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화. 세살지(洗煞池)
*
방으로 돌아온 한립은 마광이 나가고도 한참을 앉아 고민을 거듭했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천공이 이상 현상이 끝난 것을 보고 찾아온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려 수사, 며칠 동안 흉살기 때문에 바깥에 나서지 못한 것을 압니다. 그동안 묘수가 두 번이나 다녀가 대충 둘러대고 보냈는데 의심할까 걱정이군요.”
석천공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묘수가 와서 뭐라던가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며칠 뒤에 흑치역을 떠나야 하는데 그 전에 장고, 그러니까 마광 수사를 한 번 만나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곳의 흉살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무슨 일인지 살피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내일 다시 찾아오면 만나주면 그만입니다. 허합족 인물인 마광 수사가 있는데 그들이 딴마음을 품지는 못할 거예요. 석 수사, 다른 용건이 있으십니까?”
한립은 대답을 듣고도 석천공이 떠날 생각이 없자 먼저 물었다.
“사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런 말을 꺼내도 될지 모르겠군요.”
“말씀해 보시지요.”
“제게 주셨던 숙살단을 한 알만 더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최근 흉살기 침식이 심해서 선령력을 막대하게 소모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러다 혼백에도 영향이 갈까 심히 걱정됩니다.”
석천공은 미안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것이 참 문제입니다…….”
“아주 귀한 물건임을 잘 압니다. 원하는 가격을 말씀하시면 제가 꼭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휴, 제 뜻을 오해하셨군요. 드리고 싶어도 남아 있던 두 알 중 하나를 수사를 구하느라 썼고 나머지 한 알을 며칠 전 흉살기 발작을 억누르느라 써버렸습니다. 제게도 이제 숙살단은 없습니다.”
“혹시 다시 제련하거나, 아니면 비슷한 단약을 구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한립의 탄식 어린 소리에 석천공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비슷한 단약은 없고, 숙살단 재료는 있어서 안 그래도 제련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서둘러야겠군요.”
“제련을 마치면 꼭 제게도 몇 개는 파셔야 합니다. 가격은 상관없고요. 어차피 회계에서 수사에게 이런저런 마음의 빚을 졌으니, 이왕 왕창 진 다음에 선계로 돌아가 배로 갚겠습니다!”
“안심하세요. 어차피 한 길을 가게 되었으니 당연히 수사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을 겁니다.”
좋아하는 석천공을 보고 한립도 미소 지었다.
* * *
어둠이 드리우고 창밖의 흉살기가 가득 퍼졌다.
“…….”
천천히 눈을 뜬 한립은 기운을 감추고 방을 빠져나와 연달아 여러 궁전을 지나쳐 어디론가로 향했다.
아예 유화성을 빠져나온 그는 검은 물이 흐르는 어느 강가에 서서 뒷짐을 지고 섰다.
얼마 후, 검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새까만 화염으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백리 도주,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화염 속에 나타난 수사를 보고 한립이 느긋이 인사를 건넸다.
“정체가 무엇이기에 비밀리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연락한 거지?”
“긴장할 것 없습니다. 저희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몇 번 마주친 적은 있는 사이 아닙니까.”
한립은 더는 용모와 기운을 가리지 않고 백리염을 쳐다보았다.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그를 자세히 살피던 백리염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려 수사, 수사가 어찌……. 아니, 어떻게 여기에?”
“어느 유적을 조사하다가 공간 소용돌이에 휘말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백리 도주께서는 어쩌다 회계로 오신 겁니까?”
한립이 다시 기운을 감추고 쓴웃음을 지었다.
백리염과 호언 도인의 친밀한 관계로 보아 상대가 그를 금방 알아보리라 예상했었다.
“허허, 수사와 달리 정상적인 방법으로 윤회전을 통해 넘어왔네.”
“윤회전을 통해서요? 윤회전과 윤회역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진작 윤회전과 같은 윤회역의 존재를 의심스럽게 여기던 한립이었다.
“윤회전은 선계 세력이고 윤회역은 회계 세력이지만 둘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네. 바로 윤회전 전주와 윤회역 역주가 동일인이라는 것이지. 이제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한립이 깜짝 놀라서 말이 없자 백리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피치 못할 사정으로 회계로 왔다는 뜻이구만. 낯선 세계에 이렇듯 잘 적응하다니 역시 호언 수사가 찬사를 아끼지 않을만한 재목이야.”
“그저 운이 좋아 지금까지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 결코 회계에 오래 머물 수는 없을 것일세. 흉살기 침식을 오래 받게 되면 몸에 무리가 가서 분명 앞으로 수행을 쌓는데 큰 화가 될 것이고, 아예 회선이 되든지 아니면 처참한 꼴이 나던지 하겠지.”
“저도 돌아가고 싶으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흉살기가 횡행하는 이런 낯선 세계에 오래 머물고 싶겠습니까.”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선역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윤회전의 중요한 비밀이라 외부인에게 알려줄 수 없음이야. 허나 명한선부에서 태을단을 구할 때 수사의 공이 컸다고 들었네. 그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으니 이걸 받아두게.”
고민하던 백리염은 동그란 영패를 꺼내 내주었다.
“이건…….”
한립은 바로 그것을 받아 들지 않았다.
“내 윤회령(輪回令)일세. 이걸 가지고 윤회역으로 가서 영주급이 머무는 거대성에 이르면 어느 곳이든 윤회분전이 있을 것이야. 그곳으로 가면 어떻게 선역으로 돌아갈지 알려줄 것이네. 물론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자네에게 달렸고.”
“이렇게 귀한 물건은 백리 도주께서도 하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게 이걸 줘버리시면 백리 도주는 어찌 선계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한립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영패에 한 면에는 윤회전 다른 면에는 육도(六道)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돌려주려 했다.
“내 업화가 몸으로 돌아와 육신은 진작 흉살기 침식에 크게 상했고 겨우 태을단을 이용해 위태을경의 경지에 이른 것을 수사도 알 걸세. 원래 회계로 온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인데, 해결이 안 되면 회계를 떠날 생각도 없다네.”
백리염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태을경……. 업화와 흉살기는 근본적으로 비슷한 성질을 지녔다고 알고 있습니다. 흉살기가 충만한 회계에서 업화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셨다고요?”
“천지조화의 기이함을 어찌 따라가겠는가. 흉살기가 만연한 회계에 있는 세 살지(洗煞池)는 극한의 양기를 지닌 완골금괴(浣骨金雷)를 지녀서 어떤 음산한 기운과 흉살기도 없앨 수 있다더군. 세살지에 몸을 담가 흉살기를 모조리 씻어내면 몸과 의식을 단련해 그 이로움이 무궁무진할 것이야.”
“회계에 그런 것이 있단 말입니까? 백리 도주께서는 그 위치를 아시는지요?”
뜻밖의 희소식에 한립이 급히 물었다.
“세살지는 아주 희귀해서 나도 한 곳밖에는 알아내지 못했네. 구유역(九幽域) 관할에 각 종족이 봉인해놓은 성지라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지. 그런데 세살지에 관심이 있는 것인가?”
“백리 도주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지금 저도 살쇠의 겁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말에 백리염은 한참 그를 살폈는데, 특히 두 눈을 오래도록 주시했다.
“한 수사, 자네의 살쇠 발작은 내 업화와는 달리 아직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군. 그렇다면 내 말은 잊고 서둘러 선계로 돌아가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을 권하겠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백리염의 충고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구유역은 회계의 3대 세력 중 가장 침입하기 어려운 곳일세. 다른 종족들이 자신들의 구역을 침범하는 것을 엄격히 금해왔는데, 선계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나. 자네가 구유역에 들어갔다 발각된다면 살아서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야.”
백리염은 천천히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일전에도 회계의 3대 세력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만 아직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회계에서 윤회전 전주가 통솔하는 계역들은 회계가 힘을 모아 선역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네. 그리고 구유역 역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계역들은 선계에서 끊임없이 회계에 침투하는 원인이 윤회역의 농간 때문이라 생각하지. 그래서 선역과 교류하지 않고 회계 내부를 정돈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마지막 제3세력이 바로 흑승역(黑繩域) 역주를 위주로 하는 계역들로 그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며 선계를 공격하거나 내분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그렇게 세력이 나뉘는 것이었군요. 같은 회계인데 어째서 선계에 대해 견해가 다른 것입니까?”
“각 세력의 부족들이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지. 윤회역의 다수를 이루는 삼시회선(三尸灰仙)들은 선계에 집착해서 꼭 선계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네. 구유역은 본토 회선들을 위주로 하기에 회계 본토를 굳건히 지키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고, 흑승역은 윤회역은 믿음이 가지 않고 구유역의 횡포에는 반감이 있어 입장이 확고하지 못한 편이네.”
“그런데 수사께서 말씀하시는 삼시회선은 무엇입니까?”
“려 수사는 모르겠네만, 선계 사람들은 대라경에 이르러 도조에 이르기 전에 시혼(尸魂)을 세 번 베어내야 한다네. 속세의 인연과 원한, 집념을 끊어내는 일인데, 이때 베어내야 할 것들을 삼시(三尸)라 부르지.
대라경 수사가 대도를 추구하며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집념인 삼시는 베어내는 순간, 본체의 숙적이 된다네. 이런 삼시들이 다양한 이유로 회계로 흘러들어 삼시선이 되는 것일세.”
백리염의 설명에도 한립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에 다시 물으려는데 백리염이 먼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삼시에 관한 것은 대라경 수사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비밀 중 하나일세. 난 대라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당연히 알고 있는 바가 적고. 더는 물어도 답해줄 말이 없네.”
“어쨌든 구유역은 제가 갈 만한 곳이 아니란 말씀이군요?”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때였으면 구유역으로 숨어들 수도 없었을 걸세. 지금이라면 기회는 있겠으나 세살지를 찾을 확률은 아주 낮고 세살지 안에서 살아남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보면 되네.”
“전 아주 특수한 살쇠를 겪고 있어 지금까지 수많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세살지가 마지막 남은 방법이라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군요. 어떻게 들어가면 될지 알려주신다면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한립은 진지한 얼굴로 백리염에게 공수를 했다. 그러나 백리염은 고민스러운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아, 어쩔 수 없구만. 이 일은 여러 가지 비사와 연관되어 있어 아무에게나 발설할 수 없지만, 자네에게 입은 은혜가 있고 천정쪽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으니 말해주겠네.
내가 이번에 유화성을 찾은 것은 윤회역을 대표해 흑치역을 우리 쪽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더 나아가 ‘삼역회맹(三域會盟)’에서 우리에게 한 표를 던지게 하기 위함이네. 그리고 삼역회맹이 열리는 곳이 바로 구유역의 수라성이고.”
“회맹을 구실로 구유역에 들어갈 수 있을 거란 뜻이군요. 그렇다면 저도 백리 수사를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한숨을 길게 내쉰 백리염의 말에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삼역회맹은 회계 주류가 선계를 어찌 대할지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자리일세. 난 흑치역과 같은 흑승역 관할의 중립세력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윤회역에게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야 할 사명을 갖고 움직이고 있고. 게다가 자네는 진정한 윤회전 사람도 아니기에 데리고 가줄 수 없네.”
“맞는 말씀입니다. 수사께서 저를 데려가 주시는 것은 어렵겠군요. 그렇다면 흑치역도 분명 회맹에 참석할 것이니 묘고 영주를 따라 구유역으로 가야겠습니다.”
“정말인가? 이번 회맹은 구유역으로 침입 가능한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수비가 삼엄해서 상상 이상의 위험이 따를 것일세.”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립은 마음을 놓지 못하는 백리염을 보고 미소 지었다.
“호언 수사의 안목은 독특한 면이 있지. 그렇다면 자네를 높이 평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우리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백리염도 더는 말리지 않고 빙긋 웃어 보였다.
“지금의 호언 수사는 사는 게 아주 즐거워 보였습니다. 종문을 떠나기 전에 술 빚는 법이나마 배워두어 다행이지요. 제게 괜찮은 술이 몇 동이 있는데 한 모금 하시겠습니까?”
“한 모금으로 되겠나? 열 동이를 가져다 놓고 마셔도 모자랄 판인데, 하하…….”
백리염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해가 뜨고 다음 날이 되고서야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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