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화. 칠채화단사(七彩火丹砂)
*
지도가 담긴 옥간에는 북한선역, 사맹선구의 선역들 뿐만 아니라 풍화선역(風和仙域), 금원선역 그리고 중토선역 지도가 담겨 있었다.
그리 상세하지는 않아도 앞으로 큰 도움이 될 정보였다. 지도까지 정리하자 익숙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투각을 해서 구멍이 뻥뻥 뚫린 금색 원반과 금색 영패 그리고 하얀색 나침반이었다.
금색 영패는 공수천의 감찰선사 영패였고, 금색 원반은 감찰선사들과 연락하는 수단이었으며 하얀 나침반은 연신술을 감응하는 도구였다.
어차피 회계에 있어 천정에 들킬 일도 없으니 그것들은 전부 넣어두었다.
공수천의 저물팔찌에는 다양한 재료와 태양처럼 따듯한 빛을 내뿜어 다른 영초들이 자라는 데 도움을 주는 금수십엽화(金須十葉花)도 있었다.
한립은 그걸 진언문에서 찾아낸 영초들과 같이 넣어 두었다.
다음으로 그가 눈을 돌린 것은 손바닥 크기의 동그란 은색 상자였다.
복잡한 무늬가 새겨진 상자에는 작은 금색 부적이 붙어 있었는데 내용물을 봉한 부적 자체가 품질이 극히 높은 ‘금화통염부(禁火通炎符)’였다.
한립은 동그란 은색 상자를 들고 침음했다.
지익!
그러다 갑자기 연달아 법결을 날리자 부적이 찢겨나가고 은색 상자가 저절로 열리면서 뜨거운 기운이 방을 가득 채웠다.
상자 안에는 품(品)자 형태로 용 눈알 크기의 구슬 세 개가 담겨 있었다.
“설마 칠채화단사(七彩火丹砂)?”
붉은색, 주황색, 보라색의 구슬을 보고 눈을 반짝였지만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경전에서 본 바로 칠채화단사는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녹색, 파란색, 보라색의 일곱 자기 종류로 보기 드문 불 속성 법칙을 품고 있는 물건이라 어느 천지화염보다 강력해 정말 하늘을 태우고 땅을 불사를 수 있는 물건이라 했다.
한립이 세 개의 구슬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의 어깨에서 은빛이 반짝이고 은염소인이 빠져나와 기뻐하며 상자 주변을 맴돌았다.
“이걸 먹고 싶다는 것이냐?”
한립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은염소인은 손발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수시로 구슬을 돌아보며 구슬이 사라질까 조바심을 내었다.
“네게 주어도 상관은 없지만, 정체가 불분명한 물건이라……. 이렇게 하자, 일단 한 알을 먹어보고 네 수행에 도움이 되면 나머지도 내주마.”
한립의 허락이 떨어지자 은염소인은 얼굴이 활짝 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막상 은색 상자로 다가가자 어떤 걸 먼저 먹을지 고민되는지 망설였다.
이에 한립은 재촉하지 않고 은색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금동이었으면 세 알을 죄다 삼킬까 걱정이 되었겠지만 정염불새는 그의 말을 잘 듣는 아이라 걱정이 덜 되었다.
공수천의 화룡거검과 불 깃발 열 개도 저물탁에 넣고 보니 남은 것은 품계가 없는 선기들과 약간의 시간법칙의 힘을 함유한 9품 선기 금색 방울이 전부였다.
연화를 시킨 한립은 방울을 발동해 금빛 파동을 일으켜 보았다.
파동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태을 초기 이하의 수사들은 꼼짝을 못 하겠으나 태을 중기 이상의 수사들에게는 효과가 미미했다.
공수천이 이걸로 한립을 상대하지 않은 이유도 그의 의식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립은 선기들을 정리하고 은염소인을 돌아보았다.
‘하하…….’
은염소인은 한 손으로는 붉은 구슬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는 주황색 구슬을 가리킨 채 눈은 또 보라색 구슬을 보고 있었다.
한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공수천의 머리에서 찾아낸 기이한 기운을 품은 하얀 부적을 불러냈다.
놀랍게도 의식 공격을 방어하는 8품 선기였다.
하얀 부적을 미간에 대고 의식세계로 녹여내자 깜빡거리며 금전문이 떠올랐다.
“어봉진신부(御峰鎭神符).”
눈썹을 꿈틀한 한립은 다음으로 손바닥을 펼쳐 금색 나침반을 불러냈다.
시간법칙 파동이 즉시 방안을 채워 심각하게 고민 중이던 은염소인도 잠시 한립을 돌아보았다.
한립이 금색 원반 표면에 새겨진 주술문양들을 손끝으로 매만지자 중앙의 금색 바늘이 돌면서 금빛을 흘려보냈다.
연화를 해보려 했지만 놀랍게도 연화를 시킬 수가 없었다.
“보물의 품계가 너무 높아서인가? 아니면 적합한 연화 구결을 몰라서?”
그가 의혹에 잠겨 있을 때 이번에는 은염소인 쪽에서 강렬한 파동이 전해졌다.
주먹을 단단히 그러쥔 은염소인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자세로 눈과 귀 그리고 코에서 붉은빛을 방출해 한립이 펼쳐 둔 진법을 뚫으려 하고 있었다.
이에 은색 상자를 불러들인 한립은 주황색과 보라색 구슬만 남아 있고 붉은색 구슬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상자를 넣어두자마자 쿵! 하며 공간이 흔들리고 은염불새가 붉은 기운에 휩싸여 거대한 불새로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 화염 외투를 입은 듯 은색 불길과 붉은 불길이 화려하게 교차하며 한립도 식겁할 만한 열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펑! 펑! 펑!
화염은 한립이 펼쳐 둔 진법에서 연달아 터져 죽루 전체가 흔들렸다.
2층에 앉아 있던 마광이 벌떡 일어나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죽루를 빠져나왔다.
화염으로 인해 죽루의 벽과 바닥이 메말라가자 한립은 서둘러 푸른 보호막을 방출해 정염불새가 방출하는 열기를 억누르려 했다.
스스스.
다행히 비경 전체의 대나무 숲이 흔들리면서 어지럽게 댓잎들이 떨어져 내리고, 그 뿌리에서 영기가 지면을 타고 죽루로 전해져 벽과 바닥을 다시 원래 상태로 돌려놓았다.
죽루 앞 연못도 뜨겁게 끓어오르려다 중간의 금색 연꽃이 대량의 하얀 안개를 뿜어 선경과 같은 경치를 만들어냈다.
약재밭 옆에 새로 지은 죽루에서 생활하던 해 도인이 갑작스러운 소란에 지붕 위로 올라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죽루 안의 정염불새는 점점 붉은 기운을 흡수하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두 종류의 화염을 전부 갈무리한 정염불새가 붉은 문양이 들어간 은색 구슬로 변해 허공에 떠올랐다.
그 모습에 한립의 눈에 희색이 어렸다. 그가 얻은 것은 전설 속의 칠채화단사가 맞았다.
한립은 진작 죽루를 벗어난 마광에게 전음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약재밭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수사, 조금 전 불의 기운은…….”
해 도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정염불새가 칠채화단사 중 한 알을 복용해 그리되었습니다.”
“그런 보물을 복용했다고요! 소란이 일어날 만합니다.”
“해 수사, 여기 이것들은 제가 마저 살필 시간이 없을 듯합니다. 저를 대신해 정리를 좀 해주시고 시간법칙을 함유한 물건 말고는 제게 따로 상의하실 것 없이 필요한 것은 가져가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한립은 여러 개의 저물탁과 저물반지를 해 도인에게 맡겼다.
평소 무표정한 해 도인도 꽤 많은 저물법기를 보고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보였다.
한립은 약재밭에 그간 구한 영초들을 구역을 나누어 심어 두고 특별히 신중하게 공터를 골라 양생수의 잔뿌리를 심고 영액을 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양생수가 되살아날 확률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녹색 액체가 없었다.
한립은 비경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오랜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은색 빛의 문을 열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 * *
7일 후.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하늘을 가린 먹구름들을 올려보았다.
3개의 태양이든 6개의 달이든 일렬로 나타났고, 달은 항상 보름달 형상을 하고 있었다.
가끔 먹구름 깊은 곳에서 벼락이 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와 무슨 흉악한 짐승이라도 숨어 있나 긴장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날 새벽 지면에서 흉살기가 올라와 짙어지는데 석천공이 깨어나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천공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립을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몸도 멀쩡하고 저물법기도 그대로인 것을 확인했다.
“어째서입니까?”
“왜 당신을 구해주었고 죽이지 않았냐는 뜻이겠지요?”
한립은 무표정하게 반문했다.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 요수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에 기습을 당했습니다. 수사께서 저를 구해주신 겁니까?”
“요수라기보다는 그냥 이 구역에 서식하는 특수한 생물 같았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제 추측이 맞다면 우린 진언문 유적의 공간 소용돌이에 휘말려 회계에 온 듯합니다.”
“뭐라고요? 회계요?”
석천공은 한립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런 식으로 회계에 오게 될 줄이야…….”
석천공은 한참 만에 평정을 되찾고 씁쓸하게 웃었다.
“수사가 흉살기에 침식당해 제가 숙살단을 먹이기는 했으나 아직 몸이 온전치 않을 것입니다. 이왕 깨어났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하시지요.”
“숙살단……. 그런 귀한 단약을 나를 구하기 위해 사용했단 말입니까? 괴물에게 죽게 두었으면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이 지니고 있던 보물도 빼앗고 좋았을 텐데 어째서…….”
“당신은 평범한 마족이 아니라 광원재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인물일 겁니다.”
석천공의 질문에 한립은 태연히 반문했다.
“신분이 높아 나를 살려줬단 소립니까? 하, 그런 성격으로는 안 보였는데 말입니다?”
석천공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당신은 제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선계로 돌아가면 수사가 이용할 수 있는 광원재의 힘을 총동원해 누군가를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눈을 반짝인 한립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석천공은 한립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깜짝 놀랐다.
“겨우 그거면 된단 말입니까?”
“나머지 이야기는 일단 선역으로 돌아가서 하지요. 광원재는 장사를 하는 곳이니 신의라는 두 글자를 중히 여길 거라 믿겠습니다.”
“……사람을 찾는 일은 수락하겠습니다. 이후 그 밖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최선을 다해 한 번은 수사를 도와드릴 것이고요.”
“무조건 말입니까?”
“물론 아무런 조건 없이 도울 겁니다! 제 목숨값이 그리 싸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석천공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럼 수사가 부상을 회복하는 대로 이곳을 떠나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선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아봅시다.”
말을 마친 한립은 다시 눈을 감고 운공을 하는 데 집중했다. 석천공은 그런 한립을 바라보다 단약을 꺼내 삼키고 곧 눈을 감았다.
며칠이 지나 두 사람을 태운 벽옥비차가 어딘가로 날아올랐다.
수일을 단조로운 회백색 지면을 지나던 한립은 비차 앞에 서서 곳곳에 자라난 식물들과 벌레 그리고 작은 짐승들을 살폈다.
그것들은 선계의 생령들처럼 흉살기가 가득한 환경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잘 자라고 있었다.
“회계가 분명합니다. 큰일이군요.”
석천공이 근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회계에 직접 와본 적은 없지만, 이곳의 세력들은 선계의 수사들과 우리 같은 마족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분이 발각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정체를 숨기는 편이 좋겠군요.”
한립은 수결을 맺어 몸속에서 검은빛을 방출해 비차를 감쌌다.
검은빛의 실들이 빠져나와 주술문자를 이루고 비차로 스며들자 초록색이던 비차가 거무스름하게 변해 영기 대신 흉살기 파동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려 수사께서 연기술에도 이렇듯 조예가 깊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순식간에 비차의 기운이 확 달라졌어요.”
“위장에 불과합니다. 비차의 기운을 바꾸는 일은 쉽지만 우리의 기운을 감추는 일은 쉽지 않을 테지요.”
한립은 석천공을 훑었다.
한립은 몸에 흉살기가 있고 마광까지 있어 회선으로 위장할 수 있지만 그가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립의 시선에 석천공은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에 한립도 더는 묻지 않고 비차 조정에 힘썼다.
석천공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주문을 중얼거리더니 엄지손톱 크기의 하얀 구슬을 들어 올렸다.
휘웅!
구슬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와 소용돌이치더니 주변의 흉살기가 몰려들어 소용돌이가 잿빛으로 변했다.
한립은 신기한 눈빛으로 구슬을 눈여겨보고는 눈길을 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