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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60화 (1,617/2,000)
  • 1860화. 잠행

    *

    “선계로 돌아가면 쓰지도 못할 물건인데, 겨우 회정 몇 개를 위해 그리 마음을 쓰십니까?”

    전도가를 빠져나온 한립이 석천공에게 말했다.

    “그건 수사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제가 마음을 쓴 것은 회정 몇 개가 아니라 거래 그 자체입니다.”

    석천공의 말이 끝나자 마광의 전음이 들려왔다.

    “지도를 보니 세혼구의 위치가 무척 특수했습니다. 달명구를 지나 백장구(百藏區)와 나생구(羅生區)까지 거쳐야 세혼구에 도착할 수 있어요. 각 구역 사이에는 높은 담과 금제가 펼쳐져 있고 어떤 금제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밖에 지도에서 세혼구 안은 아예 비어 있더군요.”

    “그렇게 은밀하게 보호되다니, 세혼구에 세살지가 있나 봅니다. 일단 백장구 쪽으로 가면서 살펴보시지요.”

    한립이 두 사람에게 전음을 보냈고, 고개를 끄덕인 마광이 전도가를 떠나 어딘가로 길을 안내했다.

    댕댕댕!

    이때, 커다란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와 수라성 전역에 선명하게 울리고 네 곳에서 하얀 빛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네 개의 빛기둥은 전부 타호구에서 시작되어 하늘로 이어지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걸음을 멈췄고 한립 일행도 타호구 쪽을 바라보았다.

    “삼역회맹이 시작되었군요.”

    석천공이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수라성의 이목이 그곳에 집중되었으니 우리에게는 잘된 일입니다.”

    한립의 말에 그들은 다시 시선을 돌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 * *

    그 시각, 하얀 빛기둥의 시작점인 타호구 중심의 어느 광장.

    백여 리에 달하는 넓은 공간에 하얀 벽돌들이 빼곡하게 박혀 자욱하게 안개를 뿜어냈다.

    수많은 이들이 광장 바깥에 서 있었는데 대부분이 수라성에 거주하는 이들이었고 회맹을 찾아온 종족들도 섞여 있었다.

    회색 갑옷을 걸친 천여 명의 병사들이 광장 주변에 둘러서서 구경꾼들을 막아섰다.

    광장의 하얀 돌기둥에서 빛기둥이 뻗어 나가 주술문자를 반짝이며 간담을 서늘하게 할만한 웅장한 기운을 뿜어냈다.

    콰릉.

    허공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흉살기가 요동치며 회색 광채를 번득였다. 그 회색 광채 속에서 하얀 제단이 떠올라 지면으로 내려왔다.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제단 위의 고리 형태의 둥근 탁자 하나와 백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어 그곳에서 회맹이 이루어질 거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광장에서 역주들끼리의 논의가 진행될 거라 들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진행이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검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제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청동 갑옷을 걸친 영준한 용모의 사내는 회색 눈동자에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바로 구유역 역주 음승전이었다.

    그는 서 있는 것만으로 주변 허공을 자글자글하게 왜곡시키고 있었다. 마치 천지의 중심에 그가 서 있는 느낌이었다.

    “역주 대인을 뵙습니다!”

    수라성 백성들이 환호를 보내며 바닥에 엎드렸고,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예를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두 삼역회맹에 참가한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회맹을 수라성에서 개최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 회맹이 추구하는 바는 첫째도 둘째도 ‘공정’입니다.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모두 스스로 증인이라 생각하시고 잘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음승전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서 울리는 듯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음 역주의 공명정대함에 찬사를 보냅니다.”

    맑은 목소리가 들리며 제단 위에 흑포 인영 셋이 나타났다.

    가장 앞선 중년 사내는 각진 얼굴에 진한 눈썹과 새까만 피부를 지니고 아래턱에는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천지와 완벽하게 융합된 듯 보이는 그는 음승전과 대등한 지위를 지닌 듯했다.

    나머지는 꼿꼿한 자세에 장대한 기골을 지닌 청년과 희끗희끗한 수염과 머리카락을 지니고 새까만 나무 지팡이를 지닌 노인이었는데 모두 피부색이 새까맸다.

    “흑승역 사자다! 흑승역은 기후와 환경 때문에 피부색이 새까맣다더니 정말이었어.”

    “저기 수염을 기른 중년인은 흑승역 부역주 소불야, 소 도조가 아닙니까!”

    “나머지 두 명은 흑승역의 13 성사(聖使) 중 명왕성사와 천살성사입니다. 이미 대라경에 이른 절세의 강자라더군요.”

    구경꾼들이 신이 나서 서로 아는 바를 떠들어댔다.

    “과찬이십니다, 소 부역주. 모두가 수라성을 믿고 이곳에서 삼역회맹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는데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있나요.”

    음승전은 냉담한 얼굴로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앞으로도 그 말씀을 잊지 마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제단 위에 또 다른 세 명이 나타났다. 방금 말을 한 백발 청년은 잘생긴 얼굴과 달리 눈빛이 무척 쓸쓸했다.

    그 뒤로 평범한 얼굴에 검은 갑옷을 걸친 중년 거한과 하얀 치마를 입고 미색이 고운 눈꼬리가 길게 빠진 여인이 서 있었다.

    한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한눈에 그녀가 교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윤회역 인물들입니다. 백발 사내가 그 유명한 황보옥이고요!”

    “예전에 금남역(錦南域) 역주였던 황보옥 말입니까?”

    “소문에 황보옥은 윤회역 심우궁주의 연인이었다는데, 심우궁주가 진선계 천정과의 전쟁에서 죽고는 그 슬픔에 애끓다가 갑자기 수행이 급증해서 도조경에 이르렀답니다. 그 후로는 갑자기 윤회역에 가담했고요.”

    “그 뒤에 중년 사내는 무양궁주 같습니다만 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은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수행도 태을경 밖에 되지 않고요.”

    백발 청년 황보옥과 교삼 등이 나타나자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특히 여인들은 잘생긴 황보옥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음 놓으시지요, 황보궁주.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킬 것입니다.”

    음승전이 고개를 돌려 황보옥 무리를 보고 천천히 답했다.

    그때 멀리서 다양한 복색을 한 종족들이 도착했다.

    “소호역 역주 묵찬!”

    “천도역(天圖域) 역주 해인숭!”

    “백전역(百戰域) 역주 월양!”

    * * *

    회계의 3대 영역인 구유역, 흑승역, 윤회역에 속하는 중소 구역의 역주들이 차례로 도착했다.

    물론 대외적으로 알려진 소속은 상관이 없이,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이번 삼역회맹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제단에 오른 이들 중 가장 수행이 늦은 이들은 금선들이었다. 흑치역 역주도 묘고와 살집 있는 노인을 데리고 그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모두 도착하셨으면 자리하시지요. 이제 삼역회맹을 정식으로 시작합니다!”

    음승전이 소리를 높였다.

    댕!

    마지막 종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가고 네 줄기의 빛기둥이 줄어들다 사라졌다.

    * * *

    달명구의 전도가에서 멀어질수록 길거리에는 건물이 적어지고 돌아다니는 유노들도 얼마 되지 않았다.

    시장을 벗어난 한립 일행은 기운과 신형을 동시에 감춘 채 조용히 백장구 쪽으로 향했다. 행인이 줄어들수록 순찰을 도는 유노 병사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평범한 유노와 달리 복부와 어깨 그리고 허벅지 등만을 가리는 검은 갑옷을 걸치고 다녔고 몸에 지닌 흉살기가 짙었다.

    그래도 우두머리급만 대승기였고 나머지는 합체, 연허기 존재라 피하기 어렵지 않아 한립 일행은 금방 달명구와 백장구 접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여기구나.’

    두 구역 사이에는 수라성 외곽처럼 고대 문자가 음각된 거대한 검은 성벽이 세워져 있었다.

    성문은 흐릿하게 잿빛 안개로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았는데 3층 높이의 검은 전각이 보였다.

    또 그 양옆으로 백 장마다 성루가 세워져 있는 데다 그 중간에는 열 걸음 간격으로 병장기를 든 유노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묵직한 성문 양옆으로 거목 크기의 청동 거인이 있었다.

    인족과 비슷하게 생긴 거인들은 대머리에 눈만 크고 입에서 송곳니가 튀어나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한립은 성문에서 수백 장 떨어진 회색 암석 아래에 있었고, 마광과 석천공도 멀지 않은 곳의 바위 아래에 숨어 있었다.

    석천공의 공간 비술 덕분에 들키지 않고 성문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추혼술로 알아낸 바가 많지 않습니다. 성벽은 특수한 금제가 걸려있고 성문을 지키는 이들은 구유역에서 가장 전력이 강하다는 동척족(銅脊族) 족인이라 합니다. 수행도 진선 이상이고요.”

    석천공이 바닥에 쓰러진 유노의 시체를 힐끗 보고 한립과 마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건 상관없지만 문제는 성루 안에 대라경 이상의 구유족인이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삼역회맹이 열리는 타호구로 불려가지 않았다니 일이 쉽지 않겠어요.”

    미간을 좁힌 한립이 말했다.

    “공간법칙의 힘을 이용해 성벽의 금제를 지나는 것은 가능합니다. 관건은 그 구유족인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거지요.”

    한립의 말에 석천공도 미간을 좁혔다.

    “공간법칙을 이용해 흉살기 파동만 잘 가려주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가볍게 부채질을 하던 마광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라급 구유족 수사를 속일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겝니까?”

    한립이 의아해하며 묻자 마광은 씨익 웃음 지었다.

    “대라급 수사는 우리보다 월등히 수행이 높은 존재입니다. 일단 들키면 달아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니 신중해 주세요.”

    석천공도 근심을 표했다.

    “한 수사, 이 육신이 얼마나 강한지는 수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겁니다. 저도 확신이 있으니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니겠습니까?”

    마광은 한립에게 따로 전음을 보냈다.

    잠시 망설이던 한립은 허락을 했고, 석천공은 인상을 찡그리고 뭐라고 하려다 결국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방법이 있다고 해도 여기서 대놓고 펼칠 수는 없습니다. 가시죠, 전각과 성루를 피해 허술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부채를 거둔 마광의 말에 한립과 석천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 없이 성문 동쪽으로 이동했다.

    “잠깐, 누군가 우릴 발견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립의 전음이 들려와 석천공이 화들짝 놀라고, 마광은 침음했다.

    “석 형, 려 수사, 긴장을 푸세요. 우립니다.”

    다행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시선을 마주친 한립과 석천공은 상대의 눈에서 놀란 기색을 잃었다.

    파팟.

    허공이 흐릿하게 변하고 새하얀 빛 속에서 검은 장포를 걸친 호삼과 삼묘족에서 보았던 백리염이 나타났다.

    “호삼, 당신이 어떻게……. 이분은?”

    석천공이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물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쪽은 윤회전에 속한 백리염 수사십니다.”

    호삼이 웃으며 소개를 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마광을 훑으며 의아한 눈빛을 했으나 백리염은 삼묘족에서 마광을 보았고 한립에게 이미 설명을 들어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한립은 간략하게 마광을 소개한 다음 신중히 물었다.

    “두 분은 어쩌다 함께 움직이게 된 것입니까?”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진언문 유족이 붕괴하면서 공간 소용돌이에 휩쓸려 이곳에 왔다가 살골대요의 손에 죽을 뻔했지 뭡니까? 그나마 지닌 단약과 선원석이 많아 방구역(方丘域) 안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도망치다 백리 수사를 만나게 된 겁니다.”

    호삼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민망한 기색을 보였다.

    한립은 평소 호탕한 호삼이 이런 표정을 짓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백리염에게 시선을 던졌다.

    “삼묘족을 떠나 동호역(東胡域)과 방구역을 들렸다가 계사족(戒鯊族)에서 호삼을 마주쳤습니다. 계사족의 보물을 훔치려다 잡혀서 옥에 갇혀 처형될 처지더군요. 계사족이 윤회역에 가담하기로 결단을 내려주어 호삼을 예물 삼아 넘겨주어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함께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백리염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간의 사정을 일러 주었다.

    “…….”

    한립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호삼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약간의 구박과 한심함이 담겨 있었다.

    “하하, 호삼! 도둑질에 실패할 때가 다 있었습니까?”

    석천공이 그를 놀리듯 물었다.

    “그게……. 이곳 물정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하하하, 어차피 지나간 일을 떠들어 봐야 무엇 하겠습니까?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관해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는 걸요.”

    호삼이 웃음을 터트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찾아낸 것입니까?”

    “삼묘족을 따라 이곳에 와 있을 텐데 삼묘족에서 수사를 찾을 수 없더군요. 분명 세살지로 가려고 여기서 서성대고 있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백리염이 웃는 낯으로 답했다.

    “그랬군요.”

    “잘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와 같이 세살지로 가시지요. 인원이 많으면 그만큼 전력도 느는 셈이니까요.”

    호삼이 의지를 다지듯 손바닥을 비볐다.

    “좋습니다.”

    백리염과 시선을 마주친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중에 마광의 수행이 가장 높았으나 실질적으로 마광과 석천공이 한립을 따랐기에 그가 동의하면 전부 동의한 것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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