져 마구 물어뜯기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4층, 5층, 6층이 계속 이어졌다…….

    회의 거한은 일부러 한립 일행을 데리고 각층을 한 바퀴씩 돌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괴로워하는 수감자들을 보여주었다.

    듣도 보도 못한 고문법에 호삼과 석천공 등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하얗게 질려갔다.

    그들은 장장 반 시진 만에 유뢰의 9층에 도착했다.

    예상과 달리 9층에는 화로나 연못 같은 장치가 없었고 꽤 깨끗해 보이는 감방들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흉살기의 농도가 다른 어떤 층보다 진해서 눈으로도 뿌연 회색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의 흉살기는 평범한 흉살기와 달리 사나워서 회색 안개가 요동칠 때마다 은은하게 귀곡성 같은 것이 들려왔다.

    한립을 비롯한 다섯 명의 수사들은 9층에 내려오자마자 온몸을 강철로 쑤시는 듯한 고통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회의 거한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웃음 짓다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2, 30개의 감방은 아직 대부분이 비어 있었고 몇몇 수감자들만 갇혀 있었다. 9층에는 감독관이 없었지만, 수감자들이 침묵을 지켜서인지 분위기가 무거웠다.

    “들어가거라.”

    거한은 감방 다섯 개를 열고 한립 일행을 따로따로 가뒀다.

    “9층인 무간옥(無間獄)이다. 여기서 지내며 마지막 시간을 누리거라.”

    회의 거한도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은지 음흉하게 웃고는 사라졌다. 한립은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 주위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가 갇힌 감방은 평범한 금제가 펼쳐진 감옥으로 흉살기가 몸을 파고드는 고통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겨우 걷기나 할 뿐 힘을 쓰지 못하는 그들을 가두기에는 충분한 장소였고 창살 사이로 다른 감방의 수감자들도 볼 수 있었다.

    이곳의 수감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하지가 않았다.

    선령력이 봉인 당해도 영목을 지닌 한립은 여전히 예민하게 그들의 수행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수행이 가장 떨어지는 자가 금선급이고 반수 가까이가 태을경 존재였다.

    수감자들은 회계의 여러 종족의 인물도 있었고 그들처럼 진선계 인물도 있었다.

    “려 수사, 뭔가 알아낸 것이 있으십니까?”

    옆 방에 나란히 갇힌 석천공이 한립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슬쩍 다가섰다. 한립도 숨김없이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공유했다.

    “설마 이렇게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수사는 늘 합당한 방책을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달아날 방법이 없겠습니까?”

    “선령력을 구금당해 우리는 범인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유뢰 최하층에서 무슨 짓을 해도 달아나기는 어렵겠어요.”

    석천공의 물음에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흐흐, 유뢰에 들어와 달아날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순진하구나.”

    그때 감정 없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한립과 석천공이 고개를 돌리니 그리 멀지 않은 감방 안에 머리를 산발한 마른 사내가 검은 비늘로 뒤덮인 손목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귀가 거의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청력이 대단히 좋을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한립은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회계 이종족을 향해 입을 열었다.

    “크큭, 유뢰가 어딘 줄이나 아느냐?”

    귀 큰 사내의 반문에 호삼과 마광 그리고 백리염도 그를 쳐다보았다.

    “구유족의 감옥 비슷한 곳 아닙니까?”

    석천공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감옥? 하하하! 대체 어디서 온 것들이기에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말해주마. 이곳 유뢰는 구유족이 고급 괴뢰를 제련하는 곳이다. 이곳에 갇힌 수감자들은 전부 괴뢰를 제련하기 위한 원재료란 뜻이지.”

    귀 큰 사내의 말을 들은 석천공의 얼굴색이 달라졌다. 한립도 미간을 좁혔으나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연괴보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곳을 내려오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았기에 예상하던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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