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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38화 (1,595/2,000)
  • 1838화. 흩어지다

    *

    석천공은 입에서 검은빛을 분출하며 수결을 맺어 십자 창을 위쪽으로 날려 보냈다.

    날 끝에 흉흉한 용머리가 새겨진 창은 엄청난 마기를 품고 있었다.

    “가라!”

    석천공의 외침에 검은 창이 거대하게 불어나 검은빛을 만발했다. 용머리 문양도 꿈틀꿈틀 움직이며 포효하고 있었다.

    툭!

    그런데 놀라운 기세를 품은 창에 맞은 회색 그물은 미미하게 떨릴뿐 공격을 막아냈다.

    “어째서!”

    마역에서 명성이 자자한 보물인 마룡극(魔龍戟)이 겨우 그물도 뚫지 못하자 석천공은 식겁했다.

    그때 회색 해골이 지팡이를 휘둘러 회색 화염을 그물 안으로 불어넣었다.

    화르륵…….

    왕성해진 그물의 불길이 검은 창을 휘감아 꼼짝하지 못하게 했고, 마기의 빛이 흩어진 창은 불길에 침식을 당하는지 상면의 용머리 문양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걸 보고 석천공은 이를 악물고 수결을 바꾸었다.

    쿵!

    검은빛을 터트린 창이 느닷없이 폭발해 검은 태양이 떴고, 그 주위로 흑룡(黑龍) 같은 기운이 퍼져나갔다.

    왜곡된 허공이 빼곡하게 하얀 균열로 뒤덮이며 공간 폭풍이 불어왔다.

    회색 그물도 검은 흑룡과 은색 광풍에 더는 내려오지 못했고 창의 폭발로 터져 나온 기운이 네 명의 회선들을 향해 충돌해왔다.

    펑! 펑! 펑! 펑!

    해골 인간은 연달아 비술을 썼으나 확실히 힘에 부치는지 몸의 잿빛이 어두워졌고, 회색 갑옷 청년 등도 다양한 신통을 발휘했지만 뒷걸음쳤다.

    석천공은 그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아 못내 아쉬운 얼굴을 하고는 이내 은빛을 내뱉었다.

    석천공과 풍림을 감싼 빛은 백여 개의 베틀 북 허상으로 변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짜 베틀 북을 구분하기 어려운 회선들은 그들을 쫓지 못했고 그들 뒤의 회색 요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빨리도 도망을 쳤습니다!”

    회색 장포 노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마지막에 펼친 것은 공간법칙 신통이라 잡으려면 쉽지 않을 겁니다. 골 선생, 어쩌면 좋겠습니까?”

    회색 갑옷 청년의 물음에 회색 해골은 답하지 않고 지팡이를 저어 거대 그물을 흩어버렸다.

    그리고는 네모난 판을 꺼내 그 위에 있던 5개의 해골 팻말 중 하나가 깨지는 것을 보았다.

    “방신이 이미 죽었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거만한 면은 있지만 그래도 태을 중기의 수행을 지녔고 은린석(銀鱗蜥)들까지 대동했는데 누가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묘령 여인이 놀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끌끌끌, 진언문 유적에는 선계의 실력자들이 들어와 있고, 우리도 방금 공간법칙을 쓰는 녀석과 마주쳤습니다. 그리 죽은 것은 제 실력을 믿고 자만해 단독행동을 한 방신의 잘못입니다.”

    회색 장포 노인이 냉소를 흘렸다.

    “귀천,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래도 함께 여기까지 온 동료가 죽었는데 그런 태도를 보이다니요!”

    묘령 여인의 질책에도 회색 장포 노인은 괴소를 흘릴 뿐이었다.

    “됐습니다. 임무가 중요하니 다른 일로 대업을 그르칠 수는 없습니다.”

    회색 해골이 차분히 그들을 말렸다.

    “골 선생의 말씀이 맞습니다.”

    회색 장포 노인이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 갑옷 청년도 참으라는 듯 묘령의 여인에게 손짓하자 노인을 노려보던 여인도 화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방신이 죽었단 소리는 그곳의 진법이 망가졌다는 뜻이겠지요. 골 선생,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회색 갑옷 청년이 앞으로 나서서 다시 물었다.

    침음하던 회색 해골은 몸을 돌려 잿빛으로 조진과 육오량의 시체를 거두고 말없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쿠르릉!

    잿빛 안개가 격하게 요동치면서 빠른 속도로 퍼져 회색 요수들을 휩쓸고 나머지 네 회선도 휘감아 날아올랐다.

    아무래도 석천공을 쫓는 듯했다.

    * * *

    진언문 유적의 또 다른 구역에 한립과 열화선존이 나타났다.

    그들 아래쪽에는 바둑알처럼 깃발들이 잔뜩 꽂힌 물웅덩이와 습지가 있었고 그 위로 보랏빛 안개가 가득했다.

    환연습지의 미진환연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으나 이곳의 안개는 환상을 일으키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진언궁입니다. 그곳도 노조께서 자주 폐관 수련을 하던 장소지요.”

    “미라노조께서 자주 머물던 곳이라면 <대오행환세결>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열화선존의 말에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전부 우리의 추측에 불과합니다. 안에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든 전쟁의 화마에 휘말렸으면 파괴되었을 테지요.”

    “진언문 유적에 회계까지 침투해서 상황이 복잡해졌으니 어찌 되었든 하루빨리 일을 마치고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겉보기에 안전해 보이는 곳도 공간균열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고요. 별생각 없이 속도를 내서 돌아다니다가는 위험한 상황에 빠질 겁니다.”

    열화선존이 근심을 드러냈다.

    “영목 신통으로 숨겨진 공간균열까지 찾아낼 수 있으니 그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몸에 보랏빛을 일렁이게 했다. 그 안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문양들은 짙은 마기를 품고 있었다.

    열화선존이 그걸 보고 표정이 묘해졌다.

    한립은 그의 변화를 눈치챘으나 계속해서 수결을 맺고 두 눈으로 보랏빛을 모아 팔뚝 길이의 수정빛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이제 되었습니다. 서두르시지요.”

    한립이 먼저 속도를 높이고 그를 지켜보던 열화선존도 서둘러 따라갔다.

    그렇게 반 시진을 이동해 그들은 습지를 완전히 벗어나 광활한 해역에 도착했다.

    눈발이 날리는 해역 위로 거대한 빙산(氷山)들이 있어 절경을 만들어냈다.

    열화선존이 원반 형태의 법기를 꺼내 방향을 확인한 덕에 둘은 둘레가 만 리 정도 되는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보니 섬 중심에 새하얀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서 하얀 거검이 하늘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위에 새하얀 빙정옥(氷晶玉)으로 지은 거대한 궁전이 광채를 번득였다.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한 궁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전의 다른 궁전들과 달리 파손되지 않은 이곳에는 ‘진언궁’이라는 글자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여기는 멀쩡한가 봅니다. 잘 됐네요!”

    열화선존이 환호하며 웃음 지었다.

    “진법도 온전한 상태라 내부로 진입하기 어렵겠습니다.”

    두 눈에서 보랏빛을 반짝이고 있는 한립은 궁전 주변의 허공을 살피고 말했다.

    “살상력이 강하면서도 은밀하기로 손꼽히는 ‘양의미진진’ 진법입니다. 태을경 수사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을 감응해 내셨군요!”

    “걱정 없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이미 어찌 안으로 들어갈지 생각해두신 것 같습니다.”

    “허허! 외부인이야 들어가기 어려워도 제가 있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열화선존은 은색 옥판을 꺼내 허공에 던지고 법결을 흡수시켰다.

    웅!

    옥판에서 흘러나온 은빛이 그와 한립을 감싸고 빠르게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공간이 울리면서 하얀빛이 마구 교차했는데, 그 길이와 굵기가 제각각으로 진언궁을 중심으로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양의미진진…….”

    한립은 그것을 자세히 봐두었다.

    하얀빛은 진법의 가장 표면적인 현상이었으나 극히 복잡해서 구유마동으로 보아도 눈앞이 현란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각각의 빛 속에 아주 작은 독립된 세계가 존재해서 산과 강이 있고 짐승들이 돌아다니니 이렇게 현묘할 수가 없었다.

    양의미진진의 위력이 예상보다 더욱 강하자 한립도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 있게 나선 열화선존도 아주 신중한 얼굴로 연달아 수결을 바꿔가면서 그들을 감싼 은색 빛구슬을 미세하게 조종해 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장장 반 시진이 넘게 흘러서야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전방의 진법이 돌연 변화를 일으켜 물방울 같은 검은 빛구슬들을 형성하고 새까맣게 물결쳤다. 물결이 점점 거세지고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강력한 살의가 전해져 왔다.

    “후반부 금제가 보통이 아니라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될수록 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열화선존의 당부에 한립도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열화선존이 은색 빛구슬을 조종해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검은 물결이 극심하게 떨렸다.

    수축한 검은 물방울 사이로 어렴풋이 진언궁 대문이 보일 정도였다. 두 사람 뒤쪽의 진법도 하얀빛이 어두워지면서 흩어지고 있었다.

    이에 한립의 얼굴은 굳었고, 얼떨떨해하던 열화선존도 빠르게 수결을 맺어 남은 진법 구역을 지나 진언궁 대문 앞으로 갔다.

    “저도 진법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진법의 눈은 진언문 내에 있겠지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봅니다.”

    “그럼,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안에 들어갔단 이야기가 아닙니까!”

    진언궁 대문을 바라보는 한립을 보고 열화선존이 안색이 급변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들은 궁전의 문에 비해 궁전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고, 입구 안쪽으로 아주 긴 통로가 시야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한립은 의식이 어둠 속의 무형의 힘에 튕겨 나오는 것을 감지하고 열화선존에게 어찌된 일이냐는 얼굴을 했다.

    “려 수사, 제게 물어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양의미진진은 일전에 우연히 진법도를 본 적 있어 들어오는 방법을 알았지만 이곳은 저도 처음이란 말입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 그럼 들어가 보지요.”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먼저 궁전 문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고, 열화선존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어두운 길은 특수한 금제의 영향을 받는 듯 그들의 시야와 의식을 제약했다. 십여 장 범위를 제외하고는 그냥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주위가 고요해 그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타박타박 울리고 일각이 지나도 길은 끝나지 않았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속도를 낼 수도 없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적막한 공간에 양옆이 석벽으로 가로막힌 곳을 끝없이 걷다 보니 기분이 가라앉았고, 오래지 않아 열화선존은 점점 호흡이 가빠오는 듯했다.

    한립도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이때, 아주 작게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즉시 걸음을 멈춘 한립은 선령력을 끌어 올렸지만 전방의 소리는 환상처럼 바로 사라졌다.

    “열화 수사, 방금 그 소리를…….”

    무심코 열화선존을 보려 고개를 돌린 한립은 말을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옆에 붙어서 걸어가던 열화선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화 수사!”

    목청껏 외쳐보아도 통로를 울릴 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환술에 걸린 것은 아니겠지?”

    얼굴빛이 어두워진 그는 바로 방대한 의식을 운용해 보았으나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마광 수사…….”

    화지 공간의 마광에게 의식연계로 말을 걸려던 한립은 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와 마광과의 연계가 사라졌고 머릿속의 의식도 신비한 힘에 구속된 듯 바깥으로 분출할 수 없었다.

    화지공간 뿐 아니라 몸에 지닌 어떤 저물법기와도 연계가 불가능했다. 이건 환술이 아니라 모종의 금제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앞뒤를 살핀 그는 빠른 걸음으로 전방으로 나아갔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가 돌아가고 싶다고 금제가 그를 보내줄 리도 없었다.

    핑!

    몇 걸음 가지 않아 앞쪽에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검은 빛의 화살이 놀라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시야가 제한되었지만 빨리 반응해 옆으로 비켜선 탓에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누구냐!”

    걸음을 멈춘 한립은 어둠을 향해 크게 외쳤다.

    쿠르릉.

    진동하던 통로가 차차 고요해지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코웃음을 친 그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또 파공음과 함께 검은 빛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막 몸을 틀어 빛의 화살을 피하려 할 때 괴이하게도 주위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완전히 암흑 상태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반응이 느려진 그의 어깨를 두 번째 화살이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빛의 화살은 스치기만 했는데도 불에 달군 칼로 어깨를 베고 혼백까지 찌르는 것 같은 극통을 느껴야 했다.

    “이런…….”

    한립은 선령력을 일으켜 푸른 빛으로 주변을 밝히려 했으나 아무리 운공을 해도 여전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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