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화. 쌍수호도(雙首狐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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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백리염이 유화성을 떠났다.
그날 오후 묘수가 마광을 찾아와 자신의 아비가 삼역회맹에 참가하고자 수라성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했다.
미리 한립에게 언질을 받은 마광은 회맹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묘고를 따라 삼역회맹에 참석하고 그 김에 구유역을 구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녀가 돌아가 아비에게 그 일을 전하고 오래지 않아 묘고가 동의한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한립은 너무 쉽게 일이 성사되어 의외라 생각했으나 곰곰이 따져보니 이해가 되었다.
탑목달 대회를 기습했던 니자타역은 구유역 관할의 작은 계역이었고, 회맹에서 결론이 나기 전까지 각 계역 간의 관계는 불안정했다.
구유역까지 한립 일행이 따라가 준다면 훨씬 안전할 테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묘고는 몇 달 뒤에나 구유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 * *
몇 달이 지나고 드디어 출발일이 다가왔다.
영주부 대문 앞 광장에는 3층으로 이루어진 거대 선박이 정박해 있었다.
선박을 이끄는 뿔 달린 말들은 한립 일행이 이곳으로 올 때 봤던 것보다 훨씬 컸고, 날개도 세 쌍이나 되었다.
마광, 한립, 석천공, 묘고, 묘수 그리고 회색 의복을 입은 매부리코 사내가 대문에서 걸어 나왔다.
“일단 흑치역의 흑치성으로 가서 역주님과 만나 구유역으로 향하겠습니다.”
묘고가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따라가 구경이나 하려는 것이니 모든 일정은 묘 영주께서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광이 웃음을 지었고, 한립과 석천공은 그 좌우에 서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삼역회맹은 회계의 각 계역의 의견을 모으는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세 분도 이 객경장로 영패를 지니고 계셔야 신분을 검사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묘고가 검은 영패 세 개를 꺼내 건네주자 한립 무리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묘 영주, 흑치성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흑치성은 흑치역 중앙에 위치해 육익각마(六翼角馬) 세 마리가 전속력으로 날아가도 십여 년은 걸릴 겁니다.”
묘고의 대답에 마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십여 년…….’
한립은 내심 눈빛이 흔들렸다.
회계에 온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체내에 흉살기가 축적되어 선규 안의 흉살기가 폭주했다.
만일 아무런 대책도 없이 십여 년이 더 흐르면 그동안 몇 번은 더 발작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자, 선박에 오르시지요.”
묘고는 마광에게 먼저 오를 것을 권했고, 세 명이 먼저 오른 후에 그도 선박에 올라탔다.
선박에 올라타자 묘수가 그들에게 거처를 안배해 주었다. 한립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금제를 펼치고 해 도인을 불러냈다.
“해 수사, 수고스럽겠지만 여기서 저를 지켜주셔야겠습니다.”
한립은 그에게 말하는 동시에 손가락을 움직여 은백색의 빛의 문을 만들어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해 도인을 보고 한립이 미미하게 고개를 숙이고 화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 * *
화지 공간에서는 바깥 세계의 흉살기와 접촉할 필요가 없어 흉살기 발작을 미룰 수 있었다.
누각 1층 밀실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손바닥을 펼쳐 숙살단 재료들을 수북하게 꺼내놓았다.
다른 재료들은 진작 모아 두었고 이번에 우연히 주재료인 현지정석과 고락화까지 찾으면서 연단 준비는 끝났다.
한립은 흑치역 지도를 꺼내 유화성과 흑치성 사이의 경로를 눈으로 훑고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 * *
반년 후.
어둠이 내려앉은 깊은 밤, 한립은 화지 공간을 빠져나왔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해 도인은 그를 보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 수사, 계속 자리를 지키다 누군가 다가오면 알려주시지요.”
한립은 해 도인을 향해 재빨리 말하고는 수결을 맺어 흐릿하게 변했다. 그러자 방 안의 금제가 갈라져 검은 그림자가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했다.
갑판에는 선박을 조종하는 회색 의복을 입은 사내만 있을 뿐 돌아다니는 이들은 없었다.
“…….”
한립은 힐끗 회색 장포 사내를 보다 선박 바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선박을 둘러싼 검은 금제는 흐릿한 그의 그림자가 부딪치는 순간 안개로 흩어졌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변했다.
광활한 평원에 내려선 한립은 지도를 꺼내 의식을 퍼트렸다.
반 시진 만에 도착한 습지에는 검은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검은 진흙에, 회백색 안개 그리고 이 냄새까지…….”
그는 안개를 타고 전해지는 유황 냄새를 맡고는 이곳이 고락화가 핀다는 무저소택이라고 확신했다.
유화성에서 흑치성으로 가는 길에 무저저택 옆을 지나 고락화를 취하러 온 것이다. 한 번 연단을 시작하면 2, 3년은 걸리기에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습지 인근으로 다가간 그는 짙은 흉살기와 냉랭한 기운을 느끼고 어느 볼록하게 튀어나온 땅에 내려섰다.
흙더미 인근에서 자라고 있는 얼음 조각 같은 이파리가 달린 반투명한 식물은 고락화였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푸른빛을 날려 고락화 세 뿌리를 채취하려는데 느닷없이 검은 그림자가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으려 했다.
펑!
그의 발끝에서 빠져나온 푸른빛이 방패로 변해 검은 그림자를 튕겨냈다.
이어서 쉭! 푸른 검기가 날아올라 검은 그림자를 두 동강 내버렸다. 머리에 혹이 난 새까만 뱀이 몸이 둘로 쪼개졌는데도 죽지 않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고락화를 챙겨 날아올랐다.
반각이 걸리지 않아 움푹한 저지대에서 다시 고락화 두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반나절이 지나고 날이 밝아올 때 한립은 즐거운 얼굴로 언덕에서 날아올랐다.
밤사이 고락화 백여 뿌리를 채취한 것이다. 연단하고 남은 것은 선계로 가져가면 부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고락화가 많이 남아 있어 아쉬웠지만 이제 날이 밝았으니 돌아가야 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어 피로한 기색을 감추고 번개처럼 날아올랐다.
‘윽!’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머릿속에서 쿵! 하는 진동을 느낀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멈춰서야 했다.
구역질이 일 것 같은 느낌에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온몸의 피가 역류해 심장으로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안색이 급변한 한립은 서둘러 운공을 해 몸의 기운을 다스리면서 주위 환경을 살폈다.
순식간에 구역질이 가라앉고 기혈도 정상으로 돌아와 모든 것이 환각이었던 것만 같았다.
얼굴을 굳힌 그는 의식을 퍼트려 주변을 샅샅이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없어 천천히 출발했다.
다시 일정 거리를 이동하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요동치는 기혈을 억누르면서 시선과 의식으로 전방의 지하를 탐색해 빠르게 어느 연못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혈을 역행하게 만들고 오장육부를 비트는 힘의 출처는 바로 연못이었다.
그는 연못 주위를 빙 둘러보고는 그 괴이한 힘이 주변 2, 30리까지만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벗어나면 불편한 느낌도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퐁!
무척 의아한 일이라 한립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연못은 그리 깊지 않아 금방 바닥에 이를 수 있었고 나름 평평한 지면에 크기가 제각각인 검은 돌들이 굴러다니는 것이 보였다.
얼음이 갈라지듯 문양이 들어간 돌멩이는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한립은 돌멩이들을 보고 눈가를 꿈틀했다.
연못에서 발산되는 강렬한 기운은 검은 돌멩이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돌연 그의 발끝이 움직이고 푸른빛이 초승달처럼 날아올라 검은 돌멩이들을 날려버렸다.
“저건!”
돌멩이 밑에는 검은색 장도가 비스듬하게 꽂혀 있었다.
불에 탄 나무토막처럼 생긴 새까만 장검의 날에는 흉악하게 생긴 머리 둘 달린 여우가 조각되어 있었다.
손잡이에서 시작된 암홍색 문양은 커다란 칼날의 끝까지 이어져 있는 듯했다.
장검이 발산하는 괴이한 기운은 주변 돌멩이들보다 훨씬 강해서, 한립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한 걸음 물러났다가 요란한 금빛을 방출해 안색을 되찾았다.
회계로 와서 본 물건들은 대부분 검은색, 흰색, 회색 등 무채색이었다. 이 오래되어 보이는 장검의 암홍색 무늬는 회계에서는 처음 보는 색이었다.
지긋이 검은 장도를 바라보던 한립은 의식의 힘을 퍼트렸다. 의식은 검에 도달하는 순간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서늘한 힘에 잡아먹혔다.
얼굴이 창백해진 한립은 생살을 베어낸 듯 머릿속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뿐만 아니라 장도가 검은빛을 발하고, 일그러진 얼굴들이 연달아 나타나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사악한 힘이 한립의 의식세계로 침투했다.
맑고 깨끗하던 그의 의식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어둑하게 변하고 검은 빛줄기들이 혼백을 물들이려 몰려들었다.
구역질이 올라오고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아 오감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윽…….”
한립은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 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시간법칙의 힘을 방출해 앞을 막았다. 강렬한 시간법칙의 힘이 사악한 힘의 침투를 막고 나서야 의식의 힘과 혼백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연못 가장자리에 멈춰선 한립은 사악한 기운과 포효소리가 서서히 검은 장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의식의 힘을 잡아먹고 혼백을 공격한단 말인가…….”
간담이 서늘해진 한립이 중얼거리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웅!
검은 장도에서 하얀빛이 빠져나와 머리 둘 달린 여우 문양을 밝히다 장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시간법칙의 힘! 회계에서 법칙의 힘을 깨우친 이가 있었단 말인가.”
장도의 검은 빛은 물러나고 싶지 않다는 듯 버티다가 결국에는 하얀 빛에 억눌려 장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머리 둘 달린 여우 조각 위로 하얀 인영이 흐릿하게 떠올라 중년 사내의 모습을 하고 한립을 신기하다는 듯 훑었다.
하얀 장포를 입고 머리를 산발한 모습은 꾀죄죄해 보였으나 생김새는 영준했다.
한립은 백포 사내의 허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딘가 익숙했지만 어디서 비슷한 사람을 보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아, 그랬구만 그랬어! 선계에서 온 인족 수사라. 어린 녀석이 담도 크구나? 얌전히 진선계에나 머물 것이지 회계까지 오고 말이야.”
백포 사내는 단숨에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웃으며 말을 붙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자신의 완벽한 위장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보통 존재는 아니었다.
검은 장도에서 빠져나왔으나 그에게 아직 악의를 보이지 않았고, 검은 장도의 사악한 기운이 약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상대할 자신은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좋은 질문이야……. 그냥 석경후라 부르거라.”
장포를 털며 웃음 짓는 중년인은 비가 갠 하늘의 맑은 달처럼 청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석경후……. 당신은 이 장도의 기령(器靈)이십니까?”
“기령?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일순 석경후의 눈빛에 노기가 어렸으나 빠르게 사라졌다. 한립은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넌 내게 벌써 두 번이나 질문하고 답을 들었다. 진선계에서 왔으면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도리는 알고 있겠지? 이제 내가 물을 차례다.”
한립이 입을 열려는 것을 보고 석경후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맞는 말씀입니다. 말씀하시지요.”
“내 질문도 너와 같다. 넌 누구냐?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것이지?”
눈빛이 날카로워진 석경후의 몸에서 만황 짐승과 같은 위압감이 터져 나왔다.
장검의 검은 빛 속에서 머리 둘 달린 여우 요수가 당장이라도 그를 찢어발기려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려한이라 합니다. 회계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으로, 선계에서 비경을 수색하다 공간 소용돌이에 휘말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무시무시한 위세에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그 말에 석경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반짝였다. 그의 말을 믿어도 될지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네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음승전이 보낸 녀석은 아닌 듯하구나. 그렇다면 내 적은 아니란 말이지.”
손을 내저은 그의 주변에서 위압감이 사라지고 검은 장도의 예리한 빛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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