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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47화 (1,604/2,000)

1847화. 부락

*

반나절 후 그들은 밀과 비슷한 옅은 회색 식물들이 자라는 초원에 이르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회색 풀들이 출렁이는 모습이 잿빛 바다 같았다.

그때 한립은 돌연 비차를 세우고 석천공과 시선을 마주쳤다.

천여 리 밖에 커다란 코뿔소가 이끄는 거대 마차 열댓 개를 선두로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거대 마차 주변으로 체구가 큰 인영들이 3, 4천 명은 되었고, 사람의 다리를 지니고 도마뱀 머리가 달린 이종족은 피부에 회색 비늘이 덮여 있었다.

그들 뒤로 순록을 닮은 회색 짐승 만여 마리가 아름다운 뿔을 반짝이면서 천천히 따라갔다.

도마뱀 인간들은 초원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족 같았다.

딱 보기에도 지능이 높아 보이는 도마뱀 인간들은 개개인이 대승기 수사와 맞먹는 흉살기를 품고 있었다.

드디어 이곳 상황을 알아볼 수 있겠다 싶어진 한립과 석천공은 희색을 드러냈다.

비차를 거둔 한립은 잿빛을 번쩍이면서 대량의 흉살기를 분출해 두 눈동자마저 흐릿한 회색으로 변화시켰다.

석천공은 한립이 삽시간에 진언문 유적에서 만난 회선처럼 변하자 화들짝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흉살기를 흡수시켜 놓은 구슬을 삼키고 전신에서 잿빛을 일으켰다.

그는 한립처럼 완벽하지는 않아도 대충 회선과 비슷해졌다.

그들은 변신을 마치고 도마뱀 인간들에게 다가가려다 전방에서 들려오는 굉음을 듣고 멈춰 섰다.

“운이 따라주나 봅니다.”

한립이 가볍게 웃음 짓고 튀어 나가자 석천공도 그 뒤를 쫓았다.

도마뱀 인간들은 초원 깊은 곳에서 날아든 회색 괴조(怪鳥)를 상대하느라 난리였다.

웬만한 사람보다 열 배는 큰 새는 용머리를 하고 검은 발톱을 칼처럼 휘둘렀다.

끽끽!

흥분한 회색 괴조들은 괴성을 지르면서 도마뱀 인간들이 기르는 순록들을 채갔다.

“놔라! 이놈들!”

거대 마차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날아올랐다.

다른 도마뱀 인간들보다 체구가 큰 사내는 이목구비가 뚜렷해 인족과 흡사했고 대승기 경지의 방대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는 눈부신 회색 뼈 검을 꺼내 회색 괴조 한 마리를 향해 쇄도했다.

끼익!

회색 괴조가 깜짝 놀라 날개를 펄럭이면서 피하려다 배가 길게 갈려 잿빛 피를 뿜었다.

쉬쉬쉭!

다른 거대 마차에서도 합체급 인물 3명이 나와 뼈로 만들어진 법보를 들고 회색 괴조들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흉악하게 울부짖은 괴조들은 입에서 바람의 칼날을 뿜어 다른 도마뱀 인간들을 노리고 검은 발톱에서는 눈부신 빛을 뿜어 뼈로 된 법보들을 막았다.

쌍방이 대대적으로 충돌해 폭음이 울려 퍼졌다.

어디서 몰려온 것인지 회색 괴조들의 수가 너무 많고 대부분 합체급 실력을 지니고 있어 대승기 도마뱀 수사들이 아무리 강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세 마리의 회색 괴조들을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족인들은 밀리고 있었고 다른 마차의 합체급 족인들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시간이 길어지자 세 명의 합체급 족인들은 등을 맞대고 서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족장님,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뼈 방패를 펼친 도마뱀 족인들이 회색 괴조의 발톱을 튕겨내고는 진선급 도마뱀 족인을 향해 외쳤다.

족장이라 불린 이도 세 명의 족인이 위험에 처한 것을 보았지만 도울 여력이 없었다.

“악!”

참혹한 비명이 들리고 결국 도마뱀 족인 한 명이 검은 발톱에 당해 팔 한쪽이 거의 떨어져 나가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순식간에 선혈이 낭자했고 협공을 해서 겨우 버티던 세 명의 대승기 수사들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에 분노한 족장은 단호한 눈빛으로 입에서 회색빛을 뿜어 뼈검에 불어넣었다.

뼈검이 휘리릭 돌아 커다란 회색 빛구슬로 변해 파동을 일으켰고, 그 날카로운 기운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괴조 세 마리 중 두 마리가 급히 물러났다.

하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서늘한 눈빛으로 오히려 날개를 펄럭여 도마뱀 족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휘휘휙!

새까만 빛들이 괴조의 입을 빠져나가 족장 위로 떨어져 내렸다.

쾅!

이에 족장이 다급히 수결을 맺자 그의 손짓에 회색 빛덩이가 폭발해 수천 갈래의 검기가 사방팔방으로 튀어 달려드는 회색 괴조를 죽였다.

하지만 족장도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린 몸으로 비틀거리며 물러나 검은 기운이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괴조 두 마리가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족장님!”

족장이 죽으면 나머지는 모두 끝장이었기에 다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데, 하늘에서 회색 빛줄기 두 개가 내려와 두 괴조를 꿰뚫었다.

괴조들은 잘게 썰려 목숨을 잃었고 동시에 합체기 족인들 주위에도 검은 비검이 떠올라 그들을 괴롭히던 회색 괴조들을 조각냈다.

족장을 포함한 네 명의 도마뱀 수사들은 어안이 벙벙해 두리번거리다 한립과 석천공이 하늘에서 표표히 내려오는 것을 보고 급히 다가갔다.

“상선들께서 도움을 주셔서 저희 회석족(灰蜥族)을 구해주셨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족장은 더없이 공손하게 예를 올렸고, 나머지 세 명도 경외감 어린 눈빛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럴 것 없으니, 모두 일어들 나게.”

석천공과 시선을 교환한 한립이 담담히 말했다.

회석족 네 명은 몸을 일으키고 무슨 대단한 가르침이라도 구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주변을 떠돌다 갑자기 폭풍에 휘말려 길을 잃었다. 이곳이 어딘지 아느냐?”

그들의 눈빛에 의아함을 느낀 한립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유월초원(六月草原) 서북부입니다. 두 분께서 만나신 폭풍은 이곳 특유의 회조(灰潮)일 겁니다.”

“회조라, 그랬군.”

“바삐 길을 가시느라 고단하실 텐데, 괜찮으시다면 저희 회석족 부락에서 잠시 쉬었다 가심이 어떠십니까? 지역 특산인 백용차(白茸茶)라도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회석족 족장은 조심스럽게 그들을 청했다.

“그것도 좋겠지.”

“아, 그러시면 이쪽으로 가시지요!”

한립의 대답에 족장이 무척 좋아하며 길을 안내했다.

한립과 석천공은 회석족 족인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내심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수행이 높다고 해도 저들의 태도는 범인들이 속세의 황제라도 알현한 것 같았다. 무리 뒤쪽에서는 놀라 흩어진 회색 순록 무리를 찾아오느라 다들 바삐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각록(麋角鹿)들을 잘 관리하지 못할까. 상선께서 계시는데 이게 무슨 소란이냐.”

“예!”

얼굴을 굳힌 회석족 족장이 분부를 내리자 합체기 족인 중 하나가 얼른 상황을 처리하러 날아갔다.

“장막 안으로 드시지요.”

족장이 그들을 이끌고 간 들어간 곳은 맨 앞의 거대 마차였다.

마차 위에는 열댓 개의 넓은 장막들이 펼쳐져 있고 마차 아래에는 먹색 주술문자들이 진법을 이루고 있었다.

진법이 웅웅거리며 회색 안개를 방출해 거대 마차를 받치고 있었다. 마차에 오른 한립은 구름에 둥실 떠 있는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마차가 너무 커서 코뿔소 요수 한 마리가 끌기에 무리가 있어 보였다.

족장은 그들을 가장 큰 장막 안으로 인도하고 자신도 들어왔다.

석천공은 한립과 달리 자신의 위장이 완벽하지 않은 것을 알고 최대한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장막 앞쪽에는 기다란 탁자에 요수 가죽을 깔아 두어 손님을 맞이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안쪽은 침실인지 두꺼운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곳에 앉으시지요.”

회석족 족장은 한립과 석천공이 마주 앉게 하고 자신은 그 옆에 앉았다.

곧 시종으로 보이는 회석족 족인이 사슴뿔로 만든 잔에 차를 담아 들고 들어왔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꽃향기가 그윽하게 퍼졌다.

“이 차는 회석부 특산의 미각록 녹용과 열댓 가지 재료들을 혼합해 만든 것입니다. 수행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물론 두 분의 수행에 이런 차가 소용이 없겠으나 맛은 괜찮으니 들어보시지요.”

“과연 맛이 나쁘지 않군.”

족장의 설명에 한립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는 찻물을 넘기지 않고 화지 공간 속으로 이동해 두었다. 낯선 공간에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그 말에 회석족 족장은 기뻐하며 시종을 시켜 다양한 음식과 과실을 더 내와 열정적으로 그들을 대접했다.

“잘 대접해 주어 고맙네만 우리가 이곳에 따라 들어온 것은 배를 채우기 위함은 아닐세.”

한립은 살짝 맛만 보는 척하고 입을 열었다.

“분부가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움찔한 회석족 족장이 서둘러 답했다.

“인근 지도나 유월초원에 대한 자료를 지니고 있나?”

“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아랫사람을 시켜 정리해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족장은 곧장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향했다.

“정리는 되었고 인근의 풍토나 사정에 대한 기록도 함께 가져와 주면 좋겠군.”

한립의 말에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진 회석족 족장은 그러겠다고 답하고 빠르게 장막 안을 빠져나왔다.

태연한 한립과 달리 석천공은 차를 맛보는 척하며 수시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자신의 위장이 들키진 않을까 불안한 듯했다.

오래지 않아 족장은 두꺼운 서책을 잔뜩 든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못해도 백 권 이상은 되는 듯했다.

용사의 저물대에서 회계 문자를 접한 한립은 회선들이 진선계의 고대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서책을 읽을 수 없을까 걱정하지 않았다.

“분부하신 자료입니다. 저희는 흑치역의 작은 부락이라 자료가 많지 않으니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회석족 족장이 송구스러워하며 말했다.

“어차피 지나는 길이니 자세한 자료는 필요 없네. 유월초원이 어떤 곳인가 관심이 가서 가져와보라 한 것이야.”

한립이 가볍게 답하는 것을 보고 족장은 내심 안도하며 경전들을 내려놓게 했다.

“천천히 읽어보시지요. 제가 바깥에 사람을 세워놓을 테니 다른 분부라도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눈치 있게 족인들을 데리고 나갔다.

한립은 그들이 나가자마자 손짓을 해 회색 장막을 펼쳤고 그제야 석천공은 안심했다.

두 사람은 백여 권의 경전을 훑으면서 빠르게 주변 상황을 파악해갔다.

이곳은 회계가 확실했지만, 회계도 진선계처럼 넓어서 구체적으로 회계의 어디쯤인지는 경전에 적혀 있지 않았다.

회석족은 대대로 유월초원에 살아온 작은 부락으로 당연히 그들이 보유한 경전도 인근에 관한 내용밖에 없었고, 드넓은 유월초원에는 이런 회석족 말고 다른 부족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유월초원이 있는 흑치역은 서책들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았으나 면적이 광활해서 전체 구역에 비하면 유월초원은 작은 돌멩이처럼 아주 작은 곳이었다.

회계는 만황구역과 비슷해서 각 부족을 기초로 그 위에 영주가 있고 유월초원은 ‘삼묘’라는 대영주가 관리했다.

한립은 삼묘의 수행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 공덕만 찬양하는 글 속에서 아마도 대라경 급이 아닐까 짐작을 했다.

“회계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데 유월초원 같은 시골구석에 떨어진 것이 다행입니다. 번잡한 곳에서는 신분을 숨기기도 어려웠을 테니까요.”

석천공이 서책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회석족을 따라다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이곳 사정을 확실히 파악하기 전에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요.”

“그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상의를 마치고 한립은 주변의 금제를 거두었다.

“여봐라.”

“분부가 있으십니까?”

한립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키 큰 회석인이 걸어들어와 무릎을 꿇고 덜덜 떨면서 물었다.

회석족 같은 경우에 수행이 높을수록 인족과 비슷해졌기에 한립과 석천공을 보고 경외심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족장과 상의할 것이 있으니 불러오거라.”

한립은 명령조로 말했다. 이제 어느 정도 그들에 대해 이해했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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