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화.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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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도 ‘허합족’이란 세 글자를 듣고 눈을 반짝였다. 그간 수집한 정보에서 허합족이란 이름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상세한 설명 없이 어렴풋이 묘사되는 허합족은 회계 전체 종족 중에서 극히 높은 지위의 귀족이나 다름없었다.
한립은 허합족이 소호역(少昊域)을 다스리며 윤회역 쪽에 속한 세력으로 니자타역 같은 회계 본토 세력과는 적대 관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청원족 사내는 너무 놀란 나머지 군을 물릴 생각도 하지 못했고, 탑 아래에서는 여전히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다.
“마광 수사, 저들을 멈춰주시지요.”
회석족들도 곧 위험에 처할 듯하자 한립이 전음을 보냈다.
그 말에 마광이 고개를 돌려 한립 쪽을 쳐다보았고 다른 이들도 그의 시선을 따라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탑 아래를 살폈다.
그러나 한립은 더욱 숨을 죽이고 더 철저히 혼절한 척해야 했다.
다행히 마광은 그저 쳐다보기만 하고 검은 쥘부채를 거둔 다음 손가락의 관절을 풀며 청원족 사내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잘생긴 청년의 등장에 흑의 소녀는 희망으로 가득 찼지만 반대로 청원족 사내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이를 덜덜 떨고 있었다.
청원족 사내는 영주 대인에게 하사받은 보물을 발동해 위기를 모면하고 달아나려고 손에 죈 소라를 꽉 쥐고 있었다.
이때 그의 귓가에 악마의 속삭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뭐 하는 데 쓰려고 그러느냐?”
“크악!”
어느새 회색 안개로 둘러싸인 청년이 혼비백산해 비명을 내질렀다.
마광은 회색 안개로 변해 상대의 귀와 입 코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에 청원족 사내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낭아봉도 소라도 다 던져버리고 자신의 목을 쥐고 뒷걸음질 치다 쓰러졌다.
스스슷.
움직임이 없는 사내의 몸속에서 회색 안개가 흘러나와 다시 멋스러운 청년으로 변했다.
그 괴이한 광경에 묘수 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광은 허리를 굽혀 검은 소라를 집어 들고는 검은 흉살기로 천천히 연화를 시켰다.
잠시 후 그가 소라를 들고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파동이 흩어져 파릉호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켜 의식을 잃거나 쓰러져 있던 흑치역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립과 석천공도 그 틈을 타 몸을 일으켜 탑 쪽으로 향했다.
원숭이 사내가 참혹하게 죽은 것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목구가 파릉호 쪽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자골족 족장이 진작 몸을 일으켜 그의 앞을 막아섰다.
다른 쪽에서도 회색 피부에 귀가 뾰족한 여인과 묘괴가 좌우에서 그를 둘러싸고 다가오고 있었다.
“죽여라.”
묘수의 무감정한 명령에 세 사람은 거침없이 목구를 향해 살수를 날렸다.
“산귀족, 풍유족, 회렴족은 족인들을 수습해 반공을 가하고…….”
연달아 묘수의 명령이 떨어지고 흑치역 각 종족이 분분히 날아올라 탑을 중심으로 니자타역 대군을 공격했다.
통솔자를 잃은 니자타역 대군은 사기가 꺾였는데 흑치역 종족들은 복수심에 활활 타올라 금방 그들을 파릉호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마광은 딱 청원족 사내만 죽여 주고 한쪽으로 물러나 각 종족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면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한립과 석천공이 혼전에 끼지 않고 탑에 올라 마광 옆에 섰다.
“려 수사, 이분은…….”
석천공은 참고 또 참다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마광 수사라 부르시면 됩니다. 저와 계약을 맺은 맹우(盟友)인데 신분이 특수해 이전에는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한립은 아주 간략하게 마광을 소개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마광은 말없이 석천공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석천공은 복잡한 표정으로 예를 취했다.
“내가 알기로 허합족은 도소 가, 동릉 가, 장 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스스로는 장고라 칭하고 우리 둘은 수하라 소개하면 될 겁니다.”
한립은 마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는 석천공이라 합니다.”
석천공이 머뭇거리다 직접 이름을 밝히고 포권을 했다.
“이름이 장고가 뭐야. 곧 작고(作故)할 사람처럼 들리는구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마광이 작게 투덜거렸으나 한립은 미간만 좁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은 장포를 걸친 묘수가 다가오고 있어서였다.
“후배는 흑치역 삼묘족 족장의 딸 묘수라 합니다. 선배님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마광이 희희낙락하며 몸을 돌려 기탄없이 여인을 아래위로 훑고 입을 열려는데 한립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곳은 이계입니다. 말과 행동에 유의하세요.”
“하하, 누군가 했더니 삼묘족 소주였구만. 난 장고라 하고 이쪽은 일족의 가신인 려한과 석천공일세.”
멈칫한 마광은 자연스럽게 답했다. 한립과 석천공이 앞으로 나서 묘수에게 예를 취했다.
“선배님께서 나서주셔서 흑치역의 종족들이 니자타역 대군의 계략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연히 흑치역을 지나가던 중이라 괜한 일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네만, 그 원숭이 같은 놈이 너무 설쳐서 어쩔 수가 없었네.”
마광은 부채를 살살 부치면서 오만하게 답했다.
“니자타역이 습격을 감행한 것은 저희 흑치역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 부친께 이 일에 대해 고해야 할 것 같은데, 함께 돌아가 흑치역을 구해주신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묘수의 정중한 초청에 마광은 고민하는 척하며 속으로 한립의 의사를 물었다.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가야 할 목적지가 있는 곳도 아니니 반겨주는 곳으로 가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게 좋겠습니다.”
“기왕 묘 낭자가 진심을 다해 청하니 호의를 거절하기 어렵군. 다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으니 신분에 대해서는 함구해줘야 할 것이야.”
한립의 대답을 들은 마광이 위엄 있게 답했다.
“안심하십시오. 유화성(幽禾城)에 이르기 전까지 어떤 소문도 나지 않게 철저히 단속하고, 부친께 아뢰어 그분께도 비밀을 지켜달라 하겠습니다.”
묘수가 굉장히 기뻐하며 약속했다.
“알겠네.”
“그럼 저는 처리할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묘수가 떠난 뒤 탑 아래 선혈이 낭자한 참혹한 광경을 보고 마광은 흡족한 얼굴을 했다.
“려 수사, 회계 영주의 도성까지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선택 아닙니까?”
석천공이 묘수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걱정스레 말했다.
“마광 수사와 그의 허합족이라는 신분 때문이라도 삼묘족에서 우리를 자세히 조사하지는 못할 겁니다. 우리만 허점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면 될 겁니다.”
한립의 이야기를 들은 석천공은 더는 뭐라 하지 않았지만 걱정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았다.
* * *
며칠 뒤 묘수는 가까운 심복인 삼묘족 족인 몇 명만을 데리고 은밀히 회석족 막사를 방문해 한립 등 세 명을 유화성으로 청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한립 무리는 석암 등에게 떠난다는 것을 알리고 삼묘족 막사로 향했다.
상선들이 떠나는 것을 본 회석족 족장은 어쩔 수 없이 가라앉은 표정이었는데 묘괴가 갑자기 다가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석암은 황송해하며 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전에 범한 무례에 대해 양해를 구하겠네. 이번 대회를 무사히 치른 데는 회석족의 공로가 커서 아가씨께서 회정 2천 개를 상으로 내리셨네. 돌아가는 대로 영주 대인께 청해 수호족의 영토 중 일부도 회석족의 것이 될 것이야.”
그 말에 석암은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다가 애써 눈물을 참으며 엎드려 고마움을 표했다.
“석암 족장, 그럴 것 없네. 귀빈들께서 자네에 대해 많이 칭찬하셨고, 또 회석족 덕분에 흑치역이 귀한 인연을 맺었으니 상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감사합니다, 상선님들! 감사합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묘 존사…….”
묘괴가 말려도 석암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면서 인사를 했다.
한편 한립 일행은 묘수를 따라 호수에 정박해 있는 3층으로 된 새까만 선박에 오르고 있었다.
각층의 지붕이며 난간에 각종 장식과 문양이 들어가 있는 화려한 선박으로 갑판 앞쪽에 거목 크기의 거대한 짐승 세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뺨에 하얀 뼈가 튀어나오고 나선형의 작은 뿔이 솟은 말을 닮은 짐승은 등에 짙은 먹색 박쥐 날개 네 장이 붙어 있었다.
“이 갑마루선(甲馬樓船)은 구름 위를 달릴 수 있습니다. 속도가 선배님들의 비행법보만은 못해도 이동하는 동안 아주 안정적이니 3층에서 쉬시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묘수의 설명에 마광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으로 안내하며 묘수는 마광에게 살갑게 몇 마디를 걸었는데 한립과 석천공은 그의 좌우에 서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묘수가 대화를 나누면서 슬쩍 한립을 살피는 듯했으나 한립은 못 본 척 무시했다. 3층에 마련된 방으로 그들이 들어가자 묘수는 물러나 출발 명령을 내렸다.
히히힝!
날개 달린 세 마리의 말들은 네 발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박쥐 날개를 펼쳤다. 말들의 날개 아래로 하얀 기류가 일어 선박을 구름층 속으로 밀어 올렸다.
방에 앉은 한립은 창문을 통해 밖을 보았으나 새까만 흉살기가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 푸른 보호막을 펼쳐 흉살기의 침입을 막은 그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방 안에도 강렬한 영력 파동을 지닌 금제 진법 대신 간단한 진법을 펼쳐 두었다.
그가 자리를 잡으려는데 해 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사, 일전에 주고 가신 저물법기의 정리를 마쳤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한립은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 두 손가락에서 빛을 발하자 은색 빛의 문에서 해 도인이 빠져나왔다.
동그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한립은 백화양이라는 술을 한동이 꺼내놓았다.
시간이 난 김에 해 도인과 술 한 잔을 하며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저물법기에 들어있던 극품영석 15,317개, 선원석 58,313개, 중품 선원석 321개는 전부 이곳에 모아두었습니다.”
해 도인은 바로 하얀 저물탁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진언문 유적에서 찾은 진선 초기 혹은 금선 후기까지의 천정 병사와 진언문 제자들의 저물법기라 선원석이 많은 것이 당연했다.
한립은 급히 저물탁을 거두지 않고 백화양을 한 모금 하면서 해 도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에는 잡다한 진법 재료가 들어있습니다. 그중에서 일부는 가져다 약재밭 옆의 죽루 주변에 묻어두어 또 다른 진법의 눈이 될 수 있게 처리하였지만, 화지동천의 구조가 무척 복잡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여긴 선기와 법보들이 들어있는데, 2백 개의 선기 중 품계가 있는 것은 뇌전 속성의 장도 하나뿐이었습니다. 이건 한 수사께서 제게 빌려……. 아니, 팔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격은 수사께서 부르는 데로 갚겠습니다.”
해 도인은 검은 저물탁을 내려놓으며 그 안에서 얇은 검은 도를 꺼내놓았다. 복잡한 문양 속에 일곱 개의 보라색 구슬이 박힌 도는 8품 선기였다.
“이걸 빌려드리거나 팔지는 않을 겁니다.”
한립의 말에 해 도인이 순간 실망스러워하다 평온한 기색으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한립은 말을 끝맺지 않고 그의 손을 눌러 다시 칼을 쥐게 했다.
“장도는 그냥 그릴 것이니 무슨 연유 때문에 원하시는지는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
해 도인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다 회복하신 겁니까?”
“아직도 머릿속은 혼란스럽습니다. 말끔하게 정리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고요. 기억에 관해 묻는 거라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수사의 주인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요?”
“정말로 한 수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회복된 기억도 분명치 않아 확실한 답을 드릴 길이 없습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을 보고는 해 도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답을 들을 수 없는 문제로군요. 되었습니다. 장도는 갖고 가시지요.”
“도신에 새겨진 단소(斷霄)이라는 글자가 장도의 이름일 겁니다. 이전의 ‘참정(斬霆)’이라는 검과 문양이 비슷하면서도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고 품질도 높지요. 이런 귀한 보물을 주셨으니 그 마음을 잊지 않고 보답할 것입니다.”
머뭇거리다 장도를 거둔 해 도인의 말에 한립은 손을 내젓고 저물탁을 품에 넣었다. 그 후로 해 도인이 건넨 영초와 단약이 든 저물반지를 받았다.
부상을 치료하고 수행에 도움이 되는 단약은 물론 선계에서 구하기 힘든 진귀한 선초와 영약이 잔뜩인 데다 그가 모르는 정체불명의 영초들도 많았다.
또 재료 중에서는 주먹만 한 현지정석(玄芷晶石)이 열댓 개나 들어있어 그를 즐겁게 해주었다.
현지정석은 숙살단의 중요한 재료 중 하나로 탑목달 대회에서 대량의 고락화를 구하고도 이게 없어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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