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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37화 (1,594/2,000)

1837화. 단서

*

청죽봉운검을 불러들인 한립은 회선이 하는 행동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무슨 수법을 쓰기에 9품 선기가 함유한 법칙의 힘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힐끗 열화선존 쪽을 보니 정염불새와 도병들의 도움으로 몇몇 푸른 원숭이들의 사체들이 나뒹굴었으나 아직도 남아 있는 괴물들이 많아 이쪽을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속전속결을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야 한다.’

마음을 정한 한립은 은은한 금색 영역을 그와 회선 그리고 거대 괴물을 감쌀 만큼 퍼트렸다.

“이형환형(移形換形)…….”

그는 암암리에 법언천지 신통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백포 청년은 홀연히 자신의 몸이 한립과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립은 머리가 잘려 녹색 핏물을 마구 뿜어대는 거대 괴물 어깨에 서서 검을 거두고 있었는데, 얼굴에 튄 핏방울이 끈적하고 따끈한 것이 환상 같지는 않았다.

핏물을 뒤집어쓰고 서 있는 한립을 보며 그는 당황했다.

“효수(梟首)…….”

다시 한립이 입술을 달싹이자 백포 청년은 목이 서늘해지면서 눈앞에서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걸 보았다.

그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안 돼…….”

분리된 머리가 비명을 지르고 눈동자에서 은회색 빛이 흘러나와 손바닥 크기의 은회색 소인으로 변해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그가 막 둔술을 펼치려는 순간, 하늘과 땅의 위치가 원래 대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몸이 멀쩡하게 거대 괴물의 어깨 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길!”

노기를 드러낸 은회색 소인이 둔광을 거두고 몸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선금광(洞漩金光)…….”

은회색 소인 뒤 허공에 금색 소용돌이가 떠올라 희미하게 불경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주변 공기가 묵직해진다고 느낀 은회색 소인은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상대가 소용돌이에 잡아먹히려는 순간 한립은 그곳으로 날아가 소인을 손바닥 위로 끌어들인 후, 미간에서 수정실을 뿜어 강제로 추혼술을 행하려 했다.

팟.

격렬하게 저항하던 소인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복부에서 갑자기 잿빛을 일으켰다.

불길한 직감에 서둘러 금제를 걸어보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은회색 소인이 터져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손을 털어낸 한립은 몸을 돌려 거대 괴물을 돌아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이 죽자마자 괴물이 입을 쩍 벌려 주인의 시체를 삼키려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모습에 코웃음을 친 한립은 청죽봉운검 9자루를 합일해 곧장 금색 뇌전 구슬을 응결하고는 괴물을 베었다.

쿵!

거대 괴물의 몸과 그 아래 지면까지 검에 수직으로 갈라져 대량의 녹색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검을 거둔 한립은 회선의 육체를 취한 뒤 그의 몸을 뒤져보았다. 그런데 방금 사용한 검은 영패는 보이지 않고 뼈로 만든 하얀 팔찌만 차고 있었다.

“이게 저물법보인가?”

의아한 마음에 연화를 시키려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하얀 팔찌를 대충 손목에 차고 화지 동천을 열어 회선 시체를 마광이 거주하는 누각 1층에 던져 넣고는 다시 동천을 봉했다. 그리고 영역을 회수해 열화선존 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니 나머지 회계 생물들은 금방 처리할 수 있었다.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시체를 보고 열화선존의 주름이 깊어졌다.

“전부 회계에서 왔단 말인가…….”

“열화 수사, 회계 생물들이 나타났는데 수색을 계속하시겠습니까?”

한립은 차분하게 입을 뗐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고 돌아가야 마음이 편하겠지요.”

“하하, 제 생각도 같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갔다.

수백 걸음도 채 가지 않아 전방에 기이한 돌멩이로 이루어진 원형 진법에서 회백색 안개와 공간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원래 진언문에 존재하던 진법입니까?”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종문에서 사용하던 진법도 아니고요.”

“그럼 그 회선 녀석이 펼친 것이겠군요.”

“회계와 선계 사이의 막은 그 어느 곳보다 계면의 힘이 강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회계의 인물이 어찌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걸까요? 겨우 이 진법으로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글쎄요, 공간 파동이 그리 강하지 않아 계면을 뚫고 전송할 만한 힘은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군요. 게다가 진법 자체가 완전하지 않고 거대한 공간 진법의 일부분인 듯합니다. 제 생각에는 회계 생물들은 다른 경로로 여기까지 왔을 겁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게 어느 진법의 일부라는 말씀입니까?”

“이게 거대 진법의 일부라면 우리가 마주친 회계 생물들은 이곳을 지키는 소부대일 수 있습니다. 아마 진법을 완성하면 회계와 선계 사이에 본격적으로 통로가 생기게 되겠지요.”

“그거야말로 선계의 재앙이 아닙니까…….”

“회계 인물들이 진언문 유적에 돌파구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이곳의 공간이 혼잡해 선계에 비해 계면의 힘이 약하다는 점을 노렸을 겁니다. 하지만 진언문 유적의 공간이 무척 불안정해서 이런 대규모 공간통로를 버텨내지 못할 거란 건 몰랐나 보군요.”

“려 수사의 의견은 그들이 공간통로 건설을 마치면 이 공간 자체가 균형을 잃고 허물어질 수도 있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얼마 전 공간 난류에 휩쓸린 적이 있는데 이미 남아 있는 육지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데 강대한 충격을 받아 균형이 깨지면 붕괴를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놀란 열화선존의 물음에 한립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서둘러야겠습니다. <대오행환세결>을 찾아 어서 이곳을 떠나시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회계 생물까지 유적 내에 있다니 시간이 없습니다. 고계 회선이라도 마주치면 상대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요.”

두 사람은 돌멩이로 이루어진 진법을 분해한 다음 재료를 나눠 가졌다.

그 후, 골짜기 안을 꼼꼼하게 뒤졌지만 애석한 사실만 알아냈다. 미라노조가 폐관 수련하던 동굴은 당시의 엄청난 전투로 이미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골짜기를 떠났고, 열화선존의 기억에 의지해 진언궁(眞言宮)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 * *

한립과 열화선존이 회계 생물의 기습을 받는 동안 석천공 무리는 조진, 육오량과 교전을 마치고 두 산봉우리가 무너져 내려 더는 골짜기라 볼 수 없는 폐허에 서 있었다.

그나마 석천공, 풍림 딱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둘 다 안색이 창백하고 의복이 찢어져 중상을 입은 듯했다.

특히 풍림은 어찌나 얼굴에 핏기가 없는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안색이 좋지 않음이 한눈에 보였다.

그들 옆에 놓인 시체 3구 중에는 조진과 육오량의 것도 있었다. 둘 다 머리와 몸이 매끄럽게 분리된 상태였다.

마지막 자청의 시체는 괴이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피부 곳곳이 터져나가 흑자색 피를 쏟아 냈는데, 그 핏물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치익 소리가 나면서 땅이 부식되었다.

그 위로 보라색 소인, 그러니까 자청의 원영이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며 분노에 치를 떨고 있었다.

“조진이 이렇게 강력한 상고 독술을 익히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구라천독(鳩羅天毒)에 당해 자청 수사의 몸은 되돌릴 수 없겠어요.”

풍림은 은근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자청이 그렇게 된 것을 기꺼워하는 것 같았다. 자청의 원영은 곧장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풍림을 노려보았다.

“자청, 너는 저들을 죽여 큰 공을 세웠으니 마역으로 돌아가는 대로 내 적합한 육신을 찾아줄 것이다. 게다가 부친께 청해 마원 성지에서 수련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면 만 년이 못 되어 전성기의 실력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노력하기에 따라 그 이상의 성과를 낼 수도 있겠지.”

석천공은 대수롭지 않게 그들 사이에 서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소주!”

자청은 기뻐하며 조그만 손으로 포권을 했고, 풍림은 눈빛이 흔들렸다.

“원영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제 화마(化魔) 호리병 속에서 쉬거라.”

석천공은 검은 호리병박을 꺼내 새까만 빛으로 자청의 원영을 둘러싸 넣어두었다.

“풍림 너도 큰 도움이 되었으니 마역으로 돌아가면 자연히 상이 내려질 것이야.”

“감사합니다, 소주!”

“저들과 너무 시간을 끌었어. 전장을 정리하는 대로 출발한다.”

“예!”

석천공의 명에 풍림이 날아올랐다.

조진과 육오량 시체 옆에 선 석천공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때 괴이하게도 산골짜기 밖 허공이 웅! 떨리고 괴이한 잿빛이 반짝였다.

이어서 아주 가느다란 회색 균열이 나타나 그 안에서 안개를 뿜어 하늘을 잿빛으로 만들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석천공은 산골짜기가 안개로 덮이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변해 수결을 맺었다. 보랏빛을 만발하는 고리가 머리 위에 떠올라 빛으로 그의 전신을 보호했다.

이상을 감지하고 즉시 그 옆으로 돌아온 풍림도 보랏빛 거대 깃발을 꺼내 몸을 보호했다.

회색 안개는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졌고 그 안에서 짐승이 울부짖고 악귀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시로 잿빛 뇌전까지 번득여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저게 바로 정 노인을 집어삼킨 이상한 안개입니다! 어서 떠나셔야 합니다.”

풍림이 긴장된 기색으로 보고를 했다.

“가자.”

석천공은 망설임 없이 소매를 털어 보랏빛으로 자신과 풍림을 감싸고 날아올랐다.

그 순간, 잿빛 안개가 굼틀거리고 항아리 굵기의 두꺼운 잿빛 뇌전이 튀어나와 천 장 거리를 건너뛰고 보랏빛 둔광을 공격했다.

쾅!

둔광이 터지고 석천공과 풍림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풍림은 직접 뇌전을 맞은 듯 왈칵 피를 쏟아 내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풍림!”

몸을 가눈 석천공은 그녀가 혼절한 것을 보고는 보랏빛을 날려 그녀를 치료해주려 했다.

그때 네 명의 회색 인영이 안개 속에서 쏜살같이 석천공과 풍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머지 셋은 그래도 제대로 된 몸을 갖추고 있었지만, 회백색 화염이 눈알 구멍을 채운 두건을 쓴 인영은 해골 인간이었다.

회색 갑옷을 걸친 청년은 십(十) 자 형태의 보라색 창을 들고 찬란한 은발을 휘날리는 미남이었고, 자태가 수려한 묘령의 여인은 넉넉한 품의 장포를 입고도 아리따운 몸매가 숨겨지지 않았다.

여인은 날아들면서도 수시로 회갑(灰甲) 청년을 힐끔거렸다. 마지막 회백발의 못생긴 노인은 아주 나이가 많아 보였고 잿빛 눈동자에 냉기가 흘렀다.

네 사람 뒤로 회색 안개가 따라오면서 잿빛의 요수들이 나타났다.

사자, 호랑이, 늑대, 원숭이 등 있을 만한 것은 다 있었고 전부 석천공과 풍림을 노리고 있었다.

“회선!”

석천공은 그들을 보자마자 정체를 눈치채고는 놀라 소리쳤다.

그는 허둥거리지 않고 어마어마한 뇌전법칙과 파동을 발산하는 손바닥 크기의 검은 부적 네 장을 날려 보냈다.

쿠르릉!

검은 부적 네 장이 찢기며 칠흑 같은 뇌전이 네 사람을 향해 떨어졌다.

“빠르게 끝냅시다!”

네 명의 회선 중 해골이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 잿빛이 반짝이고 백골 지팡이가 나타나 회색빛이 뻗어 나갔다.

석천공이 방출한 검은 뇌전들은 회색빛을 만나 가볍게 흩어지고 대부분 녹아내렸다. 그 모습에 석천공은 풍림을 안은 채 몸을 날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잡아라.”

회색 해골의 나지막한 명령에 남은 회색빛이 그 뒤를 쫓았다.

회색 갑옷 청년은 창으로 허공을 찔러 용 모양의 빛을 쏘아 보냈고, 묘령의 여인은 회색 채찍을 불러내 대량의 채찍 허상을 방출했다.

회색 장포 노인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워 보물을 사용하는 대신 입에서 기다란 회색빛을 내뱉었다.

네 가지 회색빛이 한데 뭉쳐져 거대한 그물을 이루고 석천공을 덮쳤다. 보일 듯 말 듯 어린 그물의 회색 화염이 석천공과 풍림을 위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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