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50화 (1,607/2,000)
  • 1850화. 내란(內亂)

    *

    시간이 지나 다시 반나절 후, 막사 안에 석천공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석 수사의 표정을 보니 선계로 돌아갈 방법이라도 찾으신 듯합니다.”

    기다리고 있던 한립이 고개를 들었다.

    “아……. 실은 회계의 값싼 재료들이 진선계에서는 귀한 것이라 그것들을 구하느라 다른 일은 잊고 말았습니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석천공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유월초원에서 방법을 찾지 못하면 다른 곳으로 가보면 될 일이지요. 하긴 석 수사와 같은 상인이라면 당연히 그런 쪽으로 신경을 쓰시겠지요.”

    “그러니 말입니다! 회계와 선계의 가격 차이가 열 배, 아니 백배까지 나니까 거래를 트면 어마어마한 부를 이루는 것도 순식간이겠습니다.”

    “회계와 선계의 물건을 거래하는 중계상이 되면 그럴 테지만, 진선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면 전부 헛된 꿈이 될 겁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돌아갈 방법을 찾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한립의 당부에 석천공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 달이 훨씬 지나 저녁 무렵.

    세 개의 태양이 아직 지지 않았는데 여섯 개의 달이 떠서 짙은 구름 속에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찰랑거리며 빛을 반사하는 파랑호 주위에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대량의 회화초(灰禾草)와 하얀 광석들이 쌓여 있었고 탑목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각 종족이 그 주변에 서 있었다.

    깨끗한 회색 장포로 갈아입은 석암 장로가 가슴에 회석족을 대표하는 원형 표지를 달고 하얀 화염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한립과 석천공은 회색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 뒤에 있었다.

    “지난번에만 해도 탑목달 대회에서 저희 회석족은 불을 밝힐 자격도 없었는데 두 분 덕분에 기회가 돌아왔습니다. 두 분께서 직접 나서시기를 원치 않으시니 이곳 막사 앞에서 ‘살야(撒耶)’ 대회를 구경하시지요.”

    “그러게. 우린 흑치역 사람이 아니라 함부로 신분을 노출하기 그렇군.”

    한립은 묘수라는 흑의 소녀의 안배일 거라 예상하면서 손을 저었다.

    멀리 호수 옆 거대한 검은 석탑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그 주위로 다양한 복색을 하고 기괴한 회계 생물들을 닮은 이들이 가득했다.

    ‘살야’ 대회는 탑목달처럼 흑치역의 본토 방언으로 대충 ‘용사와 격투’를 뜻하는 말이었다.

    흑치역의 일부 종족들이 족인들을 출전시켜 비무를 하는 대회였는데, 회석족처럼 마땅한 영토도 없이 떠도는 유목민족은 당연히 참가 자격이 없었다.

    잠시 후 세 번의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석암 족장이 앞으로 나서서 횃불을 장작더미에 가져다 대었다.

    화륵!

    불이 회화초로 옮겨 붙어 눈처럼 새하얀 화염이 타올랐다.

    곳곳에서 수십 개의 모닥불이 하얀빛을 발하자 먹구름 사이에 하얀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는 듯했다.

    회계에 온 뒤로 처음 보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한립이 별처럼 반짝이는 모닥불을 보고 있을 때 나지막이 흑치역 방언이 섞인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상고 시대의 전쟁가와 같은 황량함이 담긴 가락이었다.

    한참 후 노랫소리가 차차 줄어들고 종족들은 검은 탑을 향해 걸어갔다.

    한립과 석천공도 회석족을 따라 탑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 펼쳐진 거대한 막사 안에는 삼묘족의 장로들과 흑치역의 대형 부족 족장들이 앉아 있었다.

    그 정중앙에는 묘수라는 흑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아직도 회석족에 숨어 있는 고인(高人)을 신경 쓰시는 겁니까?”

    묘괴라 불린 키 큰 청년이 소녀의 시선을 따라 회석족 쪽을 보았다. 시선을 거둔 묘수는 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뵙자고 하셨는데도 얼굴을 보이지 않다니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입니다. 대회가 끝나는 즉시 잡아다 아가씨에게 사죄하게 만들고 말겠습니다.”

    “당형, 그런 말씀 마세요. 악의를 품은 것도 아니고 그저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는 것 같은데, 괜한 일을 만들어 인연을 악연으로 바꾸려 하지 마세요.”

    미간을 좁힌 소녀가 그를 말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소녀도 자신의 체면을 구겨 놓은 상대가 궁금하기는 했다.

    “아가씨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시간이 거의 된 것 같은데 살야 대회의 시작을 알리죠.”

    “예!”

    묘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를 나섰다.

    둥! 둥! 둥!

    그는 새까만 북을 세 번 울리고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입을 열었다.

    “살야 대회의 시작을 알린다. 어느 종족의 용사가 무대로 올라 도전을 받겠는가?”

    그의 말소리에 새까만 신영 두 개가 차례로 제단 위로 올랐다.

    “자골족(刺骨族) 오합리…….”

    먼저 도착한 이는 새까만 비늘 갑옷을 두르고 볼과 팔꿈치 그리고 무릎에 하얗고 뾰족한 뼈가 자라난 자였다.

    그의 소개가 끝나자 탑 아래에서 여러 종족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무대에 처음 오르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 틀림없었다.

    “수호족(水虎族) 목탁…….”

    다음으로 도착한 악어를 닮은 허리가 굽은 사내도 자신을 소개했다.

    뺨의 아가미가 흥분으로 연신 꿈틀거렸고 처음 도착한 사내에 비해 그의 소개에 뒤따르는 환호성은 훨씬 작았다.

    “좋다. 첫 번째 대결은 승패결로 가겠느냐 아니면 생사결로 가겠느냐?”

    두 사람을 본 묘괴가 웃으며 물었다.

    “비무라고 하더니 어째서 생사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

    듣고 있던 한립이 석암에게 물었다.

    “살야 대회는 각 종족이 초원의 자원을 분배하고 청년들이 실력을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각 종족의 분쟁을 해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삼묘 대영주께서 평소 각 종족의 전쟁을 허락하지 않으시기에 이 자리를 빌려 분쟁을 해결하고 은원을 갚는 것이지요.”

    “오, 확실히 질서를 유지하면서 갈등을 해결하기에 괜찮은 방법이군.”

    “회계 야만인들이 퍽 머리를 씁니다. 간단하고 효율이 높은 것이 제 마음에도 드는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석천공이 전음으로 한립에게 말했다.

    “이 방법이 통한다는 것은 종족 대부분이 규칙을 따른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선계였다면 각 종족이 온갖 수를 써서 어떻게든 암암리에 복수하고 사적으로 이득을 취하려 했겠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무대 위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먼저 나선 자골족 사내가 월등한 살원기(煞元氣)로 수호족 사내를 압도했다.

    수호족 사내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흉살기가 풀풀 날리는 삼지창을 휘두르며 공격을 잘 피하고 있었다.

    자골족 사내가 매서운 공격을 펼쳤는데도 수호족 사내가 미꾸라지처럼 피해 다니자 그 긴박한 상황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립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수호족 사내를 유심히 보았다.

    수호족 사내는 분명 반격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자골족 사내가 날뛰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흠?’

    그때 한립의 시선이 파릉호 쪽으로 향했다.

    은색 물고기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빛을 반짝이는 호수 위로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흠칫 놀란 한립이 자세히 살피려는데 뒤쪽에서 큰 진동이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가 뒤통수를 강타한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는데, 의식세계에 어봉진신부라 적힌 새하얀 설산이 솟구치며 어지러움을 날려버렸다.

    곁의 석암 등 회석족 족인들도 전부 이리저리 고꾸라지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무대 쪽을 보자 수호족 사내가 눈코입에서 피를 흘리며 소라를 닮은 물건을 쥐고 미친 듯이 기뻐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막사 안의 고위층들도 전부 의자에 쓰러져 의식은 있지만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 그의 소매를 잡고 끌어당겼다.

    석천공이 바닥에 엎어져 얼른 쓰러진 척하라는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피식 웃음을 흘린 한립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척 사람들 틈으로 펄썩 쓰러졌다.

    이때 수호족 결집 지역에서 체구가 큰 사내가 회색 삿갓을 벗고 원숭이를 닮은 파란 얼굴을 드러냈다.

    진언문 유적에서 보았던 푸른 원숭이와 닮은 상대는 금선 중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무대로 펄쩍 날아오른 푸른 원숭이 사내는 수호족 사내의 손에서 검은 소라를 빼앗아 들고 조심스럽게 살폈다.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던 수호족 사내는 즉시 숨이 끊겨 쓰러졌다.

    막사 안의 수호족 족장도 더는 연기를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원숭이 사내를 향해 인사를 했다.

    “대인의 묘책이 통했습니다.”

    “목구 노괴, 감히 니자타역(尼刺陀域)과 손을 잡고 흑치역을 배반하려는 것이냐!”

    분노한 묘수가 소리를 쳤지만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가씨. 자골족이 우리 수호족을 억압한 지 수백 년째이고 친형제인 목수와 조카 목해를 죽였는데 그런 피맺힌 원한을 겨우 비무로 풀 수야 있겠습니까?”

    수호족 족장이 무표정하게 말하더니 목탁과 싸우고 있던 오합리 옆으로 가서 일장에 상대의 머리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무대 아래 수호족이 환호하며 자골족 족인들을 덮쳐 피바람이 불었다. 막사 안의 자골족 족장은 눈만 껌뻑이며 끝없이 탄식했다.

    “이런 일을 벌인 건 장고 대영주의 뜻인가 아니면 당신들 청원족(靑猿族)의 뜻인가? 우리 흑치역이 더는 중립을 지키지 않고 윤회역(輪回域)과 협력할까 두렵지도 않은 것인가!”

    눈을 부릅뜬 묘수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흥, 윤회역이 이미 사람을 보내 네 아비와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줄 아느냐? 너희가 윤회역 쪽에 붙는 것은 어차피 시간문제일 터.”

    청원족 사내가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을 벌여 놓고 누구 탓을 하는 것이냐! 아버지께서 윤회역의 뜻에 반대해 온 것은 모두 아는 일이거늘!”

    “흑치역 것들은 자신들을 너무 과대평가한단 말이지. 함부로 윤회역 사자를 들여놓고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몰랐단 말이냐? 내 이참에 너희들을 따끔하게 혼내주어 모두의 본으로 삼을 것이다.”

    냉소를 흘린 청원족 사내가 파릉호를 향해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호수 위의 물결 속에 숨어 있던 수만 명의 청원족과 니자타역 대군이 솟아올랐다.

    그들은 뭍으로 올라와 사정없이 흑치역 종족들을 학살했고, 그 피가 강을 이루어 호수로 흘러들었다.

    회석족은 호수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니자타역 대군이 달려들면 어쩔 수 없이 손을 써야 했다.

    그러다 회선이 아닌 것이 들통나면 니자타역 대군은 물론 흑치역 종족들도 그들을 척살하려 들 것이다.

    “이제 어찌하면 좋답니까? 계속 기절한 척을 할 수도 없고…….”

    석천공이 다급히 전음을 보내왔다.

    이에 한립은 힐끗 탑 위의 청원족이 거대한 낭아봉을 꺼내 흑치역의 각 족장의 머리통을 박살 내는 것을 보았다.

    목구도 하얀 업화(業火)가 어린 검은 장도를 들고 자골족 족장에게 다가가 목을 베기 직전이었다.

    “더는 안 되겠습니다. 정체를 들키면 이곳의 회계인들을 모조리 죽여서라도 입막음을 하고 떠나면 됩니다.”

    석천공이 기다리다 못해 기운을 드러내려 했다.

    “잠깐,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한립도 더는 고민하지 않고 그를 제지했다.

    석천공은 곧 놀란 눈으로 한립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와 검은 소용돌이를 이루고 탑 위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검은 기운은 분명 태을경 수행을 지닌 회선의 것이었다!

    쾅!

    검은 소용돌이가 탑으로 떨어져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검은 경장 차림의 잘생긴 사내가 새까만 부채를 든 채 태을 회선의 기운을 과감하게 방출했다.

    회선 시체를 장악한 마광이 회지동천에서 나와 비술로 얼굴을 바꾸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낭아봉을 든 원숭이 사내가 마광을 보고는 안색이 급변했다.

    “다, 당신은 허합족(虛合族)? 어찌 허합족 사람이 이곳에…….”

    “허합족이라……. 하하, 꽤 잘나가는 부족 같은걸.”

    마광이 그 소리를 듣고 웃음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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