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화. 염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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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더는 떠들지 않고 동쪽으로 백 리를 더 가서 멈추었다.
“이쯤이면 됩니다. 더 가면 봉화가 나오고 그곳에도 고계 구유족 수사가 상주할 테니까요.”
마광이 성벽을 살피며 말했다. 성벽 위에는 갑옷을 입은 유노들이 서서 삼엄하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성벽의 금제는 주로 벽을 강화하고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들키지 않고 넘어가려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석천공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게 맡겨 주세요.”
호삼의 손에 동그란 수정 구슬이 나타났다.
그가 주문을 외자 구슬 표면에 일곱 빛깔 광채가 맺혀 한립 등 다섯 사람을 품었다. 수정빛이 번득인 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기운도 사라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환술의 일종인지요?”
한립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비슷합니다. 그래서 감지 능력을 지닌 금제에 부딪치면 즉시 들키고 말지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 가시죠.”
고개를 끄덕인 호삼이 재촉했다.
수정빛에 휩싸인 이들이 대놓고 검은 장벽 아래로 향하는데도 유노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
“여기쯤이면 되겠습니까?”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호삼의 물음에 석천공이 급히 진법 원반과 급살묵석 등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이걸로 정말 진법을 펼칠 생각이셨습니까? 요단을 거래하면서 덤으로 받은 물건인 줄 알았는데요?”
한립이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같은 공간 진법이라도 펼치는 환경에 맞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낫습니다. 마광 수사도 있으니 발동법만 알려드리면 될 테고요.”
미소를 지은 석천공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한립이 옆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복잡한 진법은 전송진법과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달라 정확히 어떤 원리로 발동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석 형, 언제 끝낼 겁니까? 영환정(影幻晶)으로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호삼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다들 진법 중앙에 서세요.”
마지막 진법 원반을 박아 넣은 석천공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진법 중앙에 동그랗게 모여 섰다.
“발동법이 어렵지 않군요. 다들 최대한 기운을 숨기고 계시면 성벽의 금제를 속여 보겠습니다.”
석천공의 설명을 듣고 마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손끝에서 흉살기들이 꿀렁꿀렁 빠져나와 다섯 사람을 감싸고 주문에 맞춰 공간 파동이 진법에서 흘러나왔다.
“갑시다.”
호삼의 영환정이 깨지자 진법이 그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 순간, 성벽 위에서 유노 한 명이 눈꺼풀을 꿈틀하고 성벽 아래를 보았다가 바람이 불어와 회갈색 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반대편 청회색 벽돌이 깔린 길에 다섯 사람이 나타나 흔적도 없이 성의 안쪽으로 질주했다.
삼역회맹이 개최 중이라 백장구 안은 조용했고 건물들 사이로 솟은 높은 탑에는 유노들만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거리에도 유노들이 순찰하고 있었으나 수행이 가장 높은 이가 진선급이었다.
“백장구 안의 경계도 대단하군요. 조심해야겠습니다.”
석천공이 주위를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유심히 살펴보니 백장구 내의 상황이 지도와는 다릅니다. 순찰탑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고요.”
마광이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오래 전 지도라고 하니 후에 여러모로 바뀐 것이 많겠지요. 백장구의 주요 통로에 대해서만 정확히 그려져 있으면 됩니다.”
한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길은 지도에 표시된 것과 비슷합니다. 나생구 쪽으로 난 길은 세 개가 있는데 두 곳은 주성문 쪽이고 나머지 하나만 서북 방향의 각루(角樓)로 나 있습니다.”
마광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 답했다.
“각루 쪽으로 가봅시다. 정문에는 이전처럼 대라경 수사가 지키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한립의 말에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순찰을 도는 유노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장구 안쪽으로 갈수록 순찰탑과 유노들의 수가 많아져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동해야 했다.
반 시진이 훌쩍 지나 겨우 백장구 중심구역에 이른 그들은 어느 높은 건물 뒤에 숨어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주위를 살피던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이곳에 도착한 뒤로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했고 지면과 벽에 정말로 서리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이미 민가가 보이지 않았고 길 양쪽으로 높게 건축된 요새 형태의 건축물들이 죽 연결되어 대형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그 안쪽으로 수비병이 퍽 많고 수시로 둔광이 드나들었다.
“다른 곳보다 삼엄하게 지키는 이유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 놓은 것인지…….”
호삼도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전음을 보냈다.
“무엇이 있든 세살지를 찾는 것이 급선무니까 허튼 생각 마세요. 쓸데없는 짓을 벌일 생각은 버리란 말입니다, 호삼.”
석천공이 곧장 얼굴을 굳히고 경고했다.
“하하, 알겠습니다. 괜한 걱정을 하고 그러십니다.”
호삼은 웃어넘겼으나 석천공은 여전히 안심이 안 되는지 그를 주시했다.
한립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슬쩍 의식 한 줄기를 검은 요새 무리 안쪽으로 흘려보냈다.
막 요새 장벽에 닿으려는 순간 무형의 힘이 사정없이 의식을 튕겨냈다.
“녀석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으냐?”
석경후의 목소리가 한립의 마음속에 울렸다.
“당신은 아시는 것 같군요?”
“요새 아래쪽에 구유대장현금(九幽大藏玄禁)이 펼쳐져 있다. 구유족 대대로 전수되는 비밀금제인데 방법만 알면 파훼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 방법을 일러줄 테니 직접 보거라.”
석경후는 한립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현묘한 금제 파훼법을 전달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제가 안쪽 상황을 조사하기를 바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립은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번에도 석경후는 답이 없었다.
머뭇거리던 한립은 결심이 섰는지 의식 한 줄기를 다시 방출했다.
무형의 힘이 의식을 막았지만 이번에는 방법을 알았기에 금제의 힘에 의식을 녹여 내부의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저들은…….’
그가 보고 있는 요새 안에는 거대한 연못이 있고 그 안에는 회백색 액체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물이 넘치며 네 개의 검은 철창을 적셨는데 그 안에는 회계 짐승 두 마리와 소뿔이 달린 종족을 알 수 없는 이들이 갇혀 있었다.
참혹한 비명을 지르면서 회수들이 난동을 부려도 철창은 부서지지 않았다.
다른 두 철창에 갇힌 소뿔 달린 이종족들은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쓰러져서 가끔 경련을 일으킬 뿐이었다.
두 이종족은 연못물에 너무 오랫동안 침식을 당했는지 피부가 회백색으로 물들고 시선이 멍해서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 외에 두 명의 유노들이 연못 바깥에 서서 철창 안을 살펴보았다.
깜짝 놀란 한립은 다음 요새로 넘어갔다.
그곳에는 연못 대신 거대한 화로에서 지글지글 회색 불길이 끓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뼈가 시린 한기를 내뿜는 불길 속에 회백색으로 변한 회계의 이종족과 회수들이 매달려 있었다.
화로 안에서 튀어나온 잿빛이 이종족과 회수의 몸속으로 녹아들 때마다 그들의 몸이 부풀고 피부에 이상한 문양이 나타났다.
한립은 빠르게 열댓 개의 검은 요새를 훑어 불에 굽고 물에 담가 놓고 극독을 풀어 놓는 등 독특한 단련법으로 회수와 이종족들을 변이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런 단련을 통해 사람의 형상 혹은 짐승의 형상을 한 괴물들이 탄생했는데 멍한 눈길이 괴뢰처럼 보였다.
놀랍게도 연달아 이어진 요새들은 구유족이 비밀리에 괴뢰를 제련하는 장소였다.
회계 생물은 물론 다른 종족까지 재료로 삼았기에 들키지 않으려면 이렇게 엄중하게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수는 적어도 강력한 실력을 지닌 구유족과 유노 거기다 이렇게 생산된 대량의 괴뢰 덕분에 구유역에서 위세를 떨칠 수 있었으리라.
확인을 마친 한립은 처음 연못이 있던 요새로 의식을 거둔 뒤 다른 방향으로 퍼트렸다.
그쪽에는 높낮이가 다른 감옥들이 벌집처럼 쌓여 있었다.
다양한 회계 요수들과 회계의 각 종족이 발가벗겨진 채 고의로 낮게 설계된 감옥 안에서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괴뢰를 제련하기 위한 이런 ‘원재료’만 수천은 되었고 진선경, 심지어 금선경의 존재들도 눈에 띄었다.
여기까지 보는 데도 시간이 꽤 지나 한립은 의식을 회수했다.
석천공, 호삼 등은 한립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른 채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도를 따라 조용히 이동하니 금방 백장구 서북쪽 구석에 이를 수 있었다.
지도에 그려져 있는 대로 검은 금제로 둘러싸인 거대한 각루가 성벽에 설치되어 있고 주변에 상당수의 유노들이 서 있었다.
“석 수사, 고생스러우시겠지만 이번에도 공간 전송술을 써서 우리를 이동시켜 주셔야겠습니다.”
한쪽에 몸을 숨긴 한립이 석천공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호 형, 그러려면 일단 성벽 가까이 데려다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석천공은 호삼을 바라보았다.
“맡겨만 주세요!”
호삼이 또 다른 수정 구슬을 꺼내 주문을 외고 일곱 빛깔 광채가 흘러나와 다섯 사람을 가려주었다.
모습과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진 그들은 빠르게 성벽 아래로 다가갔다.
석천공은 진법 원반 등을 꺼내 전송진을 완성하고 은빛이 반짝인 뒤 마광이 나서서 흉살기로 진법을 발동시켰다.
스슷.
다섯 사람의 모습이 흐릿해졌다가 어쩐 일인지 다시 또렷해졌다.
안색이 변한 일행이 다들 석천공만 쳐다보는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석천공은 성벽 쪽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석 형, 왜 그럽니까?”
“몸을 숨기고 이야기하지요.”
급히 수정 구슬을 이용해 모두의 기운을 감춘 호삼의 물음에도 석천공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진법 물품을 거두며 물러났다.
시선을 마주친 다른 사람들도 이전에 몸을 숨기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어째서 전송이 실패한 것입니까?”
백리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성벽의 금제 속에 공간 금제라도 섞여 있던가요?”
한립은 번뜩 생각난 것을 입으로 내뱉었다.
“려 수사께서 공간전송술까지 파악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수사의 말이 맞습니다. 성벽의 금제 속에 공간 금제가 섞여 있어 제 전송술이 통하지 않더군요.”
석천공은 의외라는 듯 한립을 보고 답했다. 다들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백리염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라도 성벽 안의 공간 금제를 멈출 수 있다면 해볼 만합니다.”
침음하던 석천공이 방법을 생각해냈다.
“공간 금제를 멈춘다고요. 말이 쉽지 우린 공간 금제의 진법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백리염이 미간을 좁혔다.
“석 수사께서 짐작 가는 바가 있으니 그런 말을 하셨을 겁니다.”
한립은 석천공을 보며 말했고 그 말에 백리염과 호삼 등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성벽의 금제가 강력한 만큼 진법 핵심도 인근에 있을 겁니다. 각루에 없다면 성문 쪽에 있지 않겠습니까?”
석천공이 성문을 눈짓했다.
“그렇다면 둘로 나눠 움직입시다. 저와 석 형 그리고 려 수사가 한 곳을 살피고, 마 수사와 백리 수사가 나머지 한 곳을 살펴 공간 금제 핵심이 있는지 알아보는 거지요.”
호삼이 입을 열었다. 은신술에 가장 능한 자신과 마광을 중심으로 두 무리를 나눈 것이다.
“저와 백리 수사가 각루를 뒤지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성문으로 가려면 그곳에 머무는 대라경 존재를 조심해야 할 겁니다.”
마광은 한립 무리를 보며 당부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루 쪽도 너무 안심해서는 안 될 겁니다. 이 소나이전륜반(小挪移轉輪盤)을 챙겨 두세요. 단거리 내에서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공간 금제를 찾으면 이걸 이용해 우리와 합류하는 것으로 하시지요.”
석천공이 자신 있는 태도로 팔뚝 크기의 팔각형 옥판을 내주었다.
“광원재 분답게 좋은 물건을 많이도 지니고 계십니다. 사양하지 않고 받아 두겠습니다.”
마광도 웃으며 옥판을 넣어 두었다.
“공간 금제를 찾아 진법 핵심을 파괴하면 성벽은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누군가 낌새를 차릴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숨어든 것을 알고 구유역의 대라경 존재가 따라붙을 수 있겠지요.”
한립이 입을 열자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어두워졌다.
“공간 금제 핵심만 찾으면 그건 제가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또다시 석천공이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 한립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힐끗 보다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석 수사만 믿겠습니다.”
호삼과 마광 등은 시선을 마주쳤고, 그들은 세부적인 사항을 의논하고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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