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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52화 (1,609/2,000)
  • 1852화. 만남

    *

    한립은 해 도인에게 동천 내부의 상황을 물어 도병이 곧 다 자랄 것 같고 양생수는 영액을 부어주어도 아직 살아날 기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염불새도 여전히 붉은 문양이 있는 은색 구슬 속에서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크게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칠채화단사 중 한 알을 먹었으니 십여 년을 잠들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담을 나누던 해 도인은 오래 머물지 않고 곧 화지동천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남은 술동이를 홀로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때 방에 앉아 있던 마광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려 수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달칵 방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한립은 대충 손짓해서 금제를 펼쳤다.

    “제가 올 것을 알고 계셨나 봅니다.”

    마광의 방은 그가 머무는 곳보다 더 넓고 고급스러운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은 불꽃 문양을 지닌 새까만 과실도 독특했고 말이다.

    “처음 와보는 곳에서 제가 이상한 행동을 할까 걱정하실 거라 여겼습니다. 무엇이든 하실 말씀이 있으면 가르침을 주시지요.”

    마광은 과일 하나를 들고 깨물며 웃음 지었다. 흑자색 과즙에서 정순한 검은 흉살기가 풀풀 날렸다.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셨을 마광 수사에게 따로 당부할 것은 없습니다. 그보다 다른 용건이 있어 찾아온 길입니다.”

    “오, 무슨 일이십니까?”

    “죽루의 회선 시체를 보셨을 겁니다. 이 백골 고리는 그 자에게서 얻은 것인데 회선만 사용할 수 있는지 선령력으로 연화시키려 해도 안 되더군요. 물론 흉살기를 동원해 발동해 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고요.”

    한립은 백골 팔찌를 마광에게 던져주었다.

    “저물법기는 확실합니다.”

    마광은 히죽 웃으며 입안에 든 과육을 꿀꺽 삼키고 손바닥에서 흉살기를 일으켜 팔찌를 연화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백골 팔찌를 휘둘러 잿빛에 휩싸인 물건들을 바닥에 가득 쌓아 놓았다.

    회선이 쓰는 칼들과 회계의 재료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한립은 회정만 대부분 거두고 나머지는 건들지 않았다.

    “이것들은…….”

    “나머지는 마광 수사께서 가져다 쓰시면 되겠습니다. 허합족 고계 수사가 저물법기 하나 없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인사를 하고 금제를 나섰다. 혼자 남은 마광은 한동안 조용히 있다 중얼거렸다.

    “천마 계약에 백골 팔찌라……. 아주 당근과 채찍을 잘 쓰십니다, 한 수사.”

    * * *

    3년 뒤.

    먹구름 속을 가로지르던 갑마루선이 드디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유화성에 도착한 것이다.

    한립 일행은 삼묘족 족인들과 같이 갑판에 서서 끝없는 평원을 내려다보았다. 십여 개의 검은 강물이 흐르고 크고 작은 회백색의 원형 탑이 모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탑들이 모인 거대한 광장에 선박이 내려섰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먼저 저와 같이 아버지를 뵈신 후에 마련된 거처로 가심이 어떠실지요?”

    묘수가 앞장서서 안내하며 마광의 의사를 물었다.

    “손님이 주인의 안배대로 하는 것은 당연지사지. 묘 낭자의 말대로 하겠네.”

    마광이 잘생긴 얼굴로 미소를 머금었고, 한립과 석천공은 가신의 본분을 다하듯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광장과 화려하게 치장된 통로를 연달아 지나고 십여 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형 궁전 앞에 이르렀다.

    회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반갑게 달려 나와 묘수를 향해 깊이 예를 올렸다.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아저씨, 아버지께서는 안에 계시지요?”

    묘수도 웃으며 인사를 했다. 노인은 그녀가 데려온 한립 일행을 살피다 대전을 가리켰다.

    “묘영궁(苗英宮)에 손님이 계셔서 당장은 아가씨를 뵙지 못하실 듯합니다.”

    “그런 가요……. 이분들은 허합족에서 오신 분들이고, 제 목숨을 구해주시기도 했습니다. 혹시 먼저 시간을 내주실 수 있는지 여쭤봐 주시겠어요?”

    “허합족에서 오신 귀빈이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묘수가 망설이다 하는 말에 회포 노인이 깜짝 놀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노인은 서둘러 뛰어나오며 묘수를 향해 안으로 들어와도 된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말에 묘수가 희색을 드러내고 한립 일행을 데리고 들어가려는데 먼저 대문이 열리고, 삼묘족 족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몸을 꼿꼿하게 세운 엄숙하게 생긴 중년 사내를 모시고 걸어 나왔다.

    굉장한 흉살기를 지닌 중년인은 검처럼 쭉 뻗은 눈썹에 호랑이처럼 위엄 있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저 사람은!’

    한립은 얼핏 상대를 보고 흠칫 놀랐다.

    검은 장포를 입고 머리카락이 먹색인 그는 촉룡도 제1도주 백리염이 확실했다. 명한선부에서 태을단을 취할 때 잠깐 보고 아무런 교류가 없다가 회계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한립이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백리염이 그 옆을 지나갔다. 상대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가 떠나고 회색 장포 노인이 직접 문을 열어줘 한립 일행도 대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전 상석에는 눈이 별처럼 빛나고 묘수와 눈매가 닮은 흑치역 영주 묘고가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는 검은 깃털 장포를 걸친 나이가 지긋한 남녀가 묘수를 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묘수가 아버님과 집안 어른들을 뵙니다.”

    묘수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허합족 장고가 묘고 영주를 뵙습니다.”

    “묘고 영주를 뵙습니다.”

    마광도 앞으로 나서서 한 손으로 가슴을 가로질러 주먹으로 자신의 반대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고 한립과 석천공도 허리를 숙였다.

    진작 의자에서 일어난 묘고도 자신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려 예를 갖추고 입을 열었다.

    “회정요(灰睛????)가 돌아와 전한 소식으로 파릉호에서 있었던 일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장 형의 도움으로 흑치역 족인들과 딸아이 묘수가 무사할 수 있었어요. 흑치역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은혜를 모르는 곳은 아닙니다. 약소하지만 정성스럽게 준비했으니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묘고 옆에 있던 백발노인이 계단을 내려가 백골 반지를 전해 주었다.

    “하하하, 사양은요! 감사히 받아두겠습니다.”

    마광은 스스럼없이 물건을 받아 챙겼다.

    “소호역에서 이 먼 곳까지 찾아주신 이유가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움이 되는 한에서는 힘껏 돕겠습니다.”

    “……가신들과 유람을 나왔다가, 강력한 짐승을 쫓다 유월초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회석족을 만나 들으니 곧 탑목달 대회라기에 구경이나 할 겸 따라가게 되었고요.”

    잠시 침묵하던 마광이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이게 다 장 형과 저의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짐승을 쫓아 여기까지 오셨는지 직접 볼 수 있겠습니까?”

    “벌써 멀리 달아나 버려서 그건 안 되겠습니다. 안 그랬으면 심심풀이 삼아 회석족을 쫓아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지요.”

    “하하, 어차피 유람 중이셨으면 저희 유화성에서 잠시 머물며 피로를 푸시지요. 제가 잘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럴까요?”

    마광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묘고가 묘수를 시켜 거처를 마련하게 했다.

    묘수의 안내에 따라 대전 뒤편의 건물로 갔는데 도처에 기이한 꽃이 만발해 있고, 꽃송이 안에서는 흉살기가 잔뜩 품어져 나와 건물 내부로 흘러 들어갔다.

    회계에서는 흉살기가 짙은 곳이 명당일 테니 귀빈을 이리로 안내한 것도 당연했다.

    “저희 삼묘족에서 특별한 손님들을 위해서 마련한 궁전입니다. 편히 쉬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네.”

    묘수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고 마광도 빙긋 웃어주었다. 그녀가 떠나고 석천공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마광은 한립을 따라갔다.

    방문을 닫자 한립이 돌연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한 수사, 왜 그러십니까!”

    얼굴을 굳힌 마광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고 한립은 두 눈에서 회색빛을 일렁이며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선규 안의 흉살기가 어쩐 일인지 폭동을 일으켜서 새까만 흉살기들이 정신없이 흘러나와 주변을 어둡게 물들였다.

    ‘흉살기가 다시 발작을 일으키기라도 한 것인가? 하필 이런 때에…….’

    골치 아팠지만 광음의 실로 살쇠를 미룬 지 수백 년이 지났으니 그럴 때가 되기도 했다.

    그 시각,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던 묘수가 아리따운 얼굴을 돌려 방금 떠나온 궁전 쪽을 살폈다.

    “이렇게 강한 흉살기 파동이라니, 태어날 때부터 대단한 자질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허합족 인물답구나.”

    눈을 반짝인 묘수는 허합족 고인이 수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다.

    방 안에 앉아 은색 비파를 띄워놓고 제련하던 석천공도 눈을 번쩍 떴다가 한립이 들어간 방향인 것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 * *

    한립의 방 안에 금빛이 번쩍이고 해 도인이 나타났다.

    “마광 수사, 해 도인, 두 분께서 호법을 서주셔야겠습니다.”

    가부좌를 튼 한립의 몸에서 시간법칙이 벌떼처럼 흘러나왔다. 시선을 마주친 마광과 해 도인은 각자 방의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이런!’

    시간공법을 운용해 선규를 덮으려던 한립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흉살기 발작이 이전과는 무언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살쇠 때문에 흉살기가 발작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 설마…….”

    한립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살쇠로 인한 발작이면 어떻게든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선령력과 시간법칙의 힘으로 흉살기를 제압하려 해도 선규 안의 흉살기들이 무슨 자극을 받은 것인지 더욱 맹렬히 반항했다.

    그의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고 더욱 고약하고 짙은 흉살기가 온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주변의 흉살기들이 선규 속 흉살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까지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혀끝을 깨물어 흐릿해져가는 의식을 깨워 은색의 문을 불러냈다.

    팟-!

    화지동천 안으로 몸을 날린 그는 선규 안의 흉살기가 더는 늘어나지 않자 안심하며 다시 가부좌를 틀고 숙살단을 입에 넣었다.

    단약은 빠르게 녹아 뜨겁고 차가운 방대한 기운이 교차하면서 온몸을 돌아다녔다. 전신의 구멍에서 검은 흉살기가 빠져나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해. 언제 이렇게 많은 흉살기가 또 쌓인 것이지? 설마 회계로 온 뒤 장시간 흉살기에 둘러싸여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눈빛이 흔들리던 한립은 잡생각을 털어 버리고 약을 받아들이는 데만 집중했다.

    그때 그의 등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마광으로 변했다.

    그는 주문을 외며 두 손을 뻗어 손바닥에서 항아리 굵기의 검은 빛기둥을 뿜었다.

    빛기둥의 문양이 꿈틀거리고 호랑이와 사자를 절반씩 닮은 거대한 허상이 나타나 한립이 내뿜은 흉살기를 빨아들였다.

    덕분에 한립의 몸에서 흉살기가 빠져나가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7, 8일이 흘러가고 한립 주변의 검은 기운들도 드디어 전부 사라졌다.

    천천히 눈을 뜬 한립은 맑은 눈을 하고 있었고 마광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결을 맺어 검은 빛기둥을 흩어버리고 있었다.

    안정은 찾았지만 선규 안의 흉살기가 또 늘어난 것에 한립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흉살기가 늘어나면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마광 수사, 이번에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립이 뒤를 돌아보고 감사를 표했다.

    “에이, 이 정도로 뭘요.”

    “수사는 회선의 몸을 융합했으니 흉살기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졌을 겁니다. 요 며칠 제게 일어난 일을 보고 무언가 발견하신 것은 없습니까?”

    “저를 똑똑하게 봐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회선 육체를 지녔다고 하루아침에 흉살기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걸리는 부분은 있더군요.”

    마광이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뗐다.

    “무엇입니까?”

    “회계에 있으니 수시로 외부의 흉살기와 접촉할 수밖에 없는데, 안 그래도 살쇠를 겪고 있어 몸 안에 흉살기가 충만한 상태이지 않습니까? 수사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체내에 흉살기가 응축되어 발작을 일으킨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사의 생각도 저와 같군요.”

    “체내의 다른 흉살기들은 숙살단으로 처리되겠으나, 선규에 쌓인 흉살기는 제가 도와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이대로 억누르기만 해서는 다음번 발작 때 해결을 하기가 어려워질 거예요.”

    “하루빨리 진선계로 돌아가든 이곳에서 살쇠를 이겨내든 빨리 해결을 보기는 해야겠습니다.”

    정색하고 충고하는 마광을 보고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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