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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58화 (1,615/2,000)

1858화. 각자의 생각

*

한립과 석천공은 시선을 마주쳤다.

마광이 거들먹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가고 한립이 유노 앞에 섰다.

탐유경이 눈을 비추자 한립은 태연한 얼굴로 언제라도 시간영역을 펼칠 수 있게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는 유노의 말에 한립은 내심 뜨끔했다.

‘제길.’

막 시간영역을 발동해 위기를 모면하려는데 유노의 말이 이어졌다.

“색이 약간 옅습니다? 혼혈이신가요?”

한립도 여러 종족의 피가 섞인 혼혈들은 흉살기 이상으로 눈동자의 색깔이 옅거나 불순하다는 것을 어느 경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런 혼혈들은 수행이 낮은 경우가 많아 회계에서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 끝났으면 비키거라.”

그 말에 한립은 짐짓 화를 내는 척하며 흉살기를 일으켰다.

“아,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유노는 바로 시선을 피하면서 몸을 사렸다.

조금 전 마광에게 핀잔을 들은 구유족 장로는 다시 참견하기도 뭐해서 한립 같은 ‘혼혈’ 따위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립이 지나가자 석천공이 앞으로 걸어가 유노가 든 팔각 탐유경 앞에 섰다.

“엇, 또 혼혈이란 말인가……. 이럴 수가 있나…….”

유노가 의혹을 드러내자 흑치역 무리를 안내했던 살집 있는 구유족 청년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음산 장로님, 이 자의 눈동자가 약간 이상합니다.”

“내가 직접 살펴보겠다.”

구유족 장로인 음산이 직접 나섰다.

유노보다 수행이 훨씬 높은 그가 탐유경으로 조사를 하면 석천공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아……. 석 수사, 마광 수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전음을 보내고 소매 속으로 금색 빛구슬을 불러냈다. 이에 마광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거두었고 석천공도 언제든 은색 비파를 불러낼 준비를 했다.

이때 어디선가 우악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흑치역 버러지들 아닌가? 어쩌다 저런 것들까지 수라성 회맹에 참가할 자격을 줘서는!”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고, 음산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에 석천공은 한숨을 돌리고는 키가 평범한 사람의 두 배는 되고 새까만 갑옷을 입은 푸른 가죽의 원숭이가 흉살기를 풍기는 검은 장창을 들고 유성우처럼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기괴하게 생긴 백여 명의 이족인들을 거느리고 완전무장을 한 채 당장이라도 공격할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본 흑치역 각 족인들도 성문을 다시 빠져나왔다.

“흐흐흐, 누가 교양 없이 소란을 떠나 했더니 니자타역 잡것들이었구만!”

육홍 영주가 비웃음을 흘리면서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푸른 피부 원숭이가 대노해 장창을 내질렀다.

창끝에서 회색 실이 빠져나가 누가 막을 틈도 없이 육홍의 미간을 노렸다.

태을 중기 수행을 지닌 원숭이 인간은 흉살기의 왕성함으로는 흑치역 역주를 넘어섰기에 이번 공격에 맞으면 육홍은 중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 흐릿한 그림자가 육홍의 앞을 막고 검은 수정 방패를 불러내 회색 실을 막았다.

쾅!

회색 실이 터져나가고 괴력을 막은 흑치역 역주도 미미하게 뒤로 밀려났다.

“오중산,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곳에서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한결같은 표정의 흑치역 역주가 서늘하게 물었다.

그런데 성문을 관리해야 할 구유족 장로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고, 음산도 옆으로 물러나 허공을 쳐다보았다.

“목역, 파릉호 전쟁에서 누가 내 조카를 죽였는지 밝히고 그를 내게 넘긴다면 오늘은 그냥 보내주겠다.”

오중산의 말에 묘고는 무의식중에 마광을 힐끗 살폈다.

마광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흥미롭게 싸움 구경을 하면서 언제 꺼내 들었는지 부채까지 살랑살랑 부치고 있었다.

스스로 나설 마음도 없어 보였지만 오중산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더더욱 아니었다.

“흥, 그 자식이 함부로 흑치역을 침입한 것을 누구 탓을 하는 것이냐.”

목역이라 불린 흑치역 역주가 냉소를 흘렸다.

왼쪽 쪽문에서 두 세력이 맞붙으려 하자 관련된 역주들이 모여들었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석천공은 그 틈에 한립과 마광 옆으로 다가와 붙어섰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오중산이 괴성을 내지르며 손을 쓰려 했다.

“마광 수사, 이대로 소란이 계속되면 구유역에서 수행이 높은 자가 나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일을 마무리하기가 어렵겠지요.”

한립이 슬쩍 전음을 보냈다.

“내가 죽였다. 어쩔 테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마광이 팍! 접선을 접고 앞으로 나섰고, 동시에 태을경 중기 수사의 기운이 검은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졌다.

오중산은 흑치역에 목역이 아닌 다른 태을경 수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주춤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일을 벌였으니 물러날 수도 없어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려 했다.

이에 흉살기로 둘러싸인 니자타역 족인들이 그를 뒤따랐다.

마광이 피식 웃으면서 눈동자에 잿빛을 일으켰고, 목역도 흑치역 족인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만.”

그때가 되어서야 구유족 흑포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성문 앞에 모인 이들의 머리를 울렸다.

“수라성이 멋대로 싸움을 벌여도 되는 뒷골목인 줄 아십니까? 당장 흩어지지 않으면 전부 구유역에서 내쫓겠습니다.”

그 말에 안 그래도 물러서고 싶었던 오중산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오른쪽 쪽문으로 들어갔다.

흑치역 족인들도 시선을 마주치고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기에 음산 장로가 석천공을 제대로 검사할 기회는 사라졌다.

* * *

어둠이 내려앉자 흑치역 일행은 구유족의 안내에 따라 수라성 숙소에 짐을 풀었다. 한립 등은 숙소 대전에서 묘고, 묘수 부녀와 만나는 중이었다.

“묘고 영주, 아까는 나 때문에 소란이 일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엇이든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지요.”

검은 돌 탁자에 마주 앉은 마광이 사과를 하자 묘고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떠나 따로 머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인사를 하러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원래는 소문으로만 듣던 삼역회맹이 어떤 것인지 구경이나 하려고 했는데, 오자마자 이런 분란을 일으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떠도는 처지에 각 종족 간의 은원에 휘말리는 것은 원치 않기에 이쯤에서 떠나려 합니다.

난 또 탑목달 대회에서처럼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회합을 하나 했더니 이곳 분위기는 너무 살벌하지 뭡니까? 수라성 달명구(撻冥區) 전도가(顚倒街)가 유명하다니 그곳이나 돌아다니며 보물찾기를 해 볼 요량입니다.”

마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시다면 붙들지 못하겠습니다. 수라성에 수많은 종족이 들어와 있지만 자유롭게 활동 가능한 구역은 타호구(墮湖區), 수산구(綏山區), 달명구뿐입니다. 다른 구역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하셔야 합니다.”

묘고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당부했다.

“장고 선배님, 무례를 무릅쓰고 제가 한 마디 올리겠습니다. 일전에는 저희 삼묘족 객경 장로의 신분으로 수라성에 들어오셨지만 저희와 함께 타호구에 머물며 회맹에 참석하실 것이 아니라면 성안을 돌아다니실 때는 다른 원래 신분으로 다니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묘수가 돌연 끼어들었다. 그 말에 한립이 힐끗 그녀를 살폈다.

여인의 말은 삼묘족을 떠나면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광이 말한 이유를 전혀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묘 영주,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워낙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지 함부로 큰일을 벌일 위인은 못됩니다.”

마광도 그걸 잘 알았기에 웃으며 묘고에게 말했다.

“구유역은 오랫동안 윤회역 휘하의 종족들을 적대시해 왔습니다. 오늘 그런 일도 있었고 하니 분명 누군가 따라붙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움직이시고 기습에 대비하시지요.”

“충고 고맙습니다. 조심하지요.”

마광은 온화하게 웃으며 더는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아버지, 저들을 저리 보내도…….”

“수아,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안다. 우리가 장고의 신분을 소호역까지 가서 확인할 수도 없고 그를 따르는 두 가신들의 정체도 의심스럽지. 저들이 수라성에 온 목적이 따로 있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가 윤회역에 한 표를 던지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과 어떻게든 좋은 인연을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이지 않겠느냐?”

딸아이의 걱정에 묘고가 손을 내저었다.

“저들이 수라성에 온 진정한 목적 때문에 저희 삼묘족이 화를 입을까 걱정되지는 않으세요? 딴마음을 품고 이곳까지 온 것이 분명한데요.”

“허허, 저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우리를 끌어들이겠다고 작정하지 않는 한 그럴 리가 있느냐? 가는 곳마다 목청껏 삼묘족을 따라 수라성에 왔다고 외치고 다니면서 일을 벌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게다가 솔직히 너도 구유역이 저들 때문에 난처해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더냐? 니자타역이 우리를 기습한 원한을 아직 갚지 못했는데, 저들이 알아서 구유역에서 난리를 치겠다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막아서야 쓰겠냐는 말이다.”

묘고는 기대가 된다는 얼굴로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쳤다.

“아버지도 참…….”

평소에는 엄숙하던 아비가 이런 때에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자 할 말을 잃었다.

* * *

이튿날 아침, 한립 일행은 숙소를 떠나 북쪽의 성 중심부로 향했다.

오는 길에 들은 묘고의 설명에 따르면 수라성은 십만 리 이상의 아홉 구역으로 나뉘어서 각 구역이 속세의 작은 국가와 비견될 만했다.

그중 수산구는 성안의 높은 산봉우리와 인접해 멀리서 보면 흉살기가 자욱한 작은 종문 같아 보였다.

그들이 머물던 숙소는 수라성의 입구에 있는 관문에 속해서 타호구, 달명구, 수산구와 모두 가까웠다.

걸어가면 갈수록 행인들이 많아졌는데 생김새는 달라도 다들 냉랭한 표정으로 한립과 같은 이족인을 대했다.

“다 만나 본 것은 아니지만 유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저게 뭔지 모르겠어요. 참 마음이 가지 않는 자들입니다…….”

넉넉한 검은 피풍의로 갈아입은 마광이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백리 수사에게 구유족이 이종족을 경계하고 배척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대놓고 표현할 줄은 몰랐군요.”

삿갓을 매만지던 한립도 거들었다.

“려 수사, 구유족인에 대해 그리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그들의 성지에 잠입할 생각입니까?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석천공이 걱정스레 말했다.

한립은 백리염과 만나 들은 정보를 솔직하게 털어 놓고 윤회전을 통해 선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과 세 살지에 대한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석천공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홀로 윤회역으로 가서 그가 구유역에서 볼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함께 구유역에 들렸다 윤회역으로 가는 것이었다.

석천공은 예상대로 후자를 골랐다.

위험하기는 해도 숙살단이 꼭 필요해서 한립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삼역회맹이 개최되지 않았으면 수라성에도 들어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요.”

“저들이 성지를 중시해 어디에 있는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는데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상점들이 많다는 전도가로 가서 정보를 구해봅시다. 성안의 상점에서 수라성 지도를 구하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그래 봅시다.”

석천공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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