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59화 (1,616/2,000)
  • 1859화. 전도가

    *

    흉살기가 짙게 깔린 천장 산봉우리 위에 위풍당당한 거대 행궁(行宮)이 세워져 있었다.

    행궁 앞으로 흑석을 깐 광장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아래로 바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위치해 독특한 풍경을 이루었다.

    광장과 절벽 건너편을 잇는 다리에 검은 인영과 하얀 인영이 서서 멀리 타호구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중 검은 용 문양 장포를 걸친 사람은 산발한 머리에 맨발을 하고 고풍스러운 청동 갑옷을 걸치고 있었고, 뚜렷한 생김새를 지닌 사내는 창백한 얼굴로 회색 눈동자가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 옆의 하얀 인영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새하얀 노인으로 빛이 물결치는 새하얀 장포를 입고 있어 움직일 때마다 하얀 물보라가 치는 것 같았다.

    물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노인은 물 속성 법칙 파동을 내뿜어 흉살기를 밀어내는 중이었다.

    “음 수사, 자신은 있으십니까?”

    백포 노인이 시선을 거두었다.

    “성공할 가능성은 3할 미만입니다.”

    “……흑승역에서 얼마나 많은 부족이 윤회역으로 넘어간 겁니까?”

    “그 갈대 같은 자들이야 천 년간 윤회역과 빈번히 교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합작은 이번 담판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니 상관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담판에서 승기를 잡은 다음에 서서히 윤회역의 세력을 제압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최선일 겁니다.”

    흑포 사내의 말에 백포 노인이 말했다.

    “흥, 천정에서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회계에서 내분을 일으켜 윤회역의 힘을 약화시키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풍청수, 충고 한마디 하자면 천정도 어부지리나 얻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흑포 사내가 힐끗 백포 노인을 보고 냉소를 흘렸다. 이에 백포 노인의 눈가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도조가 된 이후 누군가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일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음승전, 천정도 당연히 도울 겁니다. 당신은 구유족 구역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게 관리를 잘하세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유쾌한 합작이 되기를 기원하지요.”

    “같은 마음입니다만, 천정에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큰코다치기 전에 접는 것이 좋을 거라고 미리 말해두고 싶군요.”

    음승전이 끝까지 할말을 다하자 풍청수도 코웃음을 치고 입을 다물었다.

    * * *

    달명구는 수라성의 상가들이 모여 있고 구유역 각 종족이 밀집해 있는 곳이라 한립 무리도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달명구 안에서 유명한 상점들이 몰려있는 시장을 회계의 수사들은 전도가라고 불렀고 한립도 여러 골목을 지나쳐 드넓은 광장에 도착했다.

    “손님들, 오살비연호(烏煞鼻烟壺) 한 번 보고 가시지요? 그게 싫으시면……. 급살묵석(汲煞墨石)도 좋은 게 들어왔는데요. 진법을 펼치는데 이만한 게 없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때 왜소한 체구의 검푸른 피부를 지닌 녹색 머리 회계 이종족이 다가와 열심히 물건을 권했다.

    그러나 한립은 상대하지 않았고 마광은 저 멀리 커다란 새까만 고목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다.

    오직 석천공만이 흥미롭다는 듯 검은 나무 상자 안의 물건들을 들춰보았다.

    “이보게, 자네 보는 눈도 없구만. 자타족(刺陀族)이나 주워갈 만한 물건을 어디서 추천하는 것인가? 우리가 이런 거나 살 사람들로 보이는가?”

    석천공은 검은색 병을 나무 상자 안에 던져 넣고는 점원을 흘겨보았다.

    “헤헤, 대인 말씀이 무조건 맞습니다! 이게 엄청난 보물은 아니지요. 하지만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이니 가격이 저렴할 때 사들이면 지니고 다닐 만하지 않겠습니까?”

    녹색 머리 이족인이 겸연쩍게 웃으면서 싸게 해주겠다는 뜻을 표했다.

    “뭐, 그렇긴 하지. 그래서 이 급살묵석은 얼마에 팔고 있나?”

    석천공은 대충 물어보면서도 상점을 지나갈 것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아 녹색 머리 이종족이 그를 따라붙어야 했다.

    “진법을 펼치는 데 쓰실 거면 적어도 7개는 사셔야 하는데, 가격도 아주 저렴해서 회정 3개만 주시면 됩니다. 혹시 세 벌 그러니까 21개를 사시면 할인해드려서 회정 8개만 받지요.”

    “8개라, 적절한 가격이군. 내가 49개가 필요하다면 더 깎아 줄 수도 있겠나?”

    석천공의 질문에 녹색 머리 이족인이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작은 상점이라 그렇게 물건이 많지는 않아서요. 딱 35개뿐인데, 다 드리고 특별히 회정 12개에 해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에이, 그럼 되었네. 다른 곳을 가봐야겠어.”

    석천공이 손을 내저었다.

    “대인, 그러지 마시고요. 여기 다른 물건들도 좋은 게 많습니다. 함께 사시면 제가 절반 값으로도 드릴 수 있습니다.”

    막 큰돈을 만질 기회에 손님이 그냥 가려 하자 녹색 머리 이족인이 그에게 매달렸다.

    “흠……. 글쎄, 눈에 차는 게 없는데. 혹시 수라성 지도나 있으면 하나 줘보든지.”

    상자 안을 뒤적거리던 석천공이 혀를 찼다.

    “아이고! 큰일 날 소리 하십니다. 구유족이 얼마나 외지인에게 박한데요. 함부로 수라성 지도를 팔 수도 없을뿐더러, 제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 그런 소리를 하셨으면 벌써 고발을 당해서 큰일을 당하셨을 겁니다.”

    녹색 머리 이족인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고 석천공의 소매를 잡고 속삭였다. 한립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미간을 좁혔다.

    “그게 정말인가? 알려 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대인…….”

    “이렇게 하지. 급살묵석 35개를 제값에 사주겠네. 이렇게 친절한 상점은 잘되어야지. 저기 검은 호두 같은 것들도 싸주게.”

    석천공은 웃으며 말했다. 녹색 머리 이족인은 그가 가리킨 것을 보고 좋아했다.

    “다 자라지도 못한 취살석(聚煞石)들이라 얼마 하지도 않는걸요. 마음에 드신다니 덤으로 그냥 드리겠습니다. ……저기, 물건도 많이 팔아주셨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지도를 원하시면 구유역 대종족들이 하는 큰 상점은 절대 가지 마시고 이곳처럼 작은 상점에서도 찾지 마십시오. 헤헤, 전자는 절대 팔지 않을 것이고 후자는 진품을 지니고 있지도 못할 테니까요.”

    “하하, 고맙네.”

    석천공은 호쾌하게 웃고 회정을 건네준 다음 급살묵석과 타다 남은 호두처럼 생긴 돌들을 받아왔다.

    상인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돌아온 그를 향해 한립이 전음으로 말을 걸었다.

    “또 무엇을 거저 얻어 오셨습니까?”

    “살골대요(煞骨大妖)의 내단을 취살석인 줄 알고 팔고 있지 않습니까.”

    석천공이 피식 웃으며 흐뭇하게 답했다.

    “살골대요요?”

    “선계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이곳 명칭은 아닌데, 어찌 되었든 우리 마계에서 아주 값비싼 물건입니다. 특수한 화염에 구워졌는지 정순한 흉살기가 가두어져 있어 다른 이들은 모르고 지나친 것이겠지요.”

    석천공은 자부심이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저리로 가봅시다…….”

    그때 마광이 탄성을 내뱉으며 그들을 이끌었다.

    광장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검은 나무에는 무슨 과실처럼 각종 방이 매달려 있었다.

    나무가지에 걸린 방들은 모양이 아주 불규칙적이었고 나무 기둥의 거대한 문에 ‘전도가’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마광을 따라 동굴처럼 생긴 문으로 들어간 그들은 좌우에 통로가 뚫려 있어 각각의 상점 건물로 연결이 되어 있고 위로 향하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는 것을 보았다.

    ‘대단한 규모군.’

    나무가 거대한 만큼 나선형의 계단과 규모도 대단해서 지나다니는 이들이 엄청났다.

    * * *

    왼쪽의 나선형 계단을 따라 1층 출구로 나온 한립 일행은 검은 대전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기 전 구유족 유노들이 점원 노릇을 하고 있어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연달아 열댓 개의 가지에 들렸고 구유족이 운영하지 않는 상점을 찾다 결국에는 꼭대기 층까지 이르렀다.

    나무 꼭대기의 가지는 아래쪽보다 얇아서 그곳에 매달린 상점들도 규모가 클 수 없었다.

    방울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상점들을 보던 한립 일행은 상량재(商量齋)라는 상점으로 들어갔다.

    진회색 피부를 지닌 주인장이 손에 오살비연호를 들고 졸고 있다가 퍼뜩 깨어났다.

    “귀빈들이 오셨습니다! 어떤 물건을 보러 오셨는지요? 저희가 규모는 작아도 없는 것이 없고, 또 가격도 아주 좋습니다. 거기다 무엇이든 상량의 여지가 있다고 해서 상량재입니다!”

    “오상족(烏桑族)이 어쩌다 수라성에서 장사를 하고 있나?”

    석천공이 능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허허,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저는 오상족 사람이 맞습니다. 어쩌다 보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일하고 있습죠.”

    장궤는 의외라는 듯 답했다.

    “그랬구만.”

    “자, 그러면 무엇이 필요해서 오셨습니까?”

    “수라성 지도가 필요한데 여기서 구할 수 있겠는가?”

    석천공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건 매매가 금지된 품목입니다. 외부인은 팔 수도 살 수도 없지요.”

    장궤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바깥을 곁눈질했다. 한립은 상대의 반응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주인장과 우리만 입을 다물면 누가 안다고 그러는가? 어떤 물건이든 가격만 맞으면 거래하지 못할 것도 없지.”

    석천공은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장궤는 고민이 되는지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으나 석천공은 재촉하지 않고 가판에 놓인 물건들을 살폈다.

    이런 일은 석천공이 전문이라 한립은 끼어들지 않았고 마광도 흥미 없다는 듯 문가에 서서 아래쪽을 살폈다.

    “물건이 있기는 한데, 이런 거래를 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셔야 합니다. 가격은 당연히 위험 부담이 큰 만큼 비싸지겠고요.”

    장궤는 그들이 다급해 보이지 않자 일부러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말해 보게.”

    석천공의 미소가 짙어졌다.

    “회정 50개는 주셔야 합니다.”

    “흠, 이런 물건은 귀하긴 해도 팔기가 어렵지. 우리 같이 그걸 찾는 사람을 몇 년이 지나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텐데?”

    석천공은 가격 이야기는 하지 않고 턱짓을 했다.

    “하하, 거래에 흥정은 기본이지요. 저도 충분히 흥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회정 10개.”

    “너무 깎으시네요. 저희 지도는 시장에 깔린 가짜와 달리 오래되기는 했어도 진짜입니다.”

    석천공이 가격을 부르자 장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는가?”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끼어들었다.

    “모르시겠지만 수라성의 9개의 구역이 통제된 지는 2, 3천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세혼구(洗魂區) 외의 구역들은 별다른 금제도 없었고요. 제가 지닌 지도는 지도에 대한 관리가 엄격해지기 전에 발행된 관방지도입니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가짜들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장궤는 손에 든 비연호에서 연기를 빨아들이고 코를 비볐다.

    “세혼구를 제외하고라……. 세혼구가 특별히 취급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인가?”

    “구유족의 성지라서 구유족인이라도 용무가 없으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회정 15개 정도의 가치는 하는 지도로군.”

    석천공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가격을 살짝 올렸다.

    “최소 회정 40개를 주시지 않으면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장궤는 결연하게 말했으나 석천공은 결국 상대를 구슬려 회정 38개에 지도를 받아냈다.

    장궤가 아깝다는 듯 검은 석판을 꺼내 건네는데 석천공은 뒷집을 쥐고 가격을 치르려 하지 않았다.

    상대의 의문이 깊어지기 전에 그는 한립을 쳐다보았다.

    “뭐 합니까? 값을 치르지 않고.”

    석천공의 말에 한립은 코끝을 긁적이며 검은 석판을 받고 회정을 장궤에게 주었다. 마광이 석판을 연화해 지도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세 사람은 점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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