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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43화 (1,600/2,000)

1843화. 멸문의 수수께끼

*

치융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삼과 벽사 선자가 시선을 마주치고 곤란해 했다.

열화선존의 전력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지금 적의 편으로 돌아서면 힘의 균형이 깨져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화세형충만 해도 열화선존이 없으면 상대하기 까다로웠고 말이다.

“그게…….”

열화선존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열화 수사,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기마자가 진언문이 멸문당한 후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종문을 배반하고 천정에 붙었기 때문입니다.”

한립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일깨웠다. 그 소리에 치융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그를 노려보았다.

“네 놈이 무엇이기에 함부로 사부님의 함자를 부르는 것이냐! 이 죽일 놈이…….”

“어째서, 사부님께서는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

열화선존이 말을 끊고 심호흡을 하며 질문을 던졌다.

“영리한 새는 나무를 골라 둥지를 튼다고 했습니다! 사부님의 선택이 틀렸습니까? 당시 진언문 세력이 흥했다고 해도 천정에 비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부님을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전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천정과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요.”

치융이 진언문의 나머지 제자들을 비웃었다.

“허나 노조께서는 늘 천정에 우호적이셨습니다. 충분히 흑산, 복택 등 다른 선역으로 세력을 더 넓힐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으셨고, 천정이 사맹선구라 구역을 나누고 선궁을 지어 선역들을 관리하기 시작했을 때도 지지하셨단 말입니다. 그간의 신의를 저버리고 종문을 공격한 것은 천정입니다…….”

“그리 천진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으니 사부님께서 먼저 종문을 떠나게 하셨겠지요! 천정이 사맹선구를 세우고 진언문에서 제자를 선발해 선궁의 대궁주를 맡게 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결맹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진언문을 경계하기 시작한 거란 말입니다.”

치융이 비웃었다.

열화선존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한립이 말뜻을 알아듣고 입을 열었다.

“교묘한 수법입니다. 사맹선구를 세우지 않았어도 4대 선역은 본래 진언문의 세력 범위에 있었는데 굳이 선궁을 세워 장기적으로 그들이 진언문과 멀어지도록 만들었군요.

진언문의 중요구역에 말뚝을 박아 맥을 끊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부터 진행된 선궁의 거사가 진언문의 멸문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린 것이겠지요?”

“진언문이 천정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부님께서 사맹선궁의 대궁주를 맡게 허락했더라면, 또 목연이 대궁주 자리를 맡아야 한다고 고집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종문이 그리 빨리 멸문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치융은 한립을 힐끗 보고 열화선존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말은 천정이 특사를 파견해 그 일에 대해 상의하기 전부터 사부님은 천정 사람이었단 뜻입니까?”

그제야 눈치를 챈 열화선존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사맹선구를 건설하자는 것도 사부님께서 천정에 올린 제안입니다. 결국에는 천정과 진언문이 척을 질 줄 알았지만 어떻게든 처참한 결말을 막고 종문에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훌륭한 일을 한 것처럼 말씀하십니다만,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종문을 희생한 것 아닙니까. 천정에 의탁하기 위해 분명 무언가 큰 공을 세웠겠지요? 그가 팔아먹은 것이 미라노조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머지 직전 제자 넷도 함께입니까?”

코웃음을 친 한립이 반박했다.

“미라노조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사부님께서 어떤 길을 가셨든 그건 바뀌지 않았을 것이야.”

“솔직히 사맹선구를 건립해 미라노조의 제자 중 하나를 대궁주를 삼겠다며 찾아온 것도 사실은 헛소릴 겁니다. 천정은 그걸 상의한다는 구실로 진언문을 찾아와 내부 사정을 살피고 이 세상에서 진언문을 지울 구상을 했겠지요.”

치융의 말에 입꼬리를 끌어올린 한립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치융은 그를 노려보며 억누를 수 없는 노기를 드러내면서도 상대가 진언문 멸문에 대해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천정 사절이 도착했을 때 진언문에 정체 모를 방문객이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은 누굽니까?”

차차 냉정을 되찾은 열화선존이 질문을 했다.

“그건 우리 윤회전의 전주(殿主) 대인이십니다.”

이번에는 치융이 아니라 호삼이 대답을 했다.

‘윤회전 전주?’

한립도 의외의 대답을 듣고 눈썹을 끌어올렸다.

“미라노조께 천정이 큰일을 벌일 거라 경고하셨지만, 회계에 편견을 지니고 있던 미라노조는 윤회전과 회계가 관련이 있다 여겨 전주를 믿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우리 윤회전과 손을 잡기도 원치 않으셨고요. 그래서 그분도 목숨을 잃고 종문과 제자들도 그리되고 말았지요.”

호삼은 탄식하며 슬픈 일이라는 듯 답했다.

“호삼 수사……. 그 말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진언문이 어쩌다 멸문을 당한 건지 알았단 소린데, 왜 저를 속인 것입니까?”

열화선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일단 수사가 정말로 어쩌다 멸문이 되었는지 모른다는 확신이 없었고, 어찌 되었든 꼭 수사와 동행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호삼은 솔직하게 답했다.

“무슨 말이 그리 많습니까? 사형, 설마 저와 같이 금원선역으로 돌아가 사부님을 만나 뵙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치융은 이제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종문이 멸문한 진상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섭니다. 사부님께서 당시 변고 때 무슨 역할을 하신 것인지 알려주시지요.”

열화선존은 치융을 응시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종문을 배신한 자입니다. 수사의 사백 목연과 사숙 화택이 그의 손에 죽었습니다.”

호삼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단호히 답했다.

그 말에 한립은 수연궁의 머리 큰 아이가 기마자를 죽여야 한다고 했던 일과 목연이 죽기 전에 한에 차 있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당신들 윤회전이 방문한 다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미라노조는 윤회전과의 결맹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천정에 대한 의심은 지울 수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마역으로 가서 시간선기를 맡기고 마주의 공간선기를 빌려와 그걸 이용해 몰래 진언문의 방어진법을 강화하려 했지요. 그게 성공만 했어도 천정이 침공했어도 하루아침에 진언문이 멸망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아쉽게도…….”

“아쉽게도 어찌 되었단 소립니까!”

“기마자 그놈이 미라노조가 윤회전 전주를 만난 일을 천정에 알렸습니다. 천정은 진언문이 윤회전 그리고 회계와 손을 잡았다는 구실을 만들어 진언문 침공을 앞당겼고, 그 결과는 지금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방어진법을 강화하기도 전에 천정이 쳐들어왔고, 급히 진법을 펼치느라 원기를 소진했던 미라노조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지요.”

호삼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직접 시공간 초월을 통해 전장을 경험한 한립은 얼마나 처참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중토선역에 있던 시간도조가 직접 나서서 벼락같이 미라노조를 제압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둘의 수행이 너무 높아 흑토선역 전체가 전투의 여파에 진동해서, 미라노조가 전장을 진언문 영역 내로 통제하지 않았더라면 종문 하나가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호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미라노조의 직전 제자는 총 다섯이었습니다. 단 세 사람만 언급하셨는데 나머지 둘은 어찌 되었습니까?”

한립이 가만히 있다 끼어들었다.

“금원자는 전쟁이 끝나고 실종이 되었다가, 소문에는 수행을 더 쌓아 시간도조에게 도전했다고 합니다. 그 승부에서 패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후로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무양의 경우에는……. 우리 윤회전에 들어와 부전주가 되었습니다.”

“무양 사숙께서도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열화선존은 이제 이런 희소식에도 기뻐해야 할지 걱정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저희 전주께서 미라노조와 만날 당시 함께 있던 분이 무양 부전주십니다. 유일하게 전주 대인의 말을 믿고 힘을 모으고 싶어 했지만 미라노조의 명을 어길 수 없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지요.

그저 사적으로 전주께 연락을 취해 혹시 위기가 닥친다면 자신의 사부를 구해달라고 사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마자의 밀고로 모든 일이 너무 급작스럽게 진행되어 전주께서 도움을 줄 새도 없이 그만…….”

호삼의 설명에 열화선존은 말이 없었고, 한립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옛이야기만 하고 있을 겁니까. 그래서 화치자 당신은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그때 소류가 소리를 높여 다그쳤다.

“오래전 무슨 일이 있었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부님께서 그 일이 있기 전에 사형을 종문에서 피하게 한 것은 분명 사제 간의 정을 생각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당연히 저와 같이 돌아가 사부님을 찾아가야겠지요.”

치융이 진중한 얼굴로 충고했다.

윙윙윙…….

그가 말을 하는 동안 주위로 빽빽하게 화세형충들이 날아올라 불덩이처럼 일렁였다.

열화선존은 고개를 들어 치융을 보다 한립과 호삼을 보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은 눈빛이었다.

벽사 선자는 당장 그와 거리를 벌렸고, 소류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열화선존의 얼굴을 살핀 한립도 손에 든 장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잡음이 들려왔다.

강렬한 공간파동을 감지한 한립이 대전 입구 쪽을 쳐다보니 여인을 안은 보라색 인영이 휘청거리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풍림을 안고 달아난 석천공이었다.

“석 형?”

호삼이 반갑게 소리쳤다.

격전을 펼쳤는지 기운이 매우 불안정해 보이는 석천공은 깨어난 풍림을 놓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소주.”

풍림은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석천공은 대전 안에 모인 이들과 안쪽의 세 가지 보물을 살피다 시선을 뗐다.

“그들이 옵니다…….”

숨을 고른 그가 바깥쪽을 가리켰다.

‘그들’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한립은 얼굴이 굳었고 열화선존도 난색을 표했다.

“회선을 말하는 건가?”

소류도 들은 이야기가 있어 표정이 신중해졌다. 석천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 말이 사실이었단 겁니까? 이계의 그 더러운 종자들이 정말 계면을 뛰어넘어 여기에 들어와 있다고요? 그렇다면 당장 보고해야 합니다.”

치융도 인상을 썼다.

“수가 얼마나 되지?”

“내가 마주친 자들은 대충 태을경의 회선 넷이지만 그들이 끌고 다니는 회계 생물들과 짐승들이 수가 적지 않다.”

소류의 질문에 석천공이 사실대로 답해주었다.

“너희 윤회전은 회계와 사이가 좋지 않았나? 그들과 짜고 우리를 속여 넘기려는 것일지 누가 알아?”

치융이 차가운 눈길로 한립과 호삼을 바라보았다.

호삼은 묘한 얼굴로 반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고 벽사 선자도 미간을 좁히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내부 사정을 정말 모르는 한립이야 말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세 사람이 치융의 추측을 묵인하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화치자 사형, 진언문도 줄곧 회계의 침략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저런 막돼먹은 것들과 정녕 함께할 것입니까? 모름지기 동족이 아니면 그 뜻이 다르다 하였고, 동족이라 해도 뜻이 다르면 당연히 죽여 없애야 하는 법입니다.”

치융이 그 틈을 노려 열화선존을 설득했다. 열화선존은 곤란한 얼굴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믿든 믿지 않든 이번에 회계 인물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호삼이 한숨을 내쉬듯 입장을 밝혔다.

“그런 헛소리는 죽어서나 계속 지껄이거라!”

그 말을 믿지 않는지 치융이 곧장 손바닥을 펼쳐 거대한 붉은 화염 고리를 불러냈다.

전신에 강렬한 화염을 일으킨 그의 곁에서 화세형충들이 윙윙거리며 호삼 등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

“그들입니다!”

그 순간, 눈을 번득인 한립이 큰소리로 외쳤다. 다들 긴장해 대전 바깥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의식으로 멀리까지 살필 수 없던 수사들은 멍하니 공격을 멈추었는데, 잠깐을 참지 못하고 치융이 버럭 성을 냈다.

“무슨 수작이냐!”

그의 손짓에 불꽃 고리가 쾌속으로 돌며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어리석기는.”

금빛을 반짝인 한립이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그것을 가볍게 피하면서 상대를 질책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쿠쿵! 하는 진동과 함께 멀리서 모래폭풍이 몰려들었다.

잿빛 안개 속에 흐릿한 그림자들이 가득한 것을 본 치융도 더는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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