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64화 (1,621/2,000)

1864화. 미혹

*

“수라성에 자연적으로 업화가 생성되는 지하 구덩이가 있어서 구유족 족인들은 태어나자마자 그곳으로 보내져 세례를 받는다는 소문입니다. 그들은 그걸 혼백을 씻어 낸다는 의미로 ‘세혼(洗魂)’이라 부른다더군요.”

“갓 태어난 아기를 업화로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석천공이 놀라 입을 벌렸다.

“회계에서 수행하는 이들은 흉살기를 근본으로 해서 기본적으로 업화에 대한 내성이 강합니다. 거기다 그들도 갓난아기를 업화 속에 던져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업화 주변에서 성장하게 한다더군요. 그러다 12살이 되면 정말 업화 속에서 세례를 받고 그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는 자만이 진정한 구유족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유족의 수가 이리 적도 나머지는 전부 유노인 거군요…….”

호삼은 생각에 잠겼다.

“저 안쪽에서 강렬한 업화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업화 구덩이는 저 아래 있겠지요.”

“허나 소문대로라면 업화 구덩이는 응당 세혼구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석천공이 의문을 제기했다.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나 세혼구와 나생구 양쪽에 걸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광이 웃으며 말했다.

“구유족이 업화로 법보를 제련하려고 통로를 뚫어 업화를 나생구로 끌어왔을 가능성도 있고요. 직접 내려가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말입니다.”

“려 수사, 업화 구덩이를 통해 세혼구로 향할 생각입니까?”

백리염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성벽을 넘으려 시도하다가는 이곳에 머무는 대라경 존재에게 걸릴 위험이 크니 시도라도 해보자는 뜻입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업화의 무서움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구유족도 아닌데 어찌 맨몸으로 업화를 건넌단 말입니까?”

석천공이 걱정스레 물었다. 흉살기 침식으로 근심이 많은 판에 업화까지 더해지면 문제가 더 커질 것이다.

“그건 백리 수사에게 가르침을 청해야겠지요.”

한립은 백리염을 보았다.

“흉살기와 업화는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업화의 불길은 바깥에서 몸을 태울 뿐 아니라 혼백까지 영향을 미쳐서 법보로 방어한다고 해도 의식의 힘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꾹 참고 견뎌야 한단 말이군요?”

백리염의 말에 호삼이 탄식했다.

“품계가 있는 혼백 선기가 있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공동으로 발동하면 의식을 지킬 수 있겠지요.”

“……제게 보물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침음하던 한립이 미간을 짚어 하얀 부적을 불러냈다. 의식세계 속에 보관하던 어봉진신부였다.

“려 수사, 혹시 이미 연신술 5성을 익히신 겁니까?”

백리염이 그가 발산하는 특수한 기운을 감지하고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 어봉진신부면 모두의 혼백을 비호할 수 있겠습니까?”

“부적 자체도 비범한 데다 수사의 의식도 강해서 힘을 모아 발동하면 되긴 될 겁니다. 그저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걱정이지요.”

백리염이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을 표했다.

“제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전부 구유족인으로 변장해 지하로 내려가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궁리하던 호삼이 제안했다.

“안 됩니다. 구유족의 기운은 무척 특수해서 우리가 따라 했다가는 금방 들킬 겁니다.”

석천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하,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되겠지만 이게 있으면 또 달라질 겁니다.”

호삼은 새하얀 여우 꼬리 털 몇 개를 불러냈는데 광택이 흐르는 것이 옥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 털에서 여우 냄새가 풀풀 풍겨서 코를 괴롭혔다.

“이건 옥소호미(玉霄狐尾) 아닙니까.”

석천공이 코를 막고 있다가 번득 눈을 부릅떴다.

“역시 석 형이 물건 하나는 잘 알아보십니다. 옥소호미, 그것도 우리 일족의 태을경 선배께서 남기신 물건이에요! 빌려드리는 것이니 깨끗이 쓰고 다들 돌려주셔야 합니다.”

“환술 분야에서 유명한 보물인 옥소호미가 있다면 충분히 왜정족을 속일 수 있겠습니다. 어찌 사용하면 되는지 알려주시지요.”

백리염이 뿌듯해하는 호삼을 보며 웃음 지었다. 호삼은 옥소호미를 모두에게 나눠주고 사용법을 일러주었다.

그들은 기운의 혼란을 겪고 모습이 달라졌는데 마광과 백리염은 태을경의 구유족인으로 나머지는 세 명의 유노로 변했다.

더는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어진 그들은 훌쩍 날아올라 고리형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왜정족인들이 폭발의 흔적을 보면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대인들을 뵙습니다.”

한립 등이 나타나자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허공을 향해 예를 올렸다.

“…….”

백리염과 마광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장내가 싸늘해졌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진선계 녀석들이 협조적이지 않아 업화살뢰(業火煞雷) 실험을 오늘에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대규모로 제련하기에는 이르니 사흘, 아니 이틀만 기다려 주시면 대인의 마음에 드는 물건을 내놓겠습니다.”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왜정족 우두머리가 나서서 사죄했다.

‘진선계?’

한립 등은 그 소리를 듣고 뜨끔했다.

“내려가서 직접 보겠다.”

“예!”

백리염의 분부에 왜정족인이 황급히 길을 안내했다.

쿠쿵.

지하 통로가 열리고 뜨거운 업화와 흉살기가 느껴졌다.

통로로 내려가면서 진한 흉살기게 둘러싸여 있자니 몹시 괴로웠고 한립마저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진정으로 업화의 불길에 뛰어든 것도 아닌데 이렇게 힘이 들다니.’

다행히 약간의 적응 시간이 지나자 흉살기로 인해 불안정해졌던 혼백의 상태가 안정을 되찾았다.

지하광장 양쪽에 수십 명의 유노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가 마광과 백리염을 보고 분분히 허리를 숙였다.

“길을 안내하거라.”

왜정족인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멀리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커졌다.

기다란 통로를 지나 또 다른 대청에 이른 그들은 불길 속에서 대량의 왜정족인들이 무언가를 달궈 법보나 병장기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각 방마다 새까만 업화가 활활 타오르는 화로가 들어있었다.

“보시지요, 업화살뢰를 열심히 제련 중입니다.”

왜정족인이 어느 방 앞에서 멈춰서자 마광과 백리염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유노 역할의 한립 등이 뒤따랐다.

이전의 방들보다 몇 배는 큰 공간에서 거의 백 명의 왜정족인들이 바삐 일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아무도 일을 멈추지 않았고, 관리 감독을 하던 진선경 유노만 다가와 마광과 백리염을 향해 예를 올렸다.

중앙의 거대한 화로에 검은 화염이 넘실거리고 얼굴의 가면은 물론 온몸에 완전 무장을 한 왜정족인들이 기다란 용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화염을 취하고 있었다.

징!

왜정족인 한 명이 용기에 업화를 담고 있는데 실낱같은 불줄기가 새어 나와 한립 일행 쪽으로 튀었다.

이에 당황한 왜정족인이 급히 화염을 수습하는데 유노가 검은 화염 채찍을 꺼내 내리쳤다.

촤악!

왜정족인이 쓴 가면이 갈라지면서 얼굴에 상처가 남았지만,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얼굴로 한마디 말도 없이 흩어진 업화를 쫓아야 했다.

검은 화염이 발밑까지 퍼지자 마광은 대수롭지 않게 몸을 굽혀 손끝으로 쓸어 담은 다음 화로 속으로 던져 넣어 주었다.

그걸 본 유노가 깜짝 놀라 사죄의 뜻으로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화염 채찍으로 잘못한 왜정족인의 목을 감았다.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는 왜정족인을 보고 한립 일행을 안내한 우두머리 왜정족인의 얼굴이 분노로 파랗게 질렸다.

“되었다. 어서 가져오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백리염이 그걸 보고 손을 저었고 유노가 그제야 채찍을 거두었다. 잘못을 범한 왜정족인은 큰 은혜를 입은 것처럼 굽실거렸다.

그들을 안내한 왜정족인이 서둘러 완성된 업화살뢰 십여 개를 대령했다.

“안에 불 속성의 법칙의 힘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걸 확인한 백리염이 한립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들이 아까 말한 선계에서 왔다는 두 사람과 연관이 있을지 모릅니다. 살뢰의 위력이 강하니 챙겨두시지요.”

“그들을 보러 가시겠습니까?”

“업화 구덩이부터 가보아야겠습니다. 세혼구로 진입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여기까지 대화를 나눈 백리염이 열댓 개의 업화살뢰를 거두고 마광을 향해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업화 구덩이도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온 김에 그럽시다.”

마광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들 이쪽으로 가시지요.”

유노가 방에서 나와 어느 통로로 그들을 안내했다.

한립은 방을 나서며 힐끗 막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왜정족인들을 보다가 그들을 안내한 길잡이의 눈빛에 증오와 분노가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길잡이는 그가 돌아보자 노기를 지우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립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자 왜정족인은 안심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 * *

십여 리를 더 가니 아주 넓은 지하 동굴이 나왔다.

거대한 검은 화염 연못이 증발하는 흉살기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고 통로가 점점 좁아지면서 연못 중앙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변했다.

화염 연못 가장자리의 새까만 벽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불길이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었다.

“려 수사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나생구의 업화는 세혼구의 것을 끌어온 것이 맞았어요.”

석천공이 전음을 보냈다.

“그렇긴 한데 시간이 촉박합니다. 흉살기가 너무 심한 곳이라 옥소호미의 영력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습니다.”

갑자기 호삼이 모두에게 경고했다.

한립이 무슨 말을 하려다 다리 위에 선 열댓 명의 유노들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래로 네모난 검은 철창이 매달려 업화 위에서 화염과 흉살기의 침식을 받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머리를 산발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낯익었다.

철창 좌측에 붉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과 다른 쪽에 기대 있는 새하얀 백발에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인물 모두 한립이 아는 이들이었다.

“치융과 열화 수사 아닙니까?”

그들을 알아본 것은 한립 만이 아닌지 호삼이 전음을 보내왔다.

“우리보다 운이 나빴는지 구유족에게 잡혀 있었군요.”

석천공이 애석하다는 듯 답했다.

“아는 자들입니까? 구해야 할까요?”

그들을 모르는 백리염이 물었다. 열화선존을 쳐다보던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몸에 금제가 심어있어 단시간 내로 풀어줄 방법이 없습니다. 세살지부터 가고 나머지는 그 후에 이야기합시다.”

“지금 손을 쓰면 되겠습니까?”

“지금입니다.”

한립이 마광에게 눈짓을 했다.

맨 앞에 서 있던 마광이 씨익 웃고는 소매 속에서 검은 안개를 용처럼 뿜어 길을 안내한 유노의 목을 졸랐다.

“대인, 어째…….”

유노는 마지막 말도 끝맺지 못하고 흉살기에 매몰되었다. 동시에 대량의 검은 안개가 다리에 서 있는 열댓 명의 유노들도 기습했다.

백리염이 혼란 속에서 진작 몸을 날려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광은 거대 손으로 길을 안내한 유노를 허공에 들어 올렸다.

털썩.

마광이 흉살기를 거두자 피를 다 빨린 것 같은 홀쭉한 시체가 떨어졌고, 아래쪽 업화가 맹렬하게 치솟아 시체를 없앴다.

백리염은 다리 위에서 십여 명의 유노들을 발로 뻥뻥 차서 업화 구덩이 속으로 빠트리고 있었다.

“갑시다.”

옥소미호를 떼서 호삼에게 돌려준 일행은 빠르게 다리를 지났다. 한립은 중간에서 아래쪽을 힐끗 보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철창 속의 열화선존은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눈동자가 잿빛으로 변해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 사형과 한패 아닌가? 어찌 구하려고도 하지 않고 가는 것인가?”

그나마 치융이 고개를 들고 낄낄 웃음을 흘렸다.

호삼이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늦추자 석천공이 그를 지나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리 끝에 이른 한립이 연신술을 운용해 자신의 미간에서 하얀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봉진신부라는 큰 글자가 떠올라 강대한 의식의 힘으로 일행을 감쌌다.

“다들 의식의 힘을 부적 속에 불어 넣고 움직여야 합니다.”

한립의 말에 다들 분분히 몸을 보호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백리염은 한눈에 보기에도 품계가 있는 용 비늘로 제련한 새빨간 문양에 새까만 색을 지닌 갑옷을 불러냈고, 호삼은 입을 벌려 값비싸 보이는 진한 녹색 구슬을 뿜어 머리에 쓴 관에 박아넣었다.

두 보물이 합쳐지면서 그의 피부를 눈부신 녹색으로 물들였다.

석천공은 은색 비파를 불러내 튕겨 무형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공간장벽으로 몸을 보호했다.

마광은 업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립이 전신에 금색 비늘을 일으켜 그 위에 암녹색 현무 갑옷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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