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화. 성동격서(聲東擊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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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 호삼, 석천공은 조용히 성벽을 지키는 유노들을 지나 성문 가까이 다가섰다.
양쪽으로 된 묵직한 성문은 역시나 닫혀 있었고 그 위로 3층으로 된 검은 대전이 양옆의 비교적 작은 각루들과 돌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돌길을 병장기를 든 유노들이 순찰을 돌고, 아래쪽 성문 도 유노 병사들이 물샐틈없이 지키는 중이었다.
성문 위의 궁전과 각루를 올려다보는 한립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대라경 존재가 있는 전각에 침투하려니 자연히 손에 땀이 났다.
“석 형, 정말 대라급 존재의 감지를 피할 방법이 있는 겁니까?”
호삼도 이제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가 계사족에서 도둑질을 하려다 잡힌 것도 대라급 존재 때문이라,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직접 겪어 알고 있었다.
“십중팔구는 통할 거라 자신합니다.”
석천공은 씩 웃으며 품에 손을 넣어 하얀 부적 세 장을 꺼냈다.
겨우 손가락 두 개를 붙여 놓은 듯 작은 부적에는 가느다랗게 금은 문양이 그려져 있고 중앙에 고대 문자로 둔천(遁天)이란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검은빛과 하얀빛이 교차하는 부적은 한립과 호삼이 의식으로 살펴보려 해도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광원재의 대라경 수사가 제련한 개자둔천선부(芥子遁天仙符)입니다. 위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요! 대라경 수사라 해도 전력을 다해 감지하고 있지 않는 한 속아 넘어갈 겁니다.”
석천공은 설명하면서 부적을 한 장씩 나눠주었다.
“대라급이 제련한 선부요?”
호삼과 한립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석 수사, 너무 귀한 물건이라 이건 그냥 받을 수 없겠습니다. 무엇으로 교환하면 좋겠습니까?”
한립은 부적을 받아들지 않고 물었다.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려 수사가 아니었으면 진작 회계에서 백골이 되었을 저인데 겨우 부적 1장을 아까워할 리가요! 지금 중요한 것은 어서 공간 금제를 뚫고 세혼구로 가서 세살지를 찾는 것 아닙니까.”
석천공은 미소를 지으며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려 수사, 제가 석 수사와 오래 알고 지내서 잘 아는데 주머니가 두둑하다 못해 터지는 친굽니다! 이런 건 석 수사에게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하니 괘념치 말고 얼른 받아 두세요.”
냉큼 부적을 받은 호삼이 마치 자신이 주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려 수사 같은 분을 진정한 군자라 칭하는 겁니다. 다들 당신처럼 낯짝이 두꺼운 줄 아십니까?”
석천공은 호삼을 흘겨보면서 코웃음을 쳤고, 호삼도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실실 웃으며 화내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받아 두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부적을 받았다.
“아, 유의하실 점은 부적의 효과가 강력한 대신 시간 제약이 있어 반 시진 안에는 조사를 마쳐야 한다는 겁니다.”
말을 마친 석천공이 개자둔천부를 삼켰고 하얀빛과 검은빛이 떠오른 그의 몸이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그걸 본 한립과 호삼도 입을 벌려 개자둔천부를 삼키고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같은 부적을 사용해서 서로를 미미하게 감응할 수 있을 뿐 보이지는 않았다.
“갑시다! 중간의 대전과 양쪽의 각루 모두 공간 금제의 핵심진법이 있을 만한 후보지입니다. 하나씩 살피려면 바쁩니다.”
석천공을 선두로 세 사람이 날아올라 왼쪽 각루로 향했다. 각루 주변의 유노들은 수행이 낮아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각루 안은 그리 넓지 않아 빠르게 살필 수 있었는데 작은 방들이 나뉘어 있고 아무도 없는 것이 유노 병사들의 숙소로 보였다.
세 사람은 곧바로 각루를 나섰다.
“다른 쪽 각루도 비슷할 것 같은데 곧바로 대전으로 갑시다.”
석천공이 전음을 보냈다.
한립과 호삼의 생각도 같아서 세 사람은 검은 대전 입구에 내려섰다.
‘흠…….’
입구를 바라보던 한립은 동공을 수축했다. 어둑한 통로가 마귀의 입처럼 그들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내부에 머무는 구유역 대라경 수사의 위압감이 이런 잡념을 들게 하는 것이었다.
“들어가시죠.”
석천공도 잠깐 멍하니 있다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한립과 호삼이 뒤따랐다.
원기둥 형태의 대청 벽에 사람 검은 수정돌이 박혀 유유히 빛을 발하고 있었고 좌우 편전으로 통하는 길과 위층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석천공의 손짓에 세 사람은 일단 2층으로 가지 않고 양쪽의 편전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편전은 갑옷과 병장기를 쌓아두는 창고여서 그들은 빠르게 다시 모여 2층으로 향하는 통로 앞에 모였다.
“위로 올라가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대라경의 감지 능력과 민감함은 상상을 초월하니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석천공이 전음을 보냈다.
천천히 2층으로 들어선 세 사람은 굵은 돌기둥에 요수나 용 같은 회수들이 조각된 모습을 보았고, 좌우의 편전과 3층으로 통하는 길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간 파동! 저쪽입니다!”
2층에 도착하자마자 석천공이 좌측 편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한립과 호삼의 얼굴에도 희색이 떠올랐다.
휙!
그 순간 하얀 그림자가 3층 쪽 통로에서 빠져나왔다.
털이 복슬복슬한 하얗고 귀여운 짐승은 살쾡이를 닮은 얼굴에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컸다.
갸르릉 거리면서 2층 대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같았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짐승의 등장에 가슴이 철렁했다가 알아서 뒹굴고 노는 모습에 얼굴을 풀었다.
“신경 쓰지 말고 저쪽으로…….”
석천공이 막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 순간 하얀 짐승이 놀이를 멈추고 그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하얀 파문이 짐승의 눈을 빠져나와 그들을 뒤덮으려 했다.
“어서 물러나야 합니다!”
석천공은 표정이 달라져 옆에 있던 호삼을 잡아끌며 뒤로 물러났다. 한립의 동작은 그보다 빨라 하얀 짐승이 고개를 돌릴 때부터 이미 몸을 빼내었다.
다행히 아직 1층으로 내려가는 길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순식간에 통로 속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지만 하얀 파문은 멈추지 않고 그들을 둘러쌌다.
함부로 선령력을 일으킬 수 없는 그들은 하얀 파문을 피해 달아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이를 악문 석천공이 호삼을 붙들지 않은 손을 한립에게 대고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쿠릉!
서늘한 법칙의 힘이 그의 체내에서 뻗어 나와 한립과 호삼 체내의 개자둔천부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개자수미(芥子須彌), 천둔부령(天遁附靈)!”
세 사람 체내의 부적이 맹렬히 떨리더니 찢어지면서 기이한 힘이 요동쳤다.
한립, 호삼 그리고 석천공은 갑자기 통로의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고 하얀 파문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하얀 짐승은 아무것도 잡아내지 못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눈을 깜빡였다.
“운단, 뭐 하고 있느냐?”
3층에서 키 크고 마른 중년인이 내려오며 하얀 짐승을 찾았다.
눈꼬리가 가늘고 긴 창백한 얼굴의 사내는 막 물속에서 건져낸 시체 같았다. 그는 누구나 전율할 만한 농염한 음산한 흉살기를 풍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검은 그림자가 1층 쪽 통로에서 날아들었다.
검은 장포를 걸친 유노의 등장에 마른 중년인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유노는 거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귀신 같아 보였다.
“귀목 대인, 역주 대인의 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마른 중년인을 보고 유노가 바닥에 꿇어앉아 검은 전신부를 두 손으로 바쳤다.
하얀 짐승도 흑포 유노를 힐끗 보고는 하얀 파문을 거두고 귀목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귀목은 하얀 짐승의 털을 쓸어내리며 전신부에 의식을 주입했다.
파삭.
“역주께 알겠다고 전하거라. 연괴보(鍊傀堡) 쪽은 준비가 되었다.”
내용을 확인하고 전신부를 흩어버린 귀목이 탁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이에 흑포 유노는 다시 검은 그림자로 변해 2층을 빠져나갔다.
귀목은 하얀 짐승을 데리고 대청을 거닐다 곧 3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통로의 벽에서 빠져나온 한립 일행은 2층의 편전 중 한 곳에 몸을 숨겼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 하얀 살쾡이는 뭐 하는 짐승이기에 우리의 존재를 알아챈 걸까요.”
가슴을 쓸어내린 호삼이 아직도 떨린다는 듯 말했다.
“회계의 특수한 짐승 중 하나겠지요. 우리가 너무 방심했습니다.”
한립은 단약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휴, 대라경 수사의 신통과 영수를 저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석천공까지 한숨을 쉬었다.
개자둔천부만 있으면 일사천리로 공간 금제 핵심을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공간 금제 핵심에 도달하기도 전에 들킬 뻔했다.
“석 수사, 그런데 개자둔천부가 찢어진 듯싶습니다.”
어두운 분위기를 깨고 한립이 물었다.
“워낙 다급하다 보니 개자둔천부의 능력을 최대치까지 발휘해 개자부령술(芥子附靈術)을 펼친 탓입니다. 그 때문에 부적의 지속시간이 대폭 줄어 일각 후에는 효력을 잃을 겁니다.”
석천공의 대답에 한립이 난색을 표했다.
“겨우 일각밖에 남지 않았다고요? 그럼 서둘러야지요. 하얀 짐승도 귀목이 데리고 갔겠다 다시 가봅시다.”
호삼이 다급히 말했다. 그러나 개자둔천부가 있어도 움직이기 어려운데 부적이 실효되면 끝이었다.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석천공은 즉시 반대를 했다.
“귀목이 존재하는 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아무래도 따돌려야겠어요.”
한립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따돌리다니 좋은 방책이라도 있으십니까?”
한립의 말에 석천공이 묻고 호삼도 귀를 기울였다.
“오는 길에 보았던 검은 요새들은 사실 구유족이 괴뢰를 제련하는 장소입니다. 그 안에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지요. 그곳에 작은 소란만 일으키면 분명 귀목이 직접 움직일 겁니다.”
“지나면서 틈틈이 요새들까지 조사했었습니까? 뭔가 했더니만 괴뢰를 제련한다니 더 들어가 구경해 보고 싶군요.”
호삼은 대단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좋은 생각이지만 우리가 움직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석천공이 곰곰이 생각하다 문제점을 지적했다.
“마광 수사와 백리염 수사에게 맡기는 것이 낫겠지요. 그들이 더 가까이에 있으니까 소란을 피운 뒤 수사가 준 소나이전륜반으로 우리와 합류하면 되겠습니다.”
한립은 미리 생각해둔 대책을 공유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제가 바로 연락을…….”
석천공이 눈을 반짝였다.
“그럴 것 없이, 제가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연괴보 안의 상황을 일러주어야 허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거예요.”
한립은 석천공의 말을 끊었다.
“그것도 좋겠습니다.”
석천공의 대답에 눈을 감은 한립은 마광에게 의식 연계로 상황을 알렸다.
“괴뢰를 제련하는 곳이라고요? 어쩐지 경계가 삼엄하다 했습니다.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간단합니다. 천마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술법을 사용하면 흔적도 남지 않을 테고요. 다만 그곳의 금제가 고명한 것이 문제군요.”
마광도 의식 연계로 답을 주었다.
“제가 금제를 푸는 비술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한립은 바로 마광에게 비술을 전수해주었다.
“이거면 문제없습니다!”
“귀목이 일단 성문을 떠나면 석천공에게 수사와 백리 수사를 데리고 와 달라고 할 테니 어떤 기운 파동도 들키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전송 시에 허합족인의 본원의 힘을 태워 전송 파동을 없애겠습니다.”
마광은 장담하며 말했다. 한립은 눈을 뜨고 마광과의 대화를 석천공과 호삼에게 되풀이했다.
“만일을 대비해 이곳에서도 준비를 해둬야겠습니다.”
쉬쉬쉬쉭!
석천공은 즉시 양손으로 수결을 맺고 각각 동, 서, 남, 북이라 적힌 팔뚝 절반만 한 검은 부적 네 장을 소매 속에서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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