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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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이 네 벽에 붙은 뒤에 석천공은 바깥의 동향을 주목했다. 한립과 호삼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흘러 거의 반 각이 되어가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광 수사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닐까요? 아직도 조용하다니요.”
개자둔천부가 효력을 다해가자 호삼이 초조하게 전음을 보내왔다.
“연괴보까지 가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지요.”
미간을 좁힌 한립은 혹시라도 마광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릴까 따로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다.
쿵.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멀리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와서 그들을 기쁘게 했다. 괴연보 쪽에서 빛이 번쩍이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연보 쪽이다! 어서 귀목 대인께 알려야 한다.”
성문 주변의 유노들이 대번에 안색이 변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이 알리기도 전에 허공이 반짝이고 하얀 살쾡이를 안은 귀목이 나타나 노기 짙은 얼굴을 드러냈다.
검은 빛줄기로 변한 그는 귀연보 쪽으로 번개처럼 날아갔다.
“성공했습니다!”
희색이 만연한 석천공이 수결을 맺어 미리 붙여둔 네 장의 부적에서 검은빛의 장막을 분출했다.
동시에 그의 손에 마광에게 준 것과 똑같은 은색 팔각 옥판이 나타나 은빛 주술문자들을 토해내었다.
곧 주술문자로 이루어진 은색 진법에서 마광과 백리염이 나타나 한립 등을 찾았다.
“비술을 이용해 은닉해 있습니다.”
석천공은 법결을 던져 두 사람이 그들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일은 순조로웠습니다. 천마 비술로 금선급 회수가 미쳐 날뛰게 해서 연괴보 안의 진법 몇 개를 부쉈으니 대라경 존재라 해도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한립이 묻자 마광은 득의양양하게 답했다.
“잘 되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공간 금제 핵심으로 가시지요!”
석천공은 은색 옥판 2개를 회수하고 벽에 붙은 4장의 부적까지 거두고 2층으로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다섯 명의 수사들은 전부 2층 왼쪽 편전에 앞에 서 있었다. 대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고 호삼이 밀어 열려고 했으나 검은빛이 떠올랐다.
“제길, 여기도 금제가 펼쳐져 있습니다!”
호삼의 얼굴이 굳고 다른 이들도 표정이 달라졌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앞으로 나선 한립이 두 눈에서 보랏빛을 방출해 검은 금제를 감응해 보았다. 연귀보의 구유대장현금과 무척 흡사해서 파훼할 수 있는 금제였다.
마광이 두 팔을 펼쳐 검은 보호막으로 모두의 기운을 가리고, 한립이 검은 금제 속으로 마구 법결을 던져 넣었다.
반짝거리던 검은 금제가 물의 표면처럼 일렁였다.
“찾았다!”
눈을 번쩍 뜬 한립은 힘차게 수결을 맺어 두 손에서 검은빛을 쏘아 보냈다.
끼익.
검은 금제가 어두워지면서 문이 열렸다.
나머지 수사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한립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표면의 금제를 다시 원래 대로 돌려놓았다.
이전에 보았던 편전들보다 훨씬 넓은 공간에는 제단 8개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로 빼곡하게 진법 깃발과 원반 등이 놓여 있었다.
진법 금제의 핵심이 분명했다. 굵은 빛이 제단에서 날아올라 편전 지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곧 공간 파동이 느껴지는 은백색 법기들이 꽂힌 제단을 발견했다.
“흐흐, 구유성의 보호 금제가 8개나 되다니 많이 늘었구나.”
한립의 머릿속에서 석경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물어봐도 답도 없더니 왜 이제야 나서는 겁니까?”
몸을 날려 석천공에게 다가간 한립의 냉랭한 질문에 상대는 웃기만 하고 답이 없었다.
“미리 구유대장현금 파훼법을 전수해 준 것은 귀연보에 소란을 일으켜 귀목을 끌어내도록 유도한 겁니까?”
눈을 반짝인 한립이 다시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구유성 일에 흥미가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딴짓은 하지 마세요. 일단 발각되면 모두가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하고 수사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날 그리 경계할 것 없다. 우리의 운명은 이미 하나로 엮여 있는데 내가 널 해치겠더냐.”
듣고 있던 석경후가 탄식했다.
“매사에 제대로 사정을 털어놓지 않으니 어찌 믿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석경후는 가볍게 웃음 짓고 침묵했다.
그때 한립은 은색 깃발과 주먹 크기의 은백색 수정돌들 4, 50개 놓인 복잡한 진법을 앞두고 있었다.
은색 수정돌은 영석과 비슷했으나 나선형의 무늬가 새겨져 은빛과 공간 파동을 내뿜었다.
‘은태석(銀胎石)!’
눈을 반짝인 한립이 은색 수정돌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공간의 힘을 지닌 진선계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진귀한 재료였는데 회계에서 보게 되니 의외였다.
석천공이 제단 옆에 붙어 은색 옥병을 꺼내고 숙연하게 주술을 읊었다.
웅.
옥병에서 은색 액체가 날아올라 그의 손짓에 따라 수십 방울로 갈라지더니 은태석들 위로 떨어져 흡수되었고 진법의 은빛이 잠잠해졌다.
“되었습니다. 모두 모이세요!”
석천공이 수결을 맺어 순식간에 지면에 은색 진법을 만들어냈다. 일행들이 진법에 오르자 마광이 양손에서 검은 기운을 불러내 진법을 뒤덮었다.
은빛이 반짝이고 한립 일행이 사라진 후에는 검은 기운과 은빛이 빠르게 흩어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광채가 약해졌던 은태석들도 원래대로 돌아가 공간 진법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 * *
금제가 회복되자마자 귀목이 돌아왔다.
막 3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는 힐끗 좌측의 편전을 보려다 고개를 젓고 발길을 돌렸다.
거의 동시에 어느 한적한 골목에 흐릿하게 한립 일행이 나타났다.
“겨우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구역이 이렇게 차이가 난단 말입니까? 나생구 안의 혼탁한 기운은 둘째 치고 흉살기가 너무 짙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생구 안의 온도도 너무 높군요.”
호삼이 코끝을 찡그리자 석천공도 입을 열었다.
“백리 수사, 윤회역에서 확보한 수라성 내부 정보는 없습니까?”
한립은 백리염을 향해 물었다.
“회계는 선계와 달리 각 지역 간의 교류가 폐쇄적입니다. 당연히 구유역과 같은 곳의 소식은 바깥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요.”
“어쩔 수 없이 가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음 벽만 넘으면 세혼구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나생구 안의 건물 배치가 이상합니다. 이상하게 생긴 고리형 건물이 많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도 않아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 알 수 없고요. 어느 방향으로 가든 저 건물들을 지나야 합니다.”
마광이 입을 열었다.
“그런 것까지 고려할 시간이 없습니다. 최대한 기운을 숨기고 빠르게 통과해야 합니다.”
한립의 말이 끝나고 일행은 마광을 따라 나생구 외곽으로 향했다.
길에는 유노 부대가 많았고 곳곳에 세워져 있는 요새에는 진선 중기에 이르는 수사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더는 못 가겠습니다.”
시간이 꽤 흘러 세혼구 쪽 외곽에 이른 이들은 마광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기를 보십시오.”
마광이 가리킨 곳에는 벽 아래 지면에 수박 크기의 눈알들이 일정 간격으로 박혀있었다. 거기다 검은 성벽에도 시뻘겋게 물든 눈알들이 가득했다.
“이런, 이렇게 많은 수라귀안(修羅鬼眼)이라니…….”
백리염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라귀안이 뭔데 그럽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지 호삼이 물어보았다.
“수라대요의 몸에 자라나는 3,600개에 달하는 눈인데 환영과 허상을 꿰뚫어 보아 수사의 환술로 더는 속일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은 몰래 성벽으로 다가가 공간 법칙으로 넘어갈 수 없단 말 아닙니까.”
백리염의 설명을 듣고 석천공이 미간을 좁혔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던 수라귀안이 그쪽을 쳐다보려 했다.
한립 등은 입을 다물고 기운을 갈무리한 다음 뒤로 물러났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킨 줄 알고 기겁한 그들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에…….”
백리염이 가리킨 곳에는 마광이 말했던 정체 모를 고리형 건물이 보였고 그 위로 버섯 모양의 검은 구름이 솟아올랐다.
“마광 수사와 제가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이곳에 잘 숨어 계세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한립의 말을 듣고 백리염이 소리를 낮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호삼 수사와 석 수사만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한립 등 세 사람이 흐릿하게 사라져 순찰탑을 피해 고리형 건물의 담 쪽으로 다가갔다.
담에 복잡하게 적힌 문양은 다행히 감지진법이 아닌 강화진법이었다.
기운을 숨기고 담을 넘은 그들은 돌조각들이 난무하고 곳곳에 구멍이 뚫린 검은 광장을 보았다.
그들 앞에는 지면이 갈라져 있었고 그 안에서 하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세 사람이 의아해하는데 광장 한쪽의 지면이 열리면서 통로가 만들어지고 누군가 걸어 나왔다.
검푸른 비늘을 지니고 상반신을 드러낸 왜소한 이종족들이었다.
뾰족하고 작은 귀에 입술 바깥으로 튀어나온 이빨 그리고 대머리 중앙에 약간만 자라난 검은 털들이 매우 추해 보였다.
“업화의 기운입니다!”
백리염이 바닥의 갈라진 틈을 보고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한립은 왜소한 이종족을 살피며 물었다.
이종족들은 굵은 어깨를 구리 조각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그중 5개로 구리 조각을 가장 많이 지닌 자가 분노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위력이 너무 떨어져서 써먹을 수가 없겠구나. 구유족 대인들께서 이래서야 마음에 들어 하시겠느냐? 가서 가장 위력이 센 것으로 다시 갖고 오거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벌벌 떨던 다른 족인이 검은 구슬을 들고 나타났다.
“장로님, 이제 지하로 피하시지요.”
족인의 말에 그들은 다시 통로를 통해 지하로 들어갔고, 남아 있던 키 작은 이종족은 주문을 외다 들고 있던 구슬을 광장 중앙으로 던졌다.
한립은 구슬 표면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손을 저어 암녹색 거북 등딱지 같은 방패를 불러내 앞을 막았다.
쿠앙!
검은 불길이 치솟고 사방팔방이 불바다가 되었다.
막 구슬을 발동한 이종족이 서둘러 지하 통로로 숨으려 했으나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검은 화염에 잡아먹혀 끈적하게 녹고 말았다.
광장의 거대한 검은 돌들도 빠르게 녹아 흘러내렸고, 한립 등이 숨은 바위도 마찬가지였다.
“갑시다.”
광장을 빠져나온 그들은 바로 호삼, 석천공에게 돌아갔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스럽습니까? 들킨 줄 알고 찾으러 갈 뻔했어요.”
호삼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고리형 건물 안은 회계 법보의 위력을 실험하는 곳이었습니다.”
한립이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럼 방금 그 소리도…….”
“맞습니다. 업화로 제련한 법보가 폭발한 것인데 위력이 강해 진선경 수사에게도 위협적이겠더군요.”
마광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방금 본 이종족들은 법기 제련이 능하다는 왜정족(倭精族)이었습니다.”
한립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다 방금 본 이종족들과 외양이 일치하는 종족을 찾아냈다.
“왜정족이라면 수천 년 전에 이미 멸족이 되지 않았습니까?”
석천공이 경전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리고 놀라워했다.
“멸족되었다는 것은 거짓 정보이고 구유족이 데려가 사적으로 자신들의 법보를 제련하도록 부리는 듯합니다.”
“소문이 정말이었군요…….”
“무슨 소문 말입니까?”
백리염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에 호삼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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