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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65화 (1,622/2,000)
  • 1865화. 변고

    *

    다들 긴장된 기색으로 의식의 힘을 어봉진신부에 불어넣자 뜨거운 불길에 눈이 내리듯 불편함이 해소되었다.

    “방심해선 안 됩니다. 업화 속에 뛰어들면 흉살기가 파고들 테니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한립은 호산과 석천공이 한숨을 돌리는 것을 보고 당부했다.

    그의 말을 신호로 동시에 다리에서 뛰어내린 그들은 업화 통로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쿠쿠쿵.

    그런데 그들이 다리에서 날아오르자마자 전방의 업화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이런, 업화 연못 아래에 금제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한립의 말이 끝나자마자 업화 속에서 맷돌 크기의 검은 불구슬이 솟아올라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공기가 뿌연 연기로 자욱해져서 숨을 쉬는 것도 곤란했다.

    “마광 수사!”

    눈을 번득인 한립이 소리쳤다.

    그러자 마광이 곧바로 소매를 펄럭여 거의 실체화된 검은 안개를 문어 다리처럼 휘둘러 업화 맷돌들을 공격했다.

    퍼퍼퍼펑!

    대량의 검은 불똥이 튕겨 나가는 듯하다가 검은 촉수들을 타고 마광에게 몰려들었다.

    미간을 좁힌 것이 의외인 듯했으나 마광은 양팔을 펼쳐 무형의 기운을 발산했다.

    업화의 불똥이 튄 호삼은 녹색빛을 반짝이면서 튕겨 나갔다.

    흉살기 침식에 의식이 중상을 입어 머리가 띵! 했지만 어봉진신부의 비호로 의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풍파는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세졌다.

    업화 맷돌들이 계속해서 날아오르고 연못은 크게 파도를 쳐서 검은 불의 장벽처럼 그들을 덮쳤다.

    석천공이 은색 비파를 빠르게 튕겨 공간의 힘으로 업화 장벽에 틈을 만들어냈다.

    “오래는 버티지 못합니다! 서두르세요!”

    이를 악문 석천공의 외침에 한립도 머뭇거리지 않고 금빛 시간 영역으로 주변을 감싸고 날아갔다.

    금색 영역과 업화가 맞부딪칠 때마다 흉살기가 사정없이 체내로 밀려들었다.

    한립은 의식에 흉살기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지만 미리 연신술을 절정으로 발동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업화의 불길에 한립의 영역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기합을 넣은 그는 소매 속에서 푸른 사슬 몇 개를 날려 백리염 등을 감싸고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석천공이 만들어 놓은 화염 장벽 틈으로 지나쳤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던 석천공은 어찌나 힘겹게 비파를 연주했는지 손끝에 피가 맺혀 있었다.

    “된 건가…….”

    세혼구로 통하는 업화 통로가 십 장 거리로 가까워지자 다들 암암리에 안심하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통로 입구에 홀연히 주술문자로 이루어진 진법이 나타나 줄줄 흘러내리던 검은 업화의 흐름을 가속 시키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한립 일행은 흩어져 아래쪽 업화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한립이 검은 업화와 침투하는 흉살기에서 벗어나고자 진언보륜에서 금빛을 발산했다.

    출렁이던 검은 업화가 거의 멈추고 열기와 흉살기의 위력도 감소했다. 그 틈에 풀쩍 뛰어오른 한립은 진언보륜을 따라 연못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팟.

    그런데 그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머리 위로 검은 구름이 끼고 ‘포라만상(包羅万象)’이라 새겨진 네모난 인장이 등장해 혼백을 빨아들이는 섭혼의 힘을 방출했다.

    깜짝 놀란 한립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냅다 검은 인장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거대한 푸른 주먹 허상이 날아가 검은 인장을 때리고 쾅!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러나 쪼개진 것은 인장이 아니라 주먹 허상이라 푸른 기파가 도처로 흩어졌다.

    한립은 순간적으로 전신의 근육을 키워 산악거원으로 변신한 뒤 떨어져 내리는 검은 인장을 받쳐 들었는데, 처음에는 맷돌 크기였던 인장이 몇 배로 커져 나중에는 산봉우리가 내리누르는 듯한 중압감을 주었다.

    그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검은 인장은 시간법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게 아니라 함유한 힘이 너무 커서 속도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미미했던 것이었다.

    “끌끌끌, 시간법칙에 진령혈맥까지……. 몰래 나생구에 숨어들 만한 실력이기는 하구나. 말해 보거라. 너희는 윤회역 사람이냐 아니면 천정 사람이냐?”

    그때 괴소를 흘리며 누군가 탁한 목소리를 냈다.

    한립은 온몸에 자금색 비늘을 일으키고 검은 인장과 주변의 업화 불길을 들고 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검은 장포를 입고 높다란 관을 쓴 새하얀 얼굴의 사내가 묵우보다 더 진한 회백색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용모가 단정하고 선이 고와서 여인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구유족 특유의 냉담한 표정에 입꼬리만 올라가 있어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상대가 대라경 수사라는 점이었다. 그 뒤로 소뿔이 달린 이종족 두 명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연괴보에서 보았던 동족들과 달린 이미 제련이 완성된 괴뢰라 어깨와 팔에 뼈 가시가 솟구쳐 있고 손목에는 새까만 사슬이 둘둘 말려 있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호삼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은색 비파를 든 석천공은 검은 사슬을 든 유노 여덟 명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이곳에 등장한 유노들은 얼굴의 비늘이 회백색이 아니라 새까만 색이었고 가슴의 구멍에서 검은 업화가 넘실거렸다.

    업화가 검은 사슬을 타고 날아들어 공처럼 말려들자 석천공은 힘껏 비파를 튕겨 은빛 공간장벽으로 사슬들을 밀어내려 했다.

    그리고 백리염은 그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변의 업화들을 떼어내고 있었다. 그 역시 석천공처럼 적수가 있었는데 상대의 얼굴을 보고 기함하고 말았다.

    그는 바로 소류였다.

    지금의 소류는 선인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이 상반신을 벌거벗고 뻥 뚫린 가슴의 구멍에 업화가 깃든 철 구슬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두 팔을 감싼 새까만 사슬이 그의 두 팔을 관통하고 손바닥으로 빠져나와 검은 도끼와 같은 쇠붙이를 달고 있었다.

    한립은 소류의 눈동자가 회백색인 것을 보고 동공을 수축했다.

    “눈빛을 보아하니 내 휘하의 장수를 알고 있나 본데?”

    구유족 대라경 수사가 한립이 변신한 거원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과연 아는 사이로군. 이 자는 갇혀 있는 녀석들과 달리 운이 없어 공간의 힘에 갈기갈기 찢겨 내가 찾아냈을 때부터 시체였다. 그간 적적해 보였는데 동료들을 찾아냈어!”

    “그때 이미 목숨을 잃었다니…….”

    한립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마음이 안 좋다면 너도 함께하면 되지 않겠느냐? 어떠냐?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나?”

    구유족 대라경 수사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광소를 터트렸다.

    쿠쿵.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업화 연못의 검은 불길이 치솟아 한립을 감싸고 뜨거운 열기가 몸과 혼백을 공격해 왔다.

    “겨우 금선 주제에 혼백의 힘이 강하구나? 흥미로워. 그래,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겠다.”

    연신술을 발동한 한립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자 구유족 대라경 수사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립은 두 팔에 힘을 풀지 않고 검은 인장을 버티면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다른 이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마광의 처지도 그리 좋지 못했다.

    그보다 절반밖에 안 되는 소녀에 의해 목이 붙들려 업화 연못 속에서 끌려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마광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전혀 겁먹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핏빛 피풍의를 걸친 소녀의 복색은 다른 구유족인들과 달리 아주 눈에 띄었다.

    마광이 전신에서 검은빛을 일으켜 빠져나가려 했으나 목을 붙든 소녀의 손에서 암홍색 문양이 나타나 그가 허상화되는 것을 막았다.

    그래도 마광이 웃음기를 거두지 않자 소녀가 불만스럽게 목을 비틀고 이마를 쳤다.

    파앗.

    목이 꺾여 바닥에 쓰러진 그의 이마에 ‘금(禁)’자가 떠올랐다.

    뒤이어 구유족인 뒤에 서 있던 소뿔 괴뢰들이 다가와 검은 사슬로 마광을 묶었다.

    “유락 낭자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음괄, 나생구를 맡고 있으면서 침입자가 여기까지 오게 만드신 겁니까?”

    구유족인의 인사에도 소녀는 냉랭히 따졌다. 놀랍게도 대라경 구유족인은 헛웃음을 짓고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이러다 남은 것들도 제가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유락이라는 소녀가 뒷짐을 지고 조소했다.

    인족과 비슷하게 생긴 소녀는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미간에 눈을 닮은 검은 비늘이 하나 자라있고, 눈꺼풀 아래로는 새빨간 표식이 있어 묘한 매력을 풍겼다.

    한립은 소녀의 눈이 회백색이 아니란 것을 눈여겨보았다.

    ‘회계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어찌 선계의 진령도 넘어온 겁니까?”

    유락은 거원으로 변한 한립을 보고 멈칫하다 의외라는 듯 물었다.

    “진령이 아니라 진령혈맥을 지닌 인족이니 유락 낭자의 도움은 필요 없겠습니다.”

    그 말에 소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음괄도 더는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한립을 내리누르고 있는 검은 인장의 글자에 핏빛 광채를 일으켰다.

    엄청난 무게에 신음을 삼킨 한립은 진언보륜을 체내로 되돌리고 전력을 다해 역전시켜 재빨리 인장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감히 어디로 달아나려는 것이냐!”

    이에 음괄이 소리를 지르며 소매를 저어 업화 연못 속에서 검은 돌기둥들을 일으켜 한립의 앞을 막아섰다.

    다급해진 한립은 청죽봉운검 아홉 자루를 불러내 합친 다음 벽사신뢰를 뿜었다.

    치지지직!

    수많은 금색 뇌전빛들이 응결해 거대한 금색 뇌전을 이루고 업화의 방해를 뚫고 검은 돌기둥으로 떨어졌다.

    쿠르릉!

    한립이 폭발한 검은 돌기둥 틈으로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그를 막아섰다.

    바로 음괄이었다.

    상대의 손이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이 빠르고 손바닥에서 무궁무진한 흡입력이 흘러나와 한립의 옷깃을 잡아챘다.

    쿵.

    음괄이 다른 손으로 검은 인장을 붙들어 그의 이마에 도장을 찍으려 했다. 이에 한립이 진언보륜을 움직이려 했으나 늦어 결국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는 온몸이 저릿해지며 선령력이 봉쇄돼 꼼짝없이 음괄에게 끌려갔다.

    석천공도 벌써 붙잡히고 백리염만 남아서 태을경 괴뢰인 소류와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줄곧 관망하던 유락이 백리염을 기습하자 한립의 마음은 더없이 무거워졌다.

    들킬 수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렇게 빨리 태을급인 마광, 호삼, 백리염 그리고 금선 최고봉인 그와 석천공이 제압을 당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침입한 것을……어찌 알아낸 겁니까?”

    한립은 뻣뻣하게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

    “자비를 베풀어 알려주마. 이곳을 지키는 유노들 중에 내 괴뢰들이 섞여 있었다.”

    ‘그걸 생각지 못하고 방심했구나…….’

    의문이 풀린 한립은 속으로 탄식했다.

    음괄은 검은 뇌전 속에서 주술문자들을 만들어 그들의 몸속에 박아 넣었다.

    단전에 바늘이 박히는 고통을 느낀 한립은 황급히 몸의 상황을 살폈다. 단전 안에 잿빛이 반짝이고 검은 뇌전실이 나타나 원영을 둘러싸고 억류하고 있었다.

    정체 모를 법칙의 힘이 감도는 검은 뇌전실 때문에 선령력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음괄은 흡족한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뇌살법칙이 나날이 현묘해지십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락이 칭찬했다.

    “겨우 뇌살법칙인 것을요. 회계에서 이 법칙을 수련한 이가 적어도 10명은 될 텐데요. 낭자의 법칙과 비교나 되겠습니까.”

    음괄의 눈에 질투가 스쳤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이들을 어찌 처리할 참이십니까?”

    유락이 가식적인 웃음을 띠다 정색하고 물었다.

    “수라성에 잠입한 의도를 알아내야지요. 가둬 놓고 고문해볼 생각입니다.”

    “인족, 마족 거기다 회계의 허합족까지 여러 인물이 섞여 있어 이들의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겠습니다. 저도 그런 고문에는 능한데 1명만 데려다 도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유락은 정확히 한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말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한립이 흠칫 놀랐고 음괄의 얼굴에도 천천히 미소가 가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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