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화. 검을 거두다
*
‘낭환흑옥…….’
한립은 주변의 검은 수정돌을 살폈다.
회계 경전에서 얼핏 본 기억이 있어 그의 말대로 음기나 흉살기를 숨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푸른빛으로 검은 돌멩이들을 챙긴 한립은 푸른 화염을 분출해 그것들을 연화시키려 했다.
정염불새가 잠들어 원영의 불길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네 진화는 선령력을 품고 있어서 낭환흑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는 한립을 말리고 손가락을 까딱해 인근의 흉살기를 푸른 화염 속으로 흡수시켰다.
그러자 맑은 빛을 지니고 있던 화염이 회색으로 혼탁하게 변해갔다. 화염이 잿빛 실 같은 빛을 품고 있는 것을 본 한립은 조금 놀랐다.
흉살기와 원영의 불길을 충돌도 없이 완벽하게 합치는 일은 그도 불가능했다.
치지직.
청회색 화염이 낭환흑옥을 둘러싸고 활활 타올랐다.
시간이 흘러 반 시진 만에 낭환흑옥들이 녹아 검은 액체로 변하자 한립은 수결을 맺어 그것을 칼집 모양으로 변화시켰다.
석경후는 옆에서 주변의 흉살기로 새까만 칼집에 회색 문양을 불어넣고 있었다.
스릉!
이렇게 완성된 칼집이 날아가 천호화혈도를 덮었다.
“감사합니다, 석 수사.”
한립이 칼집에 든 장도를 들고 석경후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하, 뭐 이런 걸 가지고. 난 방금 진법을 억제하느라 힘을 소모해 한동안 쉬어야 하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의식연계로 알리거라.”
석경후가 담담하게 답하고 하얀빛으로 변해 천호화혈도 안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상대의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8장의 흑백 부적들을 꺼내 천호화혈도를 감싸 흑백이 교차하는 고치로 만들어 버렸다.
칼집으로 7할 정도 감춰졌던 기운이 금제로 인해 더욱 미약해졌다.
한립은 흑백 고치를 거두고 연못 위로 날아올랐다. 시간을 꽤 지체한 탓에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반나절이 지나 선박을 따라잡은 한립은 은신술을 써서 조용히 자신의 거처로 들어갔다.
“돌아오셨습니까?”
해 도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일어났다.
“제가 나가 있는 동안 별일은 없었는지요?”
“없었습니다. 석천공이 다녀가기는 했는데 문밖에서 금제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전음부만 남겨 두었습니다.”
한립은 검은 전음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없애버렸다.
숙살단에 관한 것이었다. 한립은 그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곧장 전음부를 꺼내 석천공에게 보냈다.
“한동안 폐관할 예정이라 수고스럽겠지만 계속해서 이곳에 계셔주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해도인의 대답에 한립은 화지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숙살단 제련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 * *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 몇 년이 지나갔다.
죽루 안의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고 은색 연단로 주변의 녹색 불길을 조절하는 중이었다.
웅…….
화로가 진동하고 뚜껑이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상태를 살피던 한립은 푸른 빛을 던져 넣었고, 녹색 화염이 삽시간에 사라지면서 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매콤한 냄새가 진동하더니 다섯 개의 숙살단이 나타났다.
한립은 희색을 드러내며 녹색 빛으로 단약들을 감싸 검은 옥병에 넣어 두고 은색 화로도 거두었다.
숙살단 20개를 제련하느라 현지정석과 고락화를 제외한 다른 재료들을 다 써서 어쩔 수 없이 작업을 마쳐야 했다.
주재료가 남아도는데 보조 재료가 부족하다니 우스운 상황이었다.
그는 손에 든 검은 옥병을 들고 무언가를 생각하다 번득 사라져 선박 객실 앞을 지키고 있던 해도인 앞에 나타났다.
“해 수사, 바깥에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흉살기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닙니까?”
“수사와 달리 전 괴뢰의 몸이라 쉽게 외부의 힘에 침식당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뇌전의 힘을 품고 있어 흉살기에 영향을 받기도 어렵고요.”
“다행입니다. 폐관하는 동안 다녀간 이는 없었습니까?”
한립의 물음에 해 도인은 말없이 다섯 장의 전음부를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의식으로 내용을 확인한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네 장은 석천공이 보낸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마광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한립은 손을 저어 방안의 금제에 통로를 만들고 전음부 두 장을 꺼내 무어라 속삭이고 날려 보냈다.
하나는 석천공 방으로 나머지 하나는 마광의 방으로 향했다.
끼익.
그러고 나서 천천히 방을 나오니 석천공 방문의 금제가 눈 녹듯 사라지고 문이 열렸다.
“려 수사, 이게 얼마 만입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석천공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한립이 문 안으로 들어간 후, 방문이 저절로 닫히고 검은 금제가 봉합되었다.
어두운 방구석에 석천공이 은색 비파를 머리 위에 띄워놓고 앉아 있었다. 은색 비파는 진언문 유적에서 찾은 공간보물이었다.
비파 옆에 있는 은색 별 문양이 가득한 깃발도 한립과 진언문 입구 금제에서 찾은 공간 선기였다.
두 공간보물이 발산하는 은빛이 원형의 보호막을 이루고 석천공을 보호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 또 다른 은색 진법 깃발들이 떠올라 복잡한 진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금제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머리가 헝클어진 석천공의 호흡은 거칠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어서 언제라도 미쳐버릴 것처럼 보였다.
“석 수사, 어쩌다가…….”
“아직은 괜찮습니다. 흉살기 때문에 살쇠가 도래했을 뿐이지요. 회계의 흉살기가 이렇게 강력할 줄은 몰랐습니다. 온갖 방법을 썼는데도 완전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더군요.”
움찔한 한립을 보고 석천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석 수사도 살쇠의 겁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이미 수백 년 전에 시작된 일입니다. 비술로 억제해 두기는 했는데 하필 이런 때에 살쇠가 도질 줄은 몰랐지요. 그런데 숙살단은 제련해 내셨습니까?”
석천공은 그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한립이 말없이 검은 단약을 꺼내 들자 눈이 밝아진 그는 벌떡 일어나 손을 뻗었다.
주위의 은색 금제에서 거대 손이 빠져나와 한립이 들고 있는 검은 단약을 쥐고 안으로 돌아갔다.
“려 수사, 제가 무얼로 숙살단의 대가를 치르면 좋겠습니까?”
흉살기 때문에 감정을 다스리기 힘든지 팔을 덜덜 떨면서도 석천공은 해야 할 말을 잊지 않았다.
“일단 단약을 연화시켜 흉살기부터 다스리시지요. 상태를 보아하니, 이대로 살쇠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큰일 나겠습니다.”
“그럼 수사의 말대로 따르겠습니다.”
석천공이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에서 은색 비파의 강렬한 빛이 방출돼 그의 모습을 가려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립은 곧바로 떠나지 않고 방 한구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거의 반년이 지났을 때 은빛이 표표히 흩어지고 석천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운도 평온하고 눈빛도 맑아진 것이 흉살기 침식에서 회복된 듯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려 수사! 수사의 숙살단이 없었으면 회계에서 절명할 뻔했지 뭡니까.”
“함께 낯선 땅에서 고생하는데 서로 도울 수 있는 것은 도와야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이 미소를 머금었다.
석천공은 그런 한립을 바라보다가 네모난 옥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옥함 안에 든 새까만 영초에서 머리를 맑게 만들어주는 상쾌한 향기가 풍겼다.
“이건…….”
한립이 바로 영초의 정체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제 짐작이 확실하다면 수사는 연신술을 익히고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만혼초(万魂草)가 필요하실 테지요. 오래전에 구해 둔 것인데 제가 받은 숙살단과 이것을 교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정말 필요로 하던 물건이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한립은 옥함을 건네주는 석천공을 마주 보고 만혼초를 받아 넣어 두었다.
“만혼초 자체가 의식의 힘을 키우는 효과가 있어 대부분은 손에 넣자마자 씹어 삼키고 말지만, 사실 만혼단(万魂丹)을 제련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만혼단이요?”
한립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취곤성 경매에서 감찰선사가 만혼초를 미끼로 연신술을 익히는 윤회전 인물을 색출하려 한 뒤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만혼단은 우리 마역의 연단대사가 수백만 년 전에야 개발해낸 단약입니다. 그래서 아직 진선계까지는 제련법이 유출되지 않았고요.”
석천공은 두말하지 않고 옥간을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신중한 표정으로 옥간을 받은 한립은 내용을 확인하고 얼굴이 밝아졌다.
만혼단의 약방은 만혼초만 구하면 그리 복잡하지 않아 진선계로 돌아가면 쉽게 만혼단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려 수사, 숙살단이 남아 있다면 제게 몇 개 더 파실 수 있겠습니까? 만혼초는 없지만 취곤성에서 만혼초를 선원석 3천5백 개에 구했으니 개당 그 가격으로 드리겠습니다.”
“……재료가 충분하지 않아 저도 그렇게 많이는 제련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도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라 다섯 개 밖에는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다섯 개라도 거래하겠습니다.”
석천공은 실망한 기색이 스쳤지만 손을 저어 바닥에 선원석을 무더기로 쌓아 두었다. 그는 의식으로 선원석을 훑고는 검은 옥병을 꺼내 석천공에게 주었다.
석천공이 뚜껑을 열어보니 총 6개의 숙살단이 들어 있었다.
“만혼단 약방을 그냥 받아 갈 수는 없지요. 하나는 그것에 대한 대가입니다.”
“하하, 고맙게 받겠습니다!”
석천공은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걱정거리가 사라져서인지 평소의 자신만만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립은 그와 몇 마디 담소를 나누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숙살단이 많다고 오래 바깥에 머무는 것보다는 화지 공간에서 수련하며 흉살기 침식을 막는 것이 나았다.
* * *
다시 몇 년이 흘러, 거대 선박이 드디어 흑치역 주성인 흑치성에 도착했다.
흑치성은 진선계의 중형 성에 맞먹는 면적을 지니고 있었지만 상점의 개수나 거주하는 사람의 수는 동급의 진선계 성보다 적었다.
선박이 성 위를 선회하다 어느 거대한 저택 앞에 정박하고 안에서 삼묘족 족인들이 내렸다.
한립은 화지 공간을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삼묘족 객경 신분으로 흑치성에 왔기에 성주를 알현하는데 함께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삼묘 영주 오셨습니까. 역주 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른 영주분들도 도착해 계시고요.”
검은 비늘이 빼곡하게 박힌 장포를 걸친 사내가 저택에서 걸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다들 일찍 도착하셨구만. 안내해 주시게.”
묘고가 인사를 하고 흑포 사내를 따라 안으로 향했다.
무리가 저택 안쪽 대전으로 들어가자 안쪽에 사람 허리 높이의 돌계단이 있고, 그곳에 검은 머리카락에 구불구불한 수염을 기른 거한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키가 큰 거한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장포를 걸치고 위압감을 드러냈다.
계단 아래쪽에 좌우로 네 개씩 놓인 돌의자에는 왼쪽 가장 뒷자리를 빼고 모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의자에는 7명이 앉아 있었고, 그 뒤에는 4, 5명의 시종이 서 있었다.
“묘고가 역주 대인을 뵙습니다.”
묘고가 예를 취하고 한립 등 다섯 사람도 그를 따라 했다.
계단에 앉은 흑포 거한은 고개를 끄덕이다 한립 일행을 훑고 특히 마광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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