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9화. 가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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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소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사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면 비키거라.”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고 전부 운소만 쳐다보았다.
그 말에 운소는 동공을 수축하며 회석족 막사만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시면서 나서지는 않으시니 의심이 되어 그럽니다. 능력이 되시면 나와 보시라니까요?”
쉭!
운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색빛이 날아들어 운소 코앞에서 회색 검빛으로 변했다.
안색이 급변한 운소가 포효를 터트리며 전신에서 검은 화염을 불러내 몸을 보호했고, 화염 속에서 무수히 많은 일그러진 얼굴들이 둥둥 떠다니며 처절하게 소리를 쳐댔다.
그러나 흐릿하게 아홉 자루로 갈라진 회색 검빛들은 아무렇지 않게 검은 화염을 가르고 들어갔다.
“헉!”
운소가 기함해 입에서 검은빛을 번득였으나 순식간에 검빛이 그의 몸을 찔러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홉 개의 검빛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사라지고 회장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진선경 초기의 운소는 진정한 선인이었는데 말 한마디 잘못해 일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모습에 회석족 족인들의 낯빛도 완전히 달라졌다.
석암 등 회석족 족인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다가 쓰러진 운소를 보며 속 시원해했다.
“석암, 어서 주둔지로 가거라.”
“예!”
석암이 한립의 명에 얼굴이 밝아져 손짓했다.
격동한 회석족 족인들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니, 예사족에서 대승기 장로 두 명이 바닥에 쓰러진 운소를 데리고 비켜나고 구경꾼들도 공경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누가 함부로 소란을 피우는 것인가!”
그 순간 노호성이 들리고 삼묘 영주 사람이라던 묘괴가 나타났다. 그 옆에는 검은 장포를 입은 젊은 여인도 함께였다.
오색 봉황 관을 쓴 여인은 이종족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용모가 인족과 흡사했고 보기 드문 미인이었는데, 그저 표정이 매우 차가워 대하기 어려운 인상을 주었다.
석암이 그들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탑목달 대회는 질서 유지를 위해 대회 기간에 사적인 싸움을 엄히 금했으나 유월초원의 각 종족은 원래 성격이 드세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이 죽어 나가지만 않으면 대부분 눈 감아 주곤 했다.
“묘 존사,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석암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석암, 너희 회석족은 도착하자마자 분란을 일으켰다. 탑목달 대회에서 쫓겨나고 싶은 것이냐!”
묘괴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서늘하게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그럼 손을 쓴 인물을 불러내거라.”
“그건…….”
석암이 망설이자 묘괴가 성질을 내려는 찰나 막사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쓴 사람은 납니다. 문제가 있다면 나와 해결하면 될 것입니다만,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의 목소리에 흑포 소녀가 막사 쪽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눈에 불똥이 튄 묘괴가 당장 달려들려는데 여인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별일도 아닌데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운소 족장을 데려가 치료해 주세요.”
꾀꼬리 같은 여인의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예.”
날카롭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묘괴도 고개를 숙였다. 묘괴는 흑의 소녀에 대해 경외감을 가진 듯 화를 억누르고 운소를 잡아채 사라졌다.
“저는 묘수라 합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 얼굴을 뵙고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흑의 소녀는 막사 쪽을 향해 공수했다.
“……저는 그저 지나던 사람이니 그럴 것 없습니다. 탑목달 대회가 어떤 것인지 구경이나 하려던 것이니 오래지 않아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막사 안에서 들려온 대답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월초원에서 삼묘 영주는 하늘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누군가 삼묘족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과 같았다.
“얼굴을 드러내기를 원치 않으신다니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탑목달 대회는 우리 유월초원의 가장 큰 의례입니다. 자중하지 않는다면 우리 삼묘령도 더는 아량을 베풀 수 없을 겁니다.”
흑포 소녀는 물처럼 고요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묘수가 떠나자 관중도 흩어지고 석암은 긴장을 풀고 회석족을 정해진 구역으로 이끌었다.
막사 안의 한립도 사실 한시름을 놓고 있었다.
석천공과 그의 실력에 삼묘 영주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고, 달아나고자 마음만 먹으면 막을 수 있는 자가 손에 꼽혔지만 돌발 행동을 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암이 막사를 찾아와 감격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상선께서 나서주셔서 저희 회석족이 수모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다니 앞으로 어떤 분부든 가리지 않고 반드시 최선을 다해 수행할 것입니다!”
막사 안의 석봉도 감격한 얼굴로 함께 허리를 숙였다.
“됐으니 그만 일어나게.”
“혹시 탑목달 대회에 오신 것은 어떤 용무가 있으셔서 인지요?”
한립의 말에 몸을 일으킨 석암 족장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냥 구경이나 하려던 것이네. 자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물러가도 좋네.”
“예.”
석암과 석봉이 나가고 한립은 즉시 검은 장포로 갈아입고 삿갓 법기를 써서 전신의 기운을 꽁꽁 감추었다.
석천공도 변장을 하고 기운을 숨겼다.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은 검은 그림자로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물물 교환 구역 인근으로 이동했다.
수십 리나 되는 거래구역은 또 작은 구역으로 나뉘어 회(回)자 형태의 길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이 참 많습니다.”
한립이 각종 광석, 회수 재료, 영초 등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석천공도 오랜만에 북적이는 시장을 보고 흥이 나는 듯했다.
“시장이 넓으니 흩어져서 각자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럽시다.”
한립의 전음에 고개를 끄덕인 석천공이 먼저 방향을 정해 걸어갔다. 한립은 다른 방향으로 느긋하게 걸어가다 어느 대종족의 노점 앞에서 멈추었다.
진열된 물건의 품질이 좋고 호랑이 머리를 한 세 명의 대승기 사내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오는 길에 회석족에서 본 경전에 따르면 음호족(陰虎族) 인물로 추정되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얼굴에 흉터가 있는 음호족 거한이 한립을 보고 물었다.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팔려고 합니다. 물건을 사들이기도 하십니까?”
“물건만 좋다면 물론입니다.”
동료들과 시선을 마주친 흉터 거한이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은 손바닥 크기의 검은 옥함을 건넸다.
흉터 거한은 물건을 받아 살짝 열어보고는 바로 그것을 받았다.
“저를 따라가시지요.”
태도가 공손해진 흉터 거한은 그를 뒤편의 검은 방으로 안내했다. 각 종족의 매대마다 뒤쪽에 검은 방이 마련된 것이 비밀 거래를 위한 공간 같았다.
방에는 탁자 하나에 의자 두 개가 전부였고, 벽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한립과 마주 앉은 거한은 검은 옥함을 열어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주먹 크기의 먹빛 수정을 확인했다.
구멍에서 검은 기운이 솔솔 흘러나오는 것이 퍽 신비로웠다.
“염봉소정(魘蜂巢晶)의 품질이 아주 좋습니다. 저희가 매입할 테니 원하는 회정(灰晶)의 수량이나 교환을 원하시는 물건을 말씀해 주시지요.”
“음호족을 찾아와 거래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정 3백 개에 팔고 싶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은 가격을 불렀다.
“흠, 그건 너무 비싼 감이 있고, 160개면 거래를 하겠습니다.”
흉터 사내는 곤란한 얼굴로 가격을 낮추었다.
“270.”
“180개! 더는 안 됩니다.”
흥정 끝에 가격을 정한 흉터 사내는 뼈로 만들어진 고리인 저물골환(儲物骨環)을 건넸다.
의식을 불어 넣어 보니 주먹만 한 회색 수정들이 실처럼 회색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회정은 회계 수사들의 화폐로 정순한 흉살기를 품고 있었다. 염소봉정은 회선 시체에서 찾은 회계 재료 중 하나였다.
정보를 구하려면 회정이 필요할 테니 그걸 팔아 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한립은 회선의 저물대에 들어있던 재료 중 가장 별로인 것을 골라 팔았는데 회정을 2백 개 정도나 얻은 것에 만족했다.
“그런데 혹시 염소봉정을 더 갖고 계십니까? 아니면 다른 귀한 재료가 있으면 다른 상점을 찾을 것 없이 우리 음호족에서 전부 처분하시지요. 가격은 섭섭하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 더는 없습니다.”
한립의 대답에 흉터 거한은 조금 실망했다.
“이제 더 팔 것은 없지만 구하고 싶은 물건들은 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서책을 사고 싶은데요.”
“서책이요? 어떤 서책 말입니까?”
움찔한 흉터 거한은 경계심을 드러냈다.
“공법이나 비술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인문지리, 혹은 재료나 도감 같은 평범한 서책이면 되는데 유월초원 바깥 혹은 흑치역에 관련된 것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월초원에서 대종족 중 하나인 음호족은 그런 서책도 적잖이 보유하고 있을 테지요?”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종족도 어렵게 모은 것이라 가격은 싸지 않을 거예요.”
흉터 거한은 장포와 삿갓으로 전신을 가린 한립을 지긋이 봐두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면 회정을 아껴 무엇 하겠습니까.”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한립의 말에 흉터 거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반 시진 뒤, 음호족 상점을 떠나는 한립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대충 살펴보아도 유월초원 외의 자료들이 적지 않았고, 흑치역 바깥의 자료도 있어 돈을 쓴 보람이 있었다.
순식간에 반나절이 흐르고 하늘이 어두워지자 거래구역 곳곳에 등이 걸렸고 그 안에서 하얀 반딧불이들이 빛을 밝혔다.
밤이 깊어가는데도 상점 구역은 활기가 넘쳤다.
인파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 또 다른 종족을 찾아가 재료도 구하고 회계 서적도 구했다.
이 세 종족을 택한 것은 대종족이라 회석족에서 구할 수 없는 자료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계속 다른 종족을 찾아가 서책을 사드리면 금방 누군가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엇, 저건!”
길 양쪽의 좌판을 살피던 한립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영초와 광석류의 재료들이 깔려 있었고 좌판 양쪽에는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고 얼굴에 물고기 비늘이 돋은 이종족이 서 있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도 찾으셨습니까?”
물고기 인간이 살갑게 그를 맞이했다.
한립은 점포 구석에 수북하게 쌓인 수십 개의 반투명한 식물을 보고 있었다. 이파리가 얼음 조각같이 생긴 풀은 숙살단 주재료인 고락화(苦珞花)였다.
“이건 가격이 어떻게 됩니까?”
“아……. 빙정초요? 한 뿌리 당 회정 세 갭니다.”
한립이 고락화를 가리키자 물고기 인간은 미적지근하게 답했다.
“세 개…….”
선계에서 귀하게 거래되는 희귀한 영초가 이런 헐값에 상자에 마구 담겨 팔리고 있다니 말문이 막혔다.
‘빙정초라는 이름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한립은 회석족 서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랐다.
유월초원 무저소택(無低小澤)이라는 음습한 곳에서 대량으로 자란다는 기록이었다.
간략하게 설명만 되어 있고 그림이 없어 고락화와 똑같은 영초인지 몰랐는데 흉살기를 구축하는 효능 때문에 회계 생물들에게는 독과 마찬가지라 값이 나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이게 답니까?”
한립의 질문에 물고기 인간들이 의아해했다.
보통 몇 가지 독약을 제조할 때 외에는 쓸 일이 없는데 대량 구매를 원하다니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죄송합니다만, 이게 답니다.”
“알겠습니다. 전부 주시지요.”
한립은 담담히 답하고 값을 치렀다.
“저희 모어족(慕魚族)은 각종 영초를 기르는데 능해서 다양한 물건이 준비되어 있으니 더 보고 가시지요? 이 택란화(澤蘭花)만 해도 만년 이상 된 겁니다.”
나이가 지긋한 모어족 족인이 다른 영초를 소개했다. 짙은 흉살기를 지녀 회계에서는 진귀한 영초로 불릴 만했다.
그러나 한립은 고개를 젓고 점포를 떠났는데 이번 일로 한 가지를 깨달았다.
회계와 진선계가 교류를 하지 않았기에 회계에서 회정 1개의 값어치도 하지 않을 값싼 물건이 진선계에서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왕 회계까지 온 것 고락화 같은 물건을 잔뜩 가지고 진선계로 돌아가면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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