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화. 장도를 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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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승전?’
낯선 이름에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그게 누군지 묻고 싶었으나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
“저도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였습니다. 이제 제가 묻지요. 이 장도는 무슨 물건인지요?”
“이게 뭔지 모른다고? 하긴 의식으로 겁도 없이 화혈도를 살피려 할 때부터 알아봤다. 확실히 음승전의 수하는 아니야.”
석경후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답을 주지 않았다.
“아직 질문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천호화혈도(天狐化血刀)란 이름의 이 장도에 목숨을 잃으면 누구든 혼백이 영원히 이 안에 구금되어 윤회할 수 없게 되지. 이미 수많은 망혼이 장도에 갇혀 장도 안에는 흉살기와 원념이 가득 차 있다.”
“천호화혈도라, 보아하니 희귀한 보물 같습니다.”
“녀석아, 네가 음승전의 사람이 아니라면 이왕 시간법칙의 힘을 지니기도 했으니 나와 거래를 하는 것이 어떠냐?”
“거래요?”
“너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니 안심하거라. 너와 나 모두 도움이 될 것이야.”
석경후가 뒤쪽으로 손을 저어 하얀빛을 천호화혈도 옆의 지면에 흡수시켰다.
우웅!
바닥이 떨리고 천호화혈도를 중심으로 원형 제단이 솟아올랐다.
연못물에 제단의 흙이 씻기고 회백색 석재 위에 각인된 새까만 문양들이 드러났다.
무척 복잡한 진법이었는데, 진법의 먹처럼 진한 빛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천호화혈도는 검은 진법의 정중앙에 꽂혀 붙들려 있는 듯했다.
“이건…….”
한립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의식으로 인근을 탐색했을 때 지하에 이런 제단과 진법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
눈앞의 진법은 선계의 진법과는 완전히 달랐고, 회계의 금제에 대해 관련 경전을 읽기는 했지만 무엇을 하는 진법인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검은 진법이 아주 심오하고 내부의 금제들이 층층이 교차해서 그가 보았던 어떤 금제보다 더욱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진선계에서 왔으니까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봉인진법인 대흑천도신금제(大黑天道神禁制)이다. 천호화혈도가 이 진법에 봉인되어 있어 나도 이곳에 발이 묶인 처지지.
내 요구조건은 간단하다! 천호화혈도를 봉인에서 뽑아내 주기만 하면 돼. 나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주는 대신 난 천호화혈도를 조종해서 앞으로 십만 년간 네 곁에서 너를 돕겠다.”
팔을 내린 석경후는 한립을 향해 진지하게 제안했다.
“저를 과대평가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봉인을 제가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하하, 너 혼자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천호화혈도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보내며 대흑천도신금제를 적잖이 연화시켜 놓은 내가 있지 않더냐? 너를 위해 금제의 힘을 억눌러 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해 볼 수 있겠습니다. 허나 검을 뽑는데 대흑천도신금제 말고 다른 제약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안 그랬으면 벌써 빠져나오셨을 것 아닙니까.”
“물론이지! 내가 금제의 힘을 대부분 억누른다고 해도 천호화혈도를 뽑으려면 최소한 태을경에 맞먹는 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거기다 나는 진법을 다스리느라 천호화혈도를 제압할 수 없어서 일단 장도를 건드리면 넌 무궁무진한 원념의 공격을 받게 될 테지. 그건 오직 3대 지존법칙을 지닌 수사만 막을 수 있다. 네 녀석이 시간법칙을 지니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야.”
고개를 끄덕인 석경후의 말에 한립은 미소를 거두고 침묵했다.
“그래서 내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석경후가 인상을 찡그렸지만 한립은 모른 척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잠깐……. 천호화혈도를 지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가는 것이냐? 이걸 지니면 열 배 이상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금선 최고봉인 네 녀석도 내 도움을 받으면 태을경 수사를 도륙하며 다닐 수 있단 말이다.”
“천호화혈도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수사가 장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인 없는 보물은 아니란 말이지요. 게다가 이제 막 회계에 온 제가 당신의 말이 사실인지 어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이제 보니 내 말을 믿지 못했던 것이구나! 그렇지, 그럴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나를 믿겠는지 말하거라.”
한립의 말에 석경후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얼굴로 물었다.
“제가 수사가 진심이라는 것을 믿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에 응해주셔야 합니다.”
“말하래도.”
“일단, 수사의 신분을 알아야겠습니다. 천호화혈도의 기령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음승전이 누구인지 그자와 어떤 관계인지도 말해주셔야 합니다.”
“그걸 알아 뭐하게?”
“수사를 이곳에서 데리고 떠나는 대신 제가 누구와 척을 지게 될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립은 평온하게 반문했다. 이에 석경후가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굳이 알아야겠다면 알려주마. 하지만 이 일에 대해 안다는 것이 네게 꼭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야.”
“어디 한 번 들어나 보겠습니다.”
한립은 씩 웃음 지었다.
“어째 네 녀석에게 끌려가는 것 같은데……. 쩝,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 난 확실히 천호화혈도의 기령은 아니다. 나도 이 안의 무수히 많은 잔혼들처럼 천호화혈도에 의해 참살당한 수사 중 하나지. 혼백이 장도 안에 갇히기는 했지만 수행이 높아서 다른 원념과 동화되지 않고 되려 천호화혈도의 오묘한 이치를 일부 간파해서 살아남게 된 것이다.”
“오, 그럼 수사를 죽인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수행은 어떻게 되고요?”
한립이 이채를 띠고 연달아 물었다.
연신술 5성을 수련한 후, 그의 의식의 힘은 소류나 벽사 선자 같은 태을경 후기 존재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 그도 천호화혈도의 무궁무진한 원념에 대항하지 못했는데 석경후가 아직까지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안 되겠구나? 내가 출신에, 성장 과정, 수련공법까지 줄줄 읊어 주어야 만족하겠느냐? 내 비록 부탁하는 처지지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얼굴을 굳힌 석경후가 냉랭히 쏘아붙였다.
“제가 실언을 한 듯하니 용서해 주시지요. 제가 처음 말씀드린 세 가지 질문에만 답을 주시면 됩니다.”
한립은 공수를 하고 사과를 했다.
상대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했다.
“흥, 난 살해당하기 전에 회계의 어느 계역 역주였다. 나를 죽인 자는 바로 음승전으로, 그자도 구유역의 역주이고.”
석경후는 서늘하게 답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더는 한 글자도 음승전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구유역 역주!’
한립은 상대의 신분과 음승전의 정체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를 듣고 한참 만에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달성하셨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제가 당신의 체내에 금제를 심을 수 있게 허락하는 것입니다.”
“좋다.”
눈을 번쩍 뜨고 한립과 시선을 마주친 석경후는 뜻밖에도 아주 흔쾌히 답했다. 심지어 무슨 금제를 심을 거냐고 묻지도 않고 말이다.
“실례하겠습니다.”
한립도 의외라 여겼으나 공수를 하고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석경후 허상도 천호화혈도를 떠나 그 앞에 있었다.
한립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고는 자신의 혀를 깨물어 정혈을 뱉은 뒤 수결을 맺었다.
파파팟.
핏방울이 괴이한 주술문자들로 변하고 있었다.
한립의 미간에서 수정실 몇 가닥이 튀어나와 괴이한 주술문자와 융합되어 석경후의 미간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핏빛으로 뒤덮인 석경후의 몸에 미간을 중심으로 암홍색 문양이 퍼져나갔다. 핏빛은 빠르게 사라져 한 호흡이 지난 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되었습니다.”
한립은 혼백을 전문으로 억제하는 특수 비술을 펼쳐 두고 손을 내렸다.
마광에게 심어둔 금제와 비슷한 비술은 자신의 피를 이용했기에 상대를 어느 정도 자신의 육체와 묶어 둘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상대도 자신을 해칠 수 없었으나 자신도 아무 이유 없이 상대를 해치기 어려웠다.
“이제 거래를 하는 것이냐?”
“예.”
“좋다!”
한립의 확답을 들은 석경후가 웃음을 머금고 하얀빛으로 변해 천호화혈도 안으로 들어갔다.
쉬쉬쉭!
즉시 검은 장도에 하얀빛이 깃털처럼 떠올랐다.
대흑천도신금제가 위기를 느끼고 맹렬하게 검은 안개를 분출해 검은빛에 대응하려 했다.
퍼퍼퍼퍼펑!
하얀 깃털과 검은 안개가 맞부딪쳐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웅얼거리는 주술 소리가 장도 안에서 들려왔다.
부르르 몸을 떤 천호화혈도에서 하얀빛이 촉수처럼 늘어져 아래쪽 제단으로 흘러 들어갔다.
제단의 검은 문양이 즉시 후퇴하면서 중앙의 장도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냈다.
“어서, 화혈도를 뽑아라! 나도 대흑천도신금제를 오랫동안 막을 수 없다!”
석경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한 금빛을 두르고 기다리고 있던 한립은 거의 실체화된 빛으로 금색 갑옷을 이루고 제단 위의 길로 몸을 날렸다.
번뜩하고 천호화혈도 옆에 이른 그는 한 손으로 장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쿠릉!
천호화혈도의 검은 빛이 왕성해지면서 짙은 색의 검은빛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한립의 오른팔이 검은빛의 고리에 잠식되어 사악한 원념들이 팔을 타고 의식세계로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전력으로 시간법칙의 힘을 발휘한 그의 몸에서는 사악한 원념도 열 배는 느려져서 얼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원념이 머리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강력한 기운에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어지럼증을 느낀 한립은 불쾌한 느낌을 무시하면서 어렵게 선령력을 일으켜 주변의 금빛을 화염처럼 일렁였다.
그가 힘을 주자 오른팔 주변에 파동이 일었다.
쿠쿵!
제단이 흔들리고 대흑천도신금제의 검은 빛도 영향을 받아 요동쳤다.
천호화혈도와 제단 모두 흔들리고 있는데도 장도는 뽑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한립이 눈을 번득이자 진룡, 채봉, 거원 등 법상 허상들이 연달아 떠올랐다가 그를 한 바퀴 돌고 체내로 융합되었다.
한립은 자금색 빛을 터트리며 열반성체의 자금마신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크앙!”
몸집이 몇 배로 커진 그는 기운도 폭증해서 굵은 팔뚝에 더욱 힘을 주었다.
콰드득.
그 순간, 천호화혈도와 제단 사이가 터져나가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자금마신은 장도를 쥔 채 연못 가장자리까지 튕겨 나갔다.
천호화혈도가 뽑혀나간 제단은 빛을 잃고 진법이 흔적도 없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팟.
그때 하얀 빛덩이가 천호화혈도 안에서 날아올랐다. 동시에 하얀빛이 장도를 뒤덮고 검은빛을 억눌렀다.
“으하하! 이 빌어먹을 연못에 갇혀 있던 세월이 몇 년이란 말인가! 드디어 탈출했다!”
석경후가 하얀 빛덩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광소를 터트렸다.
“비열한 수로 나를 해친 음승전 네 이놈.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이 원한을 몇 배로 돌려주고 말 것이야!”
웃음을 터트리던 그는 곧바로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분노에 차 소리쳤다.
자금마신으로 변한 한립은 몸집을 줄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는 가만히 석경후를 지켜보기만 했다.
“후우…….”
혼자 날뛰던 석경후는 오랜 세월 억눌러왔던 울분을 표출하자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거 미안하게 됐네. 너무 오래 갇혀 있다가 금제를 탈출하고 보니 흥분했구만.”
석경후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한립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어떤 심정이실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요.”
“장도도 뽑았으니 어서 이곳을 떠나지. 이렇게 요란을 떨었으니 누군가 알아챘을지 몰라.”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강렬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천호화혈도를 내려다보았다. 석경후가 흉살기 원념을 제압해 두었지만 어떻게 하면 장도를 잘 숨길 수 있을지 생각 중이었다.
“여기 널린 검은 돌들이 낭환흑옥(琅環黑玉)이다. 흉살기 원념을 숨기는데 탁월해서 이걸로 칼집을 만들면 천호화혈도의 기운을 가릴 수 있을 것이야.”
석경후는 한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고는 귀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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