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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45화 (1,602/2,000)

1845화. 회계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식세계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낀 한립은 몽롱한 느낌이 들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바닥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는데 손바닥 아래로 메마른 흙을 느꼈다.

온몸이 쓰리고 아파 손바닥을 들어 올려 보아도 시야가 흐릿해서 손바닥이 어떤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힘껏 가로저은 그는 연신술을 발동하고서야 차차 머리가 맑아졌다.

손에는 회백색 먼지 같은 것이 묻어 있었고, 그의 시야가 닿는 곳은 전부 회백색 먼지만 가득했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공간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왔던 것이 떠올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평선 끝과 맞닿은 하늘은 두꺼운 회색 안개가 잔뜩 껴있어 회백색 지면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고, 세 개의 어슴푸레한 빛덩이가 떠 있는 것이 마치 태양이 세 개나 되는 듯 보였다.

아주 낮아 보이는 어둑한 하늘과 회백색 땅 사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공기가 가득 차 있어 가만히 있어도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정좌를 하고 몸 상태를 살피려던 한립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천지와 소통하는 방법을 까먹기라도 한 듯 몸이 천지영기를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선규가 막히기라도 한 것인가?’

흠칫 놀란 한립은 눈을 감고 몸 상태를 살피다 문제는 그의 몸이 아니라 주변 환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천지간에 천지영기라고는 없고 공기 중에 흉살기가 섞여 있었다. 누런 단약을 꺼내 입에 넣은 한립은 몸을 일으켰다.

‘이곳이 어딘 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의식을 퍼트려 수색에 나선 그는 잠시 후 어딘가를 쳐다보더니, 곧 둔광을 일으켜 그곳으로 날아갔다.

십여 리 거리를 단숨에 지나 고공에서 내려다보니 누군가 회갈색 구역에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보라색 장포를 입고 구불구불한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는 석천공이었다.

의식을 잃은 그는 기운이 미약했고 의식 파동도 전혀 없이 갈색 기포를 보글보글 뿜어내는 늪에 빠져있었다.

흉살기가 공기 중보다 훨씬 짙은 이곳에서 석천공은 흉살기에 침식을 받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의 보라색 옥으로 만든 영패가 스스로 주인을 보호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진작 흉살기에 육신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이미 빛이 어둑해진 영패는 반각이 못되어 힘을 잃을 것이 분명했고 그때가 되면 석천공은 완전히 늪에 가라앉아 세상에서 사라질 게 확실했다.

석천공에 대해서 한립은 별 감정이 없었다.

상대에게 자신의 신분을 들키고 싶지 않고, 상대의 정체도 의심스러워서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적의를 갖고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 소매를 털어 푸른 빛으로 석천공을 감싸고 늪에서 빼주려 했다.

그러자 강력한 힘이 석천공을 늪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눈에서 보랏빛을 반짝인 한립이 석천공 아래쪽을 응시했다.

의식으로 살폈을 때는 미약한 영력 파동과 짙은 흉살기만 느껴지고 늪에 숨은 요수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구유마동을 일으킨 그는 번개처럼 몸을 피했다.

그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지면이 진동하면서 회갈색 늪에서 커다란 기포들이 형성되어 검은 연꽃의 꽃잎처럼 중앙으로 겹겹이 밀려들었다.

제때 감지를 하고 피하지 않았으면 그도 늪에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저건 또 뭐란 말인가…….”

석천공이 아직 늪에 빠져있었기에 한립은 내심 짜증을 내면서도 손에서 검빛을 일으켜 금색 뇌전 실로 둘러싸인 푸른 검기를 방출했다.

파치직.

금빛이 폭발하자 짙은 갈색 늪지에서 구륵구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쿵! 폭발했다.

역전진륜 신통을 이용해 늪지의 진흙들을 요리조리 피해 내려간 한립은 석천공의 앞섶을 잡아채고 미친 듯이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백여 장을 날아갔을 때 갑자기 팔뚝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살펴보니 석천공 등 뒤에 새끼손가락 굵기의 촉수 열댓 개가 붙어 있다가 수백 가닥의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 수정실로 분리되어 그의 팔에 엉겨 붙고 있음을 알아냈다.

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강력한 흉살기가 침투해 미세한 상처를 입구로 삼아 체내로 파고들고 있었다.

팟!

미간을 좁힌 그의 어깨에서 은빛이 반짝이고 은염소인이 나타나 그의 팔을 미끌어지듯 타고 내려갔다.

검은 수정실 위에 안착한 은염소인은 입을 벌려 목구멍에서 작열하는 은색 화염을 뿜어 수정실은 물론 석천공 등 뒤의 검은 촉수까지 활활 불살랐다.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검은 촉수는 즉시 석천공을 버리고 습지로 돌아갔다.

“전부 태워 버리거라.”

한립의 명에 은염소인이 펄쩍 뛰어내려 두 팔을 펼치고 거대한 불새로 변해 늪지와 충돌했다.

은색 불길이 주변 백 장으로 펴져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고공에 선 한립은 지면이 조금씩 주저앉아 결국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긴 것을 보았고, 임무를 마친 불새는 은염소인으로 모습으로 돌아가 한립의 어깨에 앉았다.

그런데 얼굴을 찡그린 것이 포식해서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이곳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한립의 질문에 은염소인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다. 체내로 돌아가 쉬고 있거라.”

미소를 지은 한립은 은염소인을 돌려보내고 청죽봉운검을 회수한 뒤 그의 손에 붙들린 석천공을 보았다.

목덜미가 새까만 석천공은 흉살기 침식으로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구유마동을 전력으로 펼쳐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회백색 돌무지에 내려선 그는 석천공을 내려놓았다.

진언문 유적에서 이미 적잖은 부상을 입어 스스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휴우, 어차피 구하는 것 끝까지 해봐야겠구나. 허나 이게 도움이 될지는 그의 운에 달렸겠지.”

한립은 용눈알 크기의 새까만 단약을 꺼내 들었다.

매콤한 냄새가 나는 단약은 그가 이전에 제련해둔 숙살단이었다.

제련이 쉽지 않고 흉살기 제거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한립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해 흉살기 발작을 통제하는 보조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제 겨우 두 알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을 위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한립은 단약을 석천공의 입속에 쑤셔 넣어주고 목을 받쳐 삼키게 했다.

“크윽…….”

단약이 뱃속으로 들어간 석천공은 고통스럽게 신음했고 등 쪽의 상처에서 새까만 흉살기들이 빠져나왔다.

잠시 경과를 지켜보던 한립은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팔의 부상을 돌보고 선원석을 꺼내 선령력을 흡수했다.

자연적으로 천지원기를 회복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보충해야 했다.

* * *

시간이 흘러 하늘이 어둑해지고 회백색 안개와 공기 중의 흉살기가 진해졌을 때 한립이 눈을 떴다.

그의 손에서 진법 원반과 깃발들이 날아가 주변에 박히고 반원형의 금색 보호막이 펼쳐져 두 사람을 보호했다.

석천공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으나 아까처럼 고통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쉬이익.

그의 등의 상처에서는 여전히 검은 안개가 뭉게뭉게 솟아올라 흩어지는 중이었다.

시선을 돌린 한립은 낮보다 더욱 답답해진 느낌에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깊은 곳에서 여섯 개의 보름달이 옅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섯 개의 달을 발견한 그는 의복 안에서 장천병을 꺼내 바닥에 두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작은 병은 반응이 없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병을 거두었다.

보름달이 여섯 개나 있어도 구름층이 너무 두꺼워 달빛이 병의 신비한 변화를 끌어내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그는 주위를 살피고 오른손의 중지와 검지를 세워 손가락 마디에 꽃문양 빛을 반짝였다.

곧 은색 빛의 문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짙은 천지영기와 빛이 새어 나와 주변의 어두운 환경과 대비가 되었다.

한립이 화지 공간으로 들어가 금색 연꽃이 있는 연못 뒤의 죽루로 들어서자 마광이 이미 2층 계단 입구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를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의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담담한 한립의 물음에 마광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동천을 떠나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지금 바깥 상황이 복잡해 그러기는 어렵겠습니다.”

“하하, 아직 이곳이 어딘지 모르고 계시나 봅니다.”

마광은 잘 보이려고 웃음을 흘렸지만 한립은 미간을 좁힐 뿐 궁금한 표정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수사께서도 짐작하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이곳이 바로 회계입니다.”

“마광 수사께서는 회계가 익숙하신 듯합니다.”

“그럴 리가요. 회계는 각 선계에서 줄곧 금지구역으로 통했는데 어느 누가 이곳을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마량을 따라다니면서 관련 소식을 좀 주워들었을 뿐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시지요.”

“살쇠의 겁에 시달리고 있는 수사께서 회계에 들어섰으니 흉살기의 침식에 곤란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회선 육신을 지닌 제가 나서면 수사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괜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은 버틸 만하니까요. 적당한 때가 되어 수사의 도움이 필요하면 당연히 소환할 것이나, 지금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 수사께서는 이곳에 계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혹시라도 선계로 돌아갈 방법을 아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고요.”

한립의 대답에 마광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인사를 하고 2층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바로 떠나지 않고 1층에 넣어둔 회선 시체를 슬쩍 살펴본 다음 밀실 안으로 들어가 차단 금제를 펼쳤다.

진언문 유적에서 수확이 상당해서 <진언화륜경> 공법 외에도 임호, 공수천의 저물대 그리고 방신이라는 회선의 물건까지 손에 넣었다.

나름 한가로워졌으니 무엇이 들어있는지 점검을 할 때였다.

그는 가장 먼저 임호의 보라색 저물탁을 연화시키고는 곧 내용물을 쏟아냈다. 반짝거리는 선원석들이 수북하게 쌓인 것을 보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선원석을 거둔 다음에는 여러 병과 용기를 꺼내 수행 증진과 부상 치료에 도움이 되는 단약들을 확인했다.

좌룡단(左龍丹)이라는 태을 중기 수사가 복용하기 알맞은 단약을 제외하고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물론 수시로 단약을 먹는 한립에게나 그런 것이지 평범한 금선 수사에게는 한 알, 한 알이 보물임이 분명했다.

그 밖에 수많은 물 속성 재료 중에 강렬한 법칙의 힘이 느껴지는 비늘들도 발견되었다.

임호가 입고 있던 남색 갑옷과 기운이 비슷한 것이 갑옷 수리를 위해 지니고 다니던 재료인 듯했다.

저물탁에는 물 속성의 법보들도 있었는데 품질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망가진 남색 거검과 갑옷이 그가 지닌 최상의 보물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아주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법보들 속에서 임호가 그를 기습할 때 사용한 9개의 기이한 화염 문양이 각인된 붉은 구슬이 들어있었다.

“구인류염주!”

그가 시간법칙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피하지 못했을 공격이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구슬을 들어 올려 소중하게 챙겨두었다.

임호의 저물탁 정리를 마친 한립은 이번엔 공수천의 붉은 저물팔지를 들어 올렸다.

붉은빛이 반짝이더니 땅 위에 수북하게 새로운 물건들이 쌓였다. 작은 산처럼 쌓인 선원석의 양에 한립도 혀를 내둘렀다.

공수구에게 찾아낸 것과 양이 비슷했고 그중에 이십여 개는 중품 선원석이 확실했다.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중품 선원석과 나머지 선원석들을 분리해 보관하고 병과 용기들을 살폈다.

연단술 실력이 상당해진 그는 이전에 태을급 단약들도 상당히 구해 놓아서 알아볼 수 있었다.

대부분 태을급 수사가 복용하기 알맞은 단약으로 일단 태을경에 이르기만 하면 한동안 단약이 부족할 일은 없어 보였다.

공수천의 저물탁 안에는 경전과 옥간도 많았고 대부분이 불 속성 공법들에 선역의 지도도 몇 장 들어있었다.

그 중 <대염분천결(大炎焚天訣)>은 불 속성 법칙의 힘을 수련할 수 있는 공법이었는데 그가 수련하며 얻은 깨달음을 주석으로 달아놓아 아주 귀한 물건이 틀림없었다.

나머지 비술들은 잡다하고 불 속성 법칙의 힘을 익혀야 펼칠 수 있어 관심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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