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57화 (1,614/2,000)
  • 1857화. 구유역으로

    *

    한립이 둘러보니 대전 안에서 수행이 가장 높은 이는 태을경 중기에 이른 흑치역 역주였고 나머지 영주들은 전부 금선경의 경지였다.

    ‘그랬군…….’

    영주와 역주의 수행을 보아하니 흑치역이 회계 구석에 있는 작은 곳이라는 소리가 이해가 되었다.

    “묘고, 어쩌다 이렇게 늦은 겁니까? 역주 대인과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압니까?”

    왼쪽에서 세 번째 의자에 앉은 통통한 노인이 투덜거렸다.

    “얼마 전 열린 탑목달 대회에서 니자타역이 습격해 상황을 정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역주 대인과 영주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묘고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사정을 설명했다.

    “뭐라고요?”

    그 말에 영주들의 안색이 크게 달라졌다.

    “그 일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네. 묘고는 니자타역을 물리쳐 우리 흑치역의 위상을 드높였으니 후에 상이 내려질 것이다. 우선 앉게.”

    “예.”

    묘고가 인사를 하고 마지막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립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은 자연스럽게 그의 뒤로 가서 섰다.

    “역주 대인, 삼역회맹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묘고 영주까지 도착했으니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또 다른 흑포 중년인 영주가 입을 열었다.

    “급할 것 없네. 일정은 내가 안배를 해놓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일단 회맹에 대해서 상의를 하지.”

    “역주 대인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흑치역 역주의 말에 여덟 명의 영주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흑치역 역주는 논의 사항을 꺼내기 전에 한립과 같이 영주들을 따라온 수행원들을 내보냈다.

    한립도 이런 회의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마광 등과 함께 대전을 빠져나왔다.

    “묘고 영주, 함께 온 이들 중에 저 세 명은 기운이 독특합니다. 삼묘족인이 아닌 것 같은데요?”

    다들 물러나자 통통한 노인이 물었다.

    “안목도 뛰어나십니다, 육홍 영주. 안 그래도 역주께 아뢸 참이었는데, 저들은 삼묘족인이 아니라 소호역의 허합족인입니다. 이번에 니자타역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준 삼묘족의 은인들이라 수라성으로 가서 삼역회맹을 구경하고 싶다기에 데리고 왔지요.”

    “소호역의 허합족!”

    다른 영주들이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묘고 영주, 이번 회맹의 결과에 따라 우리 흑치역의 처지가 달라질 텐데 어찌 함부로 외부인들과 동행하려 하십니까.”

    통통한 노인이 주름진 얼굴로 반대했다.

    “내가 보니 삼묘족의 객경 영패를 지니고 있던데. 그렇다면 흑치역 인물이라 쳐도 되겠지. 실력이 약하지 않으니 묘고는 좋은 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하게.”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노인을 향해 묘고가 얼굴을 찌푸리기 전에 흑치역 역주가 명을 내렸다.

    “예! 역주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묘고가 희색을 드러내며 얼른 허리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역주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통통한 노인은 달갑지 않아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한립 무리는 묘수에게 흑치성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듣고 흩어졌다.

    석천공은 성안의 시장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찾아봐야겠다며 떠나고 마광은 별로 돌아다니고 싶지 않다며 선박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아직 회계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흑치성을 한 바퀴 돌며 관련 자료를 수집한 뒤 선박으로 돌아가 화지 공간으로 들어갔다.

    “녀석아, 곧 삼역회맹이 열리는 것이냐?”

    죽루에 앉자마자 석경후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합니다. 회계가 진선계를 침입할지 말지 담판을 지을 작정 같더군요.”

    “호오, 흥미로운 주제로구나. 그런데 진선계 수사인 네가 삼역회맹에 끼려는 것은 무슨 이야기를 하나 염탐을 하기 위해서더냐?”

    “진선계에서도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한 저인데, 그런 일에 관심 둘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수라성에 세살지라는 곳이 흉살기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소리를 들어서 살쇠의 겁을 극복하기 위해 가려는 것입니다.”

    “세살지를 찾으러 간다고? 나도 수라성에 그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도움은 주지 못할 것이다. 음승전과 원한이 깊어서 수라성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거든!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내 너를 돕겠다고는 했다만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면 도움을 줄 수 없다.”

    코웃음을 친 석경후는 이 말을 남기고 조용해졌다.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 전혀 모른다니 아쉬웠다.

    흑치역 역주와 묘고 등은 이틀을 밤낮도 없이 논의하다 사흘째 되는 아침이 되어서야 흩어졌다.

    그날 광장에 전부 모인 흑치역 인물들은 역주가 준비한 5층짜리 새까만 옥석 선박을 타고 출발했다.

    * * *

    30년 뒤.

    지평선 끝에 새까만 거대 성벽이 석양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음과 양이 교차하는 곳에 도착하자 선박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내려 성문 앞에 모였다.

    한립 일행은 삼묘족 복색을 하고 무리 속에서 걸어갔다.

    “수라성이 듣던 대로 크기는 합니다. 회계에서 몇 안 되는 거대한 성이 확실하군요.”

    석천공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때 한립은 멀리 보이는 성벽의 음각 문양들이 선계의 것과는 무척 다르고 은은하게 흉살기 파동을 방출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둥글게 생긴 3개의 성문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성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그 주변을 수백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바닥을 끄는 기다란 장포를 걸친 병사들은 지면에서 한 뼘 정도 떠 있었고 표정이 무척 냉랭했다.

    인족과 비슷하면서도 뺨 아래쪽에 뱀의 허물처럼 하얀 비늘이 돋아 있었다.

    “구유족이 아닙니까?”

    석천공이 그들을 훑고 물었다. 한립도 궁금하던 바였다.

    구유족은 구유역을 통솔하는 종족으로 역주가 바로 구유족 족장이라 아주 콧대가 높다고 들었다.

    그런 이들이 성문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저들은 진정한 구유족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유노(幽奴)라 불리는 구유족의 노복 일족이지요. 진정한 구육족들은 수가 매우 적고 한 명, 한 명이 대단한 수행 자질을 지녀 뼛속까지 오만합니다. 저기 성문 아래 모여 있는 이들이 구유족인입니다.”

    묘고가 석천공의 말을 듣고 다가와 설명해 주었다. 한립이 그의 시선을 따라 검은 의자에 앉은 뺨이 움푹하게 들어간 노인을 보았다.

    유노와 마찬가지로 검은 장포를 입었으나 뺨에 뱀 허물은 보이지 않았고 기운을 숨긴 태을경 후기의 회선이었다.

    그 옆 허공에 있는 두 사람은 거만한 눈길로 다른 이들을 살피고 있었다.

    흑치역 각 종족이 성문 앞에 이르렀는데도 우두머리급 수사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고 그 옆의 사람 중 살집이 있는 사내가 날아들었다.

    “흑치역 분들은 저를 따라 저쪽 문을 이용해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살집 있는 사내는 인사도 생략하고 그들을 정문 왼쪽의 작은 쪽문으로 안내했다. 흑치역 역주의 눈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으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흑치역 관할의 영주들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거나 눈에 쌍심지를 켰으나 속으로 욕할 뿐 대놓고 분란을 만들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들의 영토가 아니었으니 멋대로 굴 수는 없었다.

    왼쪽 문 앞에는 윤회역 관할의 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길게 줄을 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려 수사, 아무래도 신분을 검사하는 것 같습니다.”

    흑치역 무리의 중간쯤에 서 있는데 석천공이 전음을 보내왔다.

    그때 묘고도 입을 열었다.

    “이런 되먹지 못한 것들. 쪽문으로 들어가라고 한 것도 모자라서 신분 검사를 해? 우리를 무얼로 보는 것인가.”

    문 앞에서 한 사람이 광선을 분산시키는 팔각형의 검은 삼릉경(三稜鏡)을 들고 지나는 이들의 눈을 비추고 있었다.

    문제는 정문과 오른쪽 쪽문에는 그런 삼릉경을 든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탐유경(探幽鏡)입니다. 흉살기 변화를 감지하는데 뛰어난 법보로 눈 속의 흉살기가 어떻게 뭉쳐 있는지를 통해 어느 종족인지 단번에 알아낸다더군요.”

    마광이 한립과 석천공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아는 물건입니까?”

    한립이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그간 저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서적들을 둘러 보다 <기화지(奇貨志)>라는 고대 경전에서 기록을 보았지요. 보시겠습니까?”

    마광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수사의 생각에는 우리의 위장이 들킬 듯싶습니까?”

    미간을 찌푸린 한립이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저야 육체가 원래 허합족인의 것이니 아무렇지 않겠고, 려 수사는 흉살기로 오랫동안 고생한 탓에 동공이 변형되고 혈 곳곳에 흉살기가 쌓인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그럭저럭 속여 넘길 수 있겠습니다. 그저 석 수사가 조금 문제인 데요…….”

    마광의 전음에 석천공이 생각에 잠겼다.

    줄은 점점 줄어들어 흑치역의 차례가 되었다.

    역주는 워낙 신분이 존귀해서 영패만 보이면 통과지만 그 후로는 영주든 객경장로든 무조건 탐유경으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오래지 않아 삼묘족 차례가 되었다.

    묘고는 기분 나쁜 얼굴로 먼저 앞으로 나서 조사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고, 다음으로 묘수가 나섰다.

    아비와 달리 시종일관 잔잔히 미소를 띠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려 수사,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석천공이 급히 전음을 보내왔다

    “상황을 보아가며 행동합시다. 탐유경에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발각되면 제가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그동안 수사가 공간 비술을 이용해 우리를 이동시키면 됩니다. 피치 못할 상황이 되면 마광 수사에게 뒤를 맡기고 우리는 구유족인들을 죽여서라도 길을 뚫어야겠지요.”

    “그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한결같이 침착한 것을 보면 려 수사도 참 대단하십니다! 부러울 따름이에요.”

    “걱정으로 속을 태울 바에는 해결책을 찾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들의 전음을 듣고 있던 마광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삼묘족인 세 사람은 문을 통과하고 마광이 먼저 유노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 탐유경을 들고 그의 눈을 가리키던 유노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법보를 치웠다.

    “당신은 허합족인인데 어째서 삼묘족인과 함께 온 것입니까?”

    멀리 검은 의자에 앉아 있던 구유족 흑포 노인의 시선이 마광에게로 향했다.

    “다른 종족은 삼묘족 객경장로를 맡아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뭐가 이상하단 것인지.”

    마광이 입을 비죽였다.

    “삼묘족인이 허합족의 객경을 한다면 이상하지 않겠으나, 허합족인이 겨우 삼묘족에서 객경 노릇을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만 한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유족 흑포 노인이 소리 없이 날아들었다.

    “공간법칙을 익힌 잡니다.”

    동공을 수축한 석천공이 그걸 보고 주먹을 쥐었고, 한립은 긴장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럼 허합족인은 객경을 하고 싶으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왜요, 이제 구유족에서 허합족인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까지 상관할 참입니까?”

    “이곳은 구유족의 구역입니다.”

    마광의 가소롭다는 표정에 흑포 노인의 말투도 냉랭해졌다.

    “또한 삼역회맹이 열리는 곳이고요?”

    “그렇습니다.”

    “삼묘족 객경 신분의 허합족인이 삼역회맹에 참가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들여보내거라.”

    흑포 노인은 여기까지 대화를 나누고는 옆으로 비켜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하, 저자가 스스로 굴욕을 자처하는데 장로께서 걱정해 주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다리고 있던 마른 구유족 사내가 얼른 노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니 말이다.”

    흑포 노인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흑치역 역주와 일행들은 그의 행동에 흡족해했고, 묘고는 심지어 마광을 향해 몰래 엄지를 치켜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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