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화. 도발
*
키 큰 족인이 물러나고 족장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족장도 역시 공경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 어려워할 것 없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이름을 듣지 못했군.”
한립은 말투는 비슷했으나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회석족에게 보인 온화한 태도가 신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서책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상선께 고합니다. 저는 ‘석암’이라 합니다.”
“석암 족장, 자네를 부른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하나 물을 것이 있어서네. 이번에 족인들을 이끌고 길을 나선 것은 탑목달(塔木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함인가?”
흩어져 지내는 유월초원의 각 부족은 백 년마다 파릉호(波堎湖) 주변에서 모여 탑목달 대회를 거행했다.
탑목달은 회계 말로는 ‘풍년’을 의미했다.
삼묘 대영주가 주관하는 대회에서는 비무대회가 열렸는데, 유월초원의 각 부족이 각종 광산과 방목지를 두고 겨루는 자리였다.
유월초원은 드넓고 각 부족은 흩어져 있어서 자원이나 인적인 교류가 어려웠기에 탑목달 대회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예.”
석암 족장이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나와 사형은 흑치역 출신은 아니지만 탑목달 대회의 명성은 들어본 적이 있네. 그래서 이번에 회석족을 따라 파릉호로 가서 견문을 넓히고자 하는데…….”
한립의 말에 석암 족장이 멍해졌다.
“왜 그러지? 안 된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두 분께서 동행해 주신다면 저희 회석족의 영광이지요! 그저 회석족 전체가 움직이는 터라 이동 속도가 느려 무료하다 느끼시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솔직히 석암 족장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포악한 성정을 지닌 이들이 아니라면 실력자를 대동하면 언제든 도움이 되었다.
탑목달 대회로 가는 길에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강력한 회수(灰獸)가 나타나면 힘을 빌릴 수도 있었다.
“이 속도면 파릉호까지 얼마나 걸리지?”
“아마 4, 5년은 걸릴 겁니다. 중간에 강력한 회수가 도사리고 있어 빙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것 없네. 최단 거리로 이동하고 회수를 만나게 되면 우리가 쫓아주겠네.”
한립을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1년은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석암이 이렇듯 기뻐한 것은 길을 빙 돌아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회수가 나타나면 처리해 주겠다는 확답을 받아서였다.
“다른 일이 없다면 물러가게.”
용건을 마친 한립이 축객령을 내렸고 석암 족장은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 했다.
“그렇지, 아무 내용이나 상관없으니 지닌 경전이나 책이 있으면 전부 갖고 오게. 시간이 많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바로 사람을 시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한립은 문득 기억이 났다는 듯 석암을 향해 말했고 그는 곧장 대답하고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려 수사께서 이렇듯 연기를 잘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보고 있자니 감탄이 다 나오던걸요?”
석천공은 한립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회선 노릇을 하자 웃음을 터트렸다.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위기를 넘기기 위한 능력을 자연스럽게 키우게 되었습니다.”
“보아하니 수사도 곡절이 있는 분이었군요. 그보다 탑목달 대회에 이르면 진정한 회선을 만나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석천공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거두고 화제를 돌리자 한립도 먼 곳을 쳐다보았다.
석암 족장은 금방 족인들을 대동하고 천여 권의 서책들과 옥간 몇 권을 전해 주었다.
회석족 족인들 중에는 독서가가 별로 없는지 경전의 상태가 안 좋은 것은 물론 먼지도 잔뜩 쌓여 있었다.
이에 석암 족장도 부끄러운지 송구스럽다는 뜻을 표했으나 한립과 석천공은 개의치 않고 그들을 물렸다.
경전의 상태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을 회계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중요했다.
두 사람은 하룻밤을 말없이 보냈다.
이튿날, 회석족은 경로를 약간 변경했다.
한립과 석천공은 자신들의 막사를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고 범인 귀족처럼 족인들과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독서와 정보를 분석하는 데만 열중했다.
시간이 흘러 3년이 훌쩍 지나갔고, 화석족도 드디어 목적지인 파릉호에 도착했다.
유월초원 중부에 있는 파릉호는 면적이 수만 리에 달하고 호수 속에서 파릉석(波堎石)이라는 특수한 광석이 생산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곳이 파릉호인가 봅니다.”
한립과 석천공은 막사 안에서 거대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맑은 물 위를 눈처럼 새하얀 새 몇 마리가 천천히 날아가고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이 쳤다.
한립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에 선계를 떠올렸다.
탑목달 대회가 개최되기까지 아직 시일이 남았는데도 호수 남쪽의 거대 평원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 종족 대부분이 모두 모인 듯했다.
그때 하얀 구름 하나가 회석족 앞으로 날아들었다.
구름 위에는 하얀 장포를 입고 새 머리에 수정처럼 빛나는 눈을 지닌 이들이 타고 있었다. 여러 문양이 수놓아진 하얀 장포는 휘황찬란하게 빛나 회석족 족인들의 족장과는 확실히 구분되었다.
그들 중 맨 앞에 선 청년은 진선급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깃털 없이 매끈한 얼굴을 지닌 청년은 코가 조금 길쭉하고 눈이 움푹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거의 사람의 모습에 가까웠다.
“너희는 회석족이냐?”
청년은 회석족을 보고 바로 하대했다.
“예! 회석족 석암이 묘 존사를 뵙습니다.”
석암이 서둘러 앞으로 나서 예를 취했다.
“석봉, 저자는 누구지?”
한립이 막사 바깥의 족인을 불러들여 물었다. 석봉은 합체기 장로로 석암 족장의 명을 받아 그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두 분 상선께 아룁니다. ‘묘괴’라는 인물로 삼묘 영주님 휘하의 집법사 중 한 명입니다.”
“삼묘 영주의 사람이었군.”
공손한 석봉 장로의 답변에 한립이 담담히 웃음 지었다.
“탑목달 대회까지 두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일찍이도 왔구나. 회장의 좋은 자리는 이미 다른 부족들이 선점했거늘.”
키 큰 청년은 석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 두 달이라니요. 관례에 따르면 1년 뒤에나 대회가 열려야 하지 않습니까?”
석암 족장이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대회를 앞당기라는 영주 대인의 명이 있으셨다. 영주 대인께서 결정을 내리실 때 네 의견이라도 참고해야 한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제가 경황이 없어 실수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은 작은 성의입니다. 부디 남은 자리 중에서라도 저희 회석족에게 쓸만한 곳을 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냉소를 흘리는 청년을 향해 석암이 사죄를 하고 몇 걸음 다가가 검은색 주머니를 상대의 손에 건네주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청년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음, 22구역이 아직 비어 있으니 그곳을 내주겠다.”
“감사합니다, 존사.”
석암은 청년이 던져준 하얀 옥패를 받고는 공수를 했다.
하얀 구름을 탄 이들이 돌아가고 석암은 무리를 이끌고 지정된 주둔지로 이동했다. 뒤쪽은 아니긴 하지만 앞에 연달아 다른 종족들이 머물고 있어 눈에 띄게 좋은 자리도 아니었다.
막사 안에서 한립과 석천공이 여러 모습을 한 이종족들을 살폈다.
벌써 도착한 종족만 2, 30개는 되었고, 앞쪽에 위치할수록 규모도 크고 진선급 존재가 눈에 많이 띄었다.
그와 비교하면 회석족은 확실히 세력이 강한 부족은 아니었다.
한립은 호수 옆의 또 다른 공터로 눈을 돌렸다.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 공터에는 물건을 가득 쌓아 놓은 노점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각 종족이 물물 교환을 하는 장소 같았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을 보고 한립과 석천공은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다른 무리가 갑자기 회석족 족인들을 막아섰다.
“석암 족장 아닙니까? 백 년 만인데도 회석족은 여전합니다. 이렇게 발전이 없어서야 과거의 위세를 언제 회복하려는지, 쯧쯧.”
날카로운 목소리에 얼굴에 비늘이 덮인 중년 추남이 걸어 나와 말을 붙였다.
뺨이 길고 코는 납작한데 눈은 길쭉해서 아주 추하게 생겼으나 수행만은 진선경 초기에 이르러 회석족의 어느 족인보다 강했다.
“운소, 우리 회석족이 어떻든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길을 비키세요!”
얼굴을 굳힌 석암이 냉랭히 답했다.
“흐흐, 상관이 없기는요. 과거에는 그래도 경쟁하던 사이였는데, 회석족이 이 꼴이 나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군요.”
비꼬는 기색이 가득한 중년인은 비킬 마음이 없어 보였다. 석암은 화가 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음에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른 종족들 역시 그걸 보면서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석봉, 저자는 또 누구지?”
막사 안에서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사족(翳蛇族) 족장 운소입니다. 예사족과 저희 회석족은 예전에 어느 광산을 두고 다툰 적이 있어 대대로 척을 지게 되었습니다. 작은 원한도 두고두고 잊지 않는 성격이라 탑목달 대회 때마다 저럽니다.”
“겨우 회석족의 세력으로 저들과 싸웠단 말이냐?”
“그것이……. 원래는 석암 족장도 진선경 수행을 지녔었고, 대승기 장로도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수백 년 전에 강력한 진선경 회수의 공격을 받아 대승기 장로 둘이 사망하고 족장도 중상을 입어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수행이 대승기 경지로 떨어지고 말았지요. 그 뒤로 회석족이 지금의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한립의 이상하다는 듯한 물음에 석봉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설명했다.
“오, 그랬군.”
한립이 석봉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예사족 족장은 여전히 길을 막고 있었다.
“당신과 입씨름하기 싫습니다. 탑목달 대회는 삼묘 영주께서 친히 주관하는 대회입니다. 고의로 우리의 입장을 막는 것은 삼묘 영주님의 명을 어기겠다는 것입니까?”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난 그저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인사나 몇 마디 하려는 것뿐입니다. 굳이 대화를 피하는 석암 족장의 태도가 더 이상하군요. 왜요, 이제 내가 무섭기라도 합니까?”
삼묘 영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운소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의 다른 종족들도 적잖은 이들이 비웃음을 흘리며 회석족을 손가락질했다.
“당신……!”
석암이 그의 모욕에 분노하자 회석족 족인 전부가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막사 안에서 석봉이 몸을 부들부들 떨다 갑자기 한립을 향해 절을 했다.
“상선, 아무리 그래도 저들의 태도가 너무 무례합니다. 혹시 나서주실…….”
그를 힐끗 본 한립은 말없이 안쪽으로 걸음을 돌렸고 석봉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멈추었다.
“석암, 어서 상황을 정리하게. 이곳에서 저런 가소로운 자들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으니.”
한립이 자리를 잡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바깥에서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 비웃던 이들도 바로 웃음기를 거두었다.
석암이 한립의 질책을 듣고도 내심 크게 기뻐하며 막사를 향해 예를 올렸다.
“예!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상선. 운소, 아직도 안 비키고 뭐 하는 겁니까? 여기서 당신과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석암이 운소 쪽으로 몸을 휙 돌리더니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큰 소리로 소리쳤다.
“아주 대단한 분이라도 모셔왔나 봅니다. 어디 누군지 이곳에 모인 모두에게 자랑이라도 하시지요?”
눈을 번득인 운소는 냉랭한 미소를 회복하고 막사를 쳐다보았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속으로 그 교활함에 욕설을 내뱉었다.
싸우려면 혼자 싸울 것이지 구경하는 이들은 왜 끌어들인단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