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화.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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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무언가를 생각하다 열화선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화선존은 전당 깊은 곳의 보물 중에서도 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에 핏발이 서고 호흡이 거칠어 지고 있었다.
‘저 탑이 <대오행환세결>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한립은 열화선존이 너무 흥분해 통제를 잃기 전에 전음을 보내 경고를 해주려는데 누군가 큰소리를 쳤다.
“거기 누가 숨어 있는 것이냐!”
붉은 검빛이 전광석화처럼 그와 열화선존이 숨어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콰쾅!
그들 앞의 돌기둥이 부서지고 한립과 열화선존이 몸을 피했다.
붉은 머리카락의 공수천이 불타오르는 거검을 들고 화신(火神)처럼 서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하, 겨우 금선경 버러지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그들의 수행을 한 눈에 알아본 공수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화룡 거검이 거대한 화염 거검으로 변해 한립과 열화선존 앞에 나타났다.
거검에서 떨어지는 엄청난 열기에 주변 공기 속에서 수분이 증발해 뿌옇게 김이 어리고 있었다.
눈을 빛낸 한립의 두 소매 속에서 아홉 자루의 푸른 비검들이 튀어나와 하나로 합쳐지고는 굵직한 뇌전들을 뿜었다.
“가라.”
한립의 명에 푸른 거검이 거룡처럼 치솟아 떨어지는 화염 거검을 향해 날아갔다.
쿠콰쾅!
두 거검이 부딪쳐 굉음을 내고 허공이 격렬하게 떨리다 찢어져 공간균열들이 형성되었다.
화염 거검은 놀랍게도 푸른 거검에 막혀 더는 떨어져 내리지 못했다. 그 모습에 공수천은 자신의 검이 금선경 수사에게 막힌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 틈에 한립은 열화선존을 데리고 금빛을 반짝여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검결을 맺은 그의 손짓에 푸른 거검도 더는 화염 거검과 겨루지 않고 맹렬히 몸을 떨어 화염 거검을 밀어낸 다음 따라왔다.
표정이 가라앉은 공수천은 차갑게 한립을 응시할 뿐 그를 쫓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나머지 네 사람도 싸움을 멈췄고 그들 곁으로 호삼과 남색 피부 여인이 다가왔다.
“려 수사, 열화 수사, 드디어 오셨습니다! 이곳이 진언문 유적의 보물이 숨겨진 곳입니다. 제단 위에 있는 세 개의 보물이 전부 귀중하고, 특히 탑 안에는 <대오행환세결>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니 절대 천정의 손에 넘어가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안색이 창백한 호삼이 그들을 반기며 전음을 보냈다.
“<대오행환세결>이 정말 이곳에 있단 말입니까? 안심하시지요. 저희도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며 전음으로 답했고, 열화선존은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혔다가 원래 표정으로 돌아갔다.
“열화 수사, 호삼의 말이 사실입니까? 저 탑에 정말 <대오행환세결>이 숨겨져 있을까요?”
한립이 그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따로 전음으로 물었다.
“……저 탑은 미라노조께서 항시 가지고 다니시던 선기 ‘미라경당(彌羅經幢)’입니다. <대오행환세결>은 저 안에 있을 겁니다. 려 수사께서 제가 저걸 손에 넣게 도와주신다면 <대오행환세결>만 제가 가져가고 미라경당은 넘겨 드리겠습니다.”
멈칫한 열화선존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능력이 닿는 한 그렇게 하지요.”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상대의 제안을 수락했다.
남색 피부 여인은 호삼보다 혈색이 좋아 보였고, 한립과 열화선존이 금선인 것을 보고는 흥미를 잃은 듯했다.
“아, 아직 소개도 해드리지 않았군요. 이쪽은 역포회의 벽사 선자십니다. 저와 힘을 합쳐 천정 수사들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한립이 공수를 하고 열화선존도 인사를 건넸으나 벽사 선자는 그들을 무시하고 남색 단약을 꺼내 복용했다.
“해요족(海妖族) 출신이라 우리 같은 수사들에게 반감이 있으니 마음 쓰지 마세요.”
호삼이 그걸 보고 난감해하며 전음으로 해명했다.
역포회가 윤회전의 하부 조직이라도 그가 직접 벽사 선자를 부릴 권한은 없었다. 게다가 벽사 선자의 수행은 그보다 높은 태을경 후기라 앞으로 임무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밉보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한립과 열화선존을 달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을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한립은 바로 답했다.
“려 수사, 진언문 유적에 들어서자마자 흩어져서 윤회전 임무를 전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 임무는 저 탑과 그 안의 <대오행환세결>을 갖고 돌아가는 겁니다.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도움을 주세요.”
갑자기 호삼의 말소리가 그의 귓가에만 들렸다. 과연 윤회전의 목표도 <대오행환세결>이었다.
“안심하시지요. 윤회전의 임무인데 당연히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한립은 열화선존과 호삼이 차례로 도움을 청했는데 전부 그러겠다고 답했다. 정말 어느 쪽을 도와줄지는 상황을 지켜보며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열화선존의 귀가 미세하게 꿈틀하고 한립과 호삼을 지나가듯 쳐다보았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맞은편 천정 수사들도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명이 더 나타났습니다! 다들 숨겨 놓은 신통이 있으면 써야 할 때입니다. 이대로 가다가 일을 그르치겠어요!”
치융이 인상을 찡그리며 전음을 보냈다.
“우리 셋 중에 가장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 융 수사 아닙니까? 당신의 신분을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소류가 냉소를 지었다.
그 말에 치융의 얼굴을 가린 한기가 흔들리고 그 안에서 살의가 느껴졌다. 그러나 소류는 치융이 어찌 나오든 두렵지 않다는 얼굴을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공수천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잠시 치융 쪽을 보다 시선을 돌렸다.
“대사를 앞두고 이렇게 떠들 시간이 있습니까? 일단 전력을 다해 저들부터 제거합시다.”
치융이 심호흡을 하며 먼저 살의를 거두었다.
“적들을 멸하고 천천히 이야기하시지요.”
눈썹을 끌어올린 소류도 동의했다.
“그럼 제가 벽사를 맡을 테니, 소류 수사 당신이 호삼을 맡고, 공수천 수사는 나머지 금선들을 죽여 없애는 것으로 합시다.”
치융의 의견에 나머지도 반대하지 않았다. 상의를 마친 그들이 막 움직이려는데 열화선존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다들 잠시 제 말 좀 들어주시지요.”
치융 등이 서로를 살피며 동작을 멈췄을 뿐 아니라 호삼 등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모두 다양한 세력에 속해 있어 보물을 노리고 싸우면 분명 사상자가 나올 것입니다. 허나 저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 회선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들의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진언문 유적에 계면 간 전송진을 건설한 그들 역시 이곳의 보물을 노리고 있는 것 같더군요.
여러분, 회선은 우리 선계 전체의 적입니다. 잠시 우리끼리의 싸움을 멈추고 매복해 있다가 그들을 몰살시킨 다음에 보물을 두고 다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열화선존은 쌍방을 보며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수사들은 한립을 제외하고 모두 깜짝 놀라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었다.
“회선? 그게 사실입니까?”
호삼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확실합니다. 려 수사와 동행을 하다 회선과 마주쳤고 손속을 겨루기까지 했습니다.”
“맞습니다. 분명 회선이었습니다.”
열화선존이 자신을 쳐다보자 한립도 고개를 끄덕이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저 의아한 것은 열화선존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 쌍방의 전투를 막은 까닭이었다.
호삼이 생각에 빠지고 벽사 선자도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시선을 주고받은 치융, 소류, 공수천은 비웃음을 흘리며 몸을 날렸다.
“아무리 시간을 끌고 싶어도 그렇지, 그렇게 터무니없는 핑계를 찾다니!”
열화선존을 향해 비아냥거린 공수천이 화룡 거검에서 불길을 일으켰다. 열화선존과 한립을 노리는 화룡 거검은 이전보다 훨씬 위력이 강해 보였다.
소류는 손을 펼쳐 굵직한 오색 뇌전을 터트려 거목 크기의 오색 뇌전 구렁이 두 마리를 만들어 호삼을 공격하게 했다.
입을 벌려 붉은 불구름을 불러낸 치융은 불구름 속에서 불꽃을 떨어트려 벽사 선자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열화선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이에 한립 쪽도 서둘러 응전을 했다. 뒤쪽으로 물러난 열화선존은 붉은 파초선을 꺼내 힘차게 부쳤다.
쿠르르.
불기둥이 파초선에서 뿜어져 나가 치솟고 열화선존의 입에서 빠져나온 푸른 부적이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부적이 찢어져 푸른 돌풍으로 변하더니 불기둥의 위력을 더욱 상승시켰다.
바람과 불이 합쳐져 몇 배로 커진 불기둥이 화룡 거검을 막으려 했다. 차갑게 웃음 지은 공수천은 수결을 맺어 화룡 거검을 가리켰다.
거검의 화룡 머리가 맹렬히 입을 벌리고 달려들어 불기둥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안색이 달라진 열화선존이 대비를 하기도 전에 불기둥이 뚫리고 그 위로 화룡 거검이 떨어져 내렸다.
열화선존은 묵직한 산에 몸을 눌린 듯 움직임이 느려져 당장이라도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될 형편이었다.
이때, 푸른 잔영이 번득였다.
채채챙.
푸른 거검이 화룡을 막아서고 금속성의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팟!
화염을 품은 거검이 허공에 멈춘 사이 푸른 빛이 나타나 열화선존을 감싸고 백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한립이 열화선존을 구한 것이다.
공수천은 노하는 기색도 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거검의 화룡 머리가 입을 벌려 10개의 붉은 깃발을 방출했다. 깃발이 품은 화염들이 수많은 불새, 불뱀, 불호랑이 허상 등을 만들어내며 무시무시한 화력을 뿜어냈다.
10개의 깃발이 푸른 거검을 둘러싸고 우리를 만들었다.
청죽봉운검과의 연계가 급격히 약해진 한립은 곧장 비검을 불러들이려 수결을 맺었다. 하지만 푸른 거검은 아무리 진동하며 금색 뇌전을 뿜어도 불꽃 우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십방리화번(十方离火幡)에 갇힌 선기는 소환할 수 없다. 흐흐, 이것 없이 무엇을 가지고 싸우나 보자꾸나!”
자신만만하게 소리친 공수천의 머리 위로 대량의 붉은 불길이 흘러나와 화염거검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화염 거검 표면의 화염이 강렬해지면서 하얀 빛덩이를 뭉치고 있었다.
쉭!
사발 크기의 하얀 불구슬은 눈 깜짝할 사이에 커져서 한립을 향해 떨어졌다.
새하얀 불길이 이글거리는 불구슬은 어떤 불순물도 없이 맑고 투명해 보였고 지나는 곳마다 허공에 검은 흔적을 남겼다.
화염이 품은 힘이 대단해서 공간을 태우는 듯했다.
이런 위력적인 하얀 불구슬이 화염 거검에서 예닐곱 개는 더 빠져나와 한립에게 날아왔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한 손을 들어 올려 남색 방패를 불러냈다.
휘리릭 날아오른 방패의 빛이 물의 장막을 형성해 그 안에서 큰 강이 흐르는 것 같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불구슬이 연달아 충돌할 때마다 하얀빛과 남색빛이 교전하면서 파문을 퍼트렸지만, 물의 장막은 터지지 않고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공수천의 표정이 굳었다.
구금된 청죽봉운검을 보고 있던 한립이 수결을 맺자 우리 속의 푸른 거검이 아홉 자루의 작은 비검들로 흩어져 힘없이 떨어졌다.
한립의 소매 속에서 또 다른 아홉 자루의 비검이 빠져나와 공수천이 있는 방향을 향해 쇄도했다.
여유를 되찾은 열화선존도 주문을 외우며 일렬로 떠오른 파초선을 들고 공수천을 향해 부채질했다.
콰르릉!
아홉 줄기의 화염이 파초선에서 빠져나와 합쳐지니 꼬리가 9개 달린 봉황의 모습이 되었다.
구미(九尾) 봉황은 날개를 펄럭이고 만물을 태워 죽일 것 같은 열기를 내뿜으면서 공수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공수천은 즉시 화염 거검을 회수해 크게 휘둘렀다.
화르륵!
대량의 화염 줄기들이 거검을 빠져나와 하늘을 뒤덮는 그물을 만들고 아홉 개의 검기와 구미봉황을 덮쳤다.
폭음이 들리고 각종 검기들이 충돌했다.
한립은 청죽봉운검 아홉 자루로 공수천을 공격하면서도 시선은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호삼과 벽사 선자도 소류, 치융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는데, 그들이 승기를 잡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색 뇌전을 두른 소류는 거대한 오색 뇌전 창을 휘둘러 호삼을 공격했고, 호삼은 오로지 육체적 능력과 공간법보를 이용해서 피해야 했다.
그저 그의 공간법보가 강해서 위기의 순간마다 교묘하게 빠져나갔기에 소류도 한동안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없을 것이다.
벽사 선자도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8개의 맷돌 크기 남색 구슬이 그녀를 둘러싸고 한기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주변의 불바다 속에서 화룡 한 마리가 넘실거리면서 보호막을 공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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