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36화 (1,593/2,000)
  • 1836화. 괴인

    *

    “어찌 되었든 의식의 힘이 제약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니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겁니다.”

    한립의 당부가 끝나기 무섭게 파공음이 들려왔다.

    대숲의 짙은 안개 속에서 수백 개의 초록빛이 도깨비불처럼 일어나 곳곳에서 튀어 나왔다.

    “조심!”

    한립은 경고하면서 오른손을 뒤집어 청죽봉운검을 불러내 금빛 뇌전을 번득였다.

    뇌전이 응결해 기다란 채찍처럼 변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옆의 열화선존도 금색 거울을 꺼내 들고 다른 손으로 커다란 붉은 파초선(芭蕉扇)을 불러내 앞에서 달려드는 수십 개의 녹색 불덩이를 향해 세게 부쳤다.

    촤지지직!

    벽사신뢰가 뭉친 채찍이 빛의 호선을 그릴 때마다 도깨비불이 터져나갔으나 그 안의 녹색 구슬은 남아 여전히 다가오고 있었다.

    펄럭! 펄럭!

    붉은 파초선의 불꽃 문양이 빛을 발하며 도깨비불과 비슷한 크기의 붉은 불덩이들이 날아갔다.

    붉은색과 녹색 불덩이가 충돌하자 힘겨루기를 하지 않고 곧장 사라졌다.

    “려 수사, 화염에 맥을 못 추는 듯합니다!”

    열화선존의 귀띔에 진작 그쪽을 주시하고 있던 한립은 어깨 위로 손바닥 크기의 은염소인을 불러냈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편 소인은 주변에서 날아드는 녹색 불덩이들을 보고 손뼉을 쳤다.

    “가보거라.”

    은염소인의 모습에 한립은 웃음을 지으며 명을 내렸다.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은염소인이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려 두 팔을 활짝 펴고 불새의 형태로 녹색 불덩이를 향해 날아갔다.

    한립과 등을 맞대고 있던 열화선존은 불새의 파동을 감지하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입을 쩍 벌렸다.

    “정염지화!”

    그는 한립을 향해 부러워 죽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

    그러나 한립은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마량의 입을 통해 정염불새가 진선계에서도 희귀한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쿠쿵…….

    정염불새의 은색 날개에 녹색 구슬들이 스칠 때마다 폭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하지만 정염불새가 무언가를 질색하는 듯한 느낌을 감지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평소 어떤 불길을 잡아먹어도 즐거워 날뛰던 정염불새가 녹색 불길과 접촉해 이런 감정을 드러낸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만일에 대비해 서둘러 의식으로 정염불새에게 돌아오라 알렸는데 뜻밖에도 불새는 돌아오지 않고 기괴한 녹색 화염을 쫓아 대숲을 지나면서 안개까지 뚫고 지나갔다.

    그제야 안개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수많은 기괴한 그림자들이 눈에 보였다.

    대부분 곱사등이여서 폭삭 늙어버린 노인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뒤로 온몸에 가시가 돋은 7, 8마리의 거대 그림자도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장포를 걸치고 산바람에 옷섶이 팔랑거리는 보통 사람처럼 생긴 신영도 존재했다.

    정염불새가 안개를 없애주지 않았으면 이런 괴인들이 안개 속에 도사리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온 정염불새는 은염소인의 모양을 하고 그의 어깨에 내려서서 씩씩거렸다.

    “저것들은 또 뭐란 말입니까?”

    열화선존도 괴인들을 보고 한립 옆으로 물러났다.

    “큼, 모유지화(暮油之火)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려 했건만, 들켰구만.”

    안개 속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운데 서 있는 평범한 신영이 말을 한 것이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열화선존이 물었으나 그자는 답하지 않고 목에서 구륵구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종족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주변의 괴인들이 전부 행동을 개시했다.

    등이 굽은 노인의 그림자들은 행동이 아주 민첩해서 원숭이처럼 대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넓게 퍼져 그들을 포위했고, 거목 같은 거대 그림자들은 대나무를 뚝뚝 부러뜨리면서 전진했다.

    중앙의 신영만이 움직임 없이 점점 안개 속에 가려져 사라지고 있었다.

    “왔군.”

    두 눈에서 보랏빛을 번득인 한립이 고개를 들어 고공을 보자 열화선존도 화들짝 놀라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대나무 위로 원숭이를 닮았으나 털이 없고 청회색 피부를 지닌 괴생명체들이 매달려 잿빛 날개를 늘어트리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괴생명체들은 대나무를 박차고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몸을 틀어 한쪽으로 피했다.

    쿵!

    그를 향해 달려들었던 청회색 원숭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지면이 울리고 바닥이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졌다.

    괴물은 체형이 그리 크지 않았고 엄청 무거워 보이는데도 속도는 빨랐다. 게다가 신경 쓰이게 두 눈이 죽은 물고기처럼 청회색이었다.

    주변에서 괴물 여럿이 회백색의 낭아봉을 들고 포위하듯 달려들고 있어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한립은 손을 펼쳐 금색과 은색의 뇌전 구슬을 던져 터트렸다.

    오로로…….

    금색과 은색의 뇌전이 하늘을 뒤덮고 거대한 뇌전들에 맞은 십여 마리의 청회색 원숭이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그들의 몸에서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한편 열화선존은 붉은 파초선에서 부단히 불덩이를 방출했지만 불길에 휩싸여 떨어진 괴물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한립은 청죽봉운검을 쥐고 흐릿하게 사라져 뇌전을 맞고 떨어진 원숭이 괴물을 찔렀다.

    푸른 피부 원숭이는 깜짝 놀라 두 손으로 회백색 낭아봉을 잡고 검을 막으려 했다.

    챙!

    한립의 검 끝이 회백색 낭아봉과 맞닿아 진동을 했다.

    그러다 차칵! 균열이 생기면서 짙은 흉살기가 새어 나와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미간을 좁힌 그는 발로 냅다 원숭이를 차버려 뒤쪽의 거대 신영과 부딪히게 했다. 그것은 거대한 몸에 은회색 비늘 갑옷을 두르고 있어 도마뱀과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거대 도마뱀 괴물은 동공이 없고 크게 벌린 입에 날카로운 이빨들이 다닥다닥 자라있었고 두껍고 짧은 다리는 움직임이 빠르지 않았다.

    도마뱀 괴물은 청회색 원숭이를 밀어버리고 입을 벌려 커다란 녹색 불구슬로 한립을 공격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어깨 위의 은염소인의 머리를 토닥였다.

    화륵!

    그러자 은염소인이 물처럼 그의 전신을 흐르면서 은색 화염으로 갑옷을 만들어냈다.

    양손으로 청죽봉운검을 단단히 쥔 한립은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녹색 불구슬을 반으로 가르고 정염불새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 중간으로 통과해 거대 괴물에게 접근했다.

    “가둬라.”

    괴물의 목에 금빛이 번득이고 커다란 자물쇠가 나타나 철컥! 걸렸다. 괴물의 뺨에 커다란 ‘쇄(鎖)’ 자가 금빛으로 떠올라 구속했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한립이 거의 액체화된 금색 뇌전실을 일으켜 청죽봉운검을 거대 괴물의 머리로 찔러넣었다.

    그때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 금색 자물쇠에 구속당해 꼼짝하지 못하던 거대 괴물이 거대한 입에서 녹색 화염 덩어리를 방출해 코앞에 있던 한립을 맞춘 것이다.

    쿵!

    가슴에 강한 일격을 맞은 한립은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그의 몸을 두르고 있던 은색 화염이 빠르게 녹색 화염을 잡아먹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한립은 원숭이 괴물과 거대 괴물을 상대하는 열화선존이 아직 당황해하지 않는 것을 힐끗 보고, 고개를 돌려 금색 자물쇠에 구금된 거대 괴물 어깨를 보았다.

    그곳에는 달빛처럼 은은한 하얀 장포를 걸친 청년이 기괴한 수결을 맺고 빙긋 웃고 있었다.

    괴물들 중앙에 서 있던 자였다.

    언뜻 보면 인족처럼 생긴 청년은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눈썹과 코, 입술 모두 따로 보면 괜찮은데 뭔가 조화롭지 않았고 괴이하게도 두 눈동자가 은회색이었다.

    ‘회선!’

    “처음으로 이종족과 겨뤄보는 거라 호기심에 지켜보기만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군요. 당신은 약간이지만 우리의 기운이 느껴져서 기대했는데요.”

    백포 청년이 열화선존을 바라보다 고개를 틀어 한립을 보고 입을 열었다. 한립은 말없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상대가 수결을 맺자 몸에서 보일 듯 말 듯 회색빛이 흘러나왔는데 그 기운이 명한선부에서 만났던 묵우와 비슷했다.

    “대답하지 않겠다……. 후후. 선계에서 우리 회계를 미개한 변두리라 무시한다던데, 오늘 보니 선계 수사들의 실력이 소문만 못합니다.”

    백포 사내가 멸시가 담긴 웃음을 흘렸다.

    그는 말을 하면서 손바닥을 거대 괴물의 목에 걸린 자물쇠에 대고 잿빛을 방출했다.

    그러자 거대 괴물 뺨의 금색 글자가 억제당한 듯 어두워졌고 은은한 잿빛에 구속당하던 괴물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자물쇠의 시간법칙의 힘을 억누른 거지?’

    한립이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주위의 십여 마리의 푸른 원숭이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에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도병을 담아둔 호리병을 꺼내 법결을 던져 넣었다.

    후두둑.

    호리병 입구에서 노란빛과 함께 암황색 콩알들이 비처럼 쏟아져 수백 마리의 도병으로 변해 원숭이 괴물들을 공격했다.

    “오, 그게 도병이란 건가요? 재미는 있습니다만…….”

    백포 청년은 흥미진진하게 한립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난 보호할 것 없으니 열화 수사를 도와주거라.”

    한립은 살짝 고개를 숙여 자신을 지키고 있던 정염 불새에게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전신을 덮고 있던 은색 전신 갑옷이 머리부터 흘러내려 은빛 불새로 변해 날아올랐다.

    열화선존은 거대 짐승 몇 마리와 푸른 원숭이에게 둘러싸여 공격당하고 있었는데 금색 거울의 보조가 없었으면 진작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회선들은 흉살기를 몸에 주입해 공법을 익힌다는데 몸 밖으로 밀어내는 공법은 없습니까?”

    백포 청년과 마주 보고 있던 한립이 물었다.

    그의 질문에 상대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끌어올렸다가 곧 무언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어쩐지 체내의 흉살기가 짙더라니. 우리의 공법에 미련을 두고 있었군요. 어디서 우리 공법을 얻어 수련한 겁니까?”

    “아무래도 추혼술을 펼치는 게 빠르겠구나…….”

    한립은 혼잣말을 하며 발끝으로 지면을 박차고 올라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흐릿하게 사라졌다.

    그 엄청난 속도에 움찔한 백포 청년은 지금까지 한립이 고의로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빛이 가라앉은 청년은 두 눈에서 회색빛을 강하게 발산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스스.

    실체화된 검은 흉살기가 그의 등 뒤에서 빠져나와 거대한 방패처럼 그곳에 나타난 한립을 막아섰다.

    캉!

    검으로 흉살기 방패를 내리친 한립은 높이 튕겨 올라갔다.

    동시에 그의 손짓에 거대 괴물의 목에 있던 금색 자물쇠가 반짝이고 회선 청년의 발목으로 이동해서 몸집을 줄였다.

    금색 ‘쇄’ 자가 청년의 가슴에 떠올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몸이 뻣뻣해진 회선 청년은 등 뒤로 만들어낸 검은 방패와 같이 그 자리에서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

    그러나 한립은 무턱대고 다가가지 않고 비취색 호리병을 꺼내서 그 입구를 청년 쪽으로 기울였다.

    그가 호리병 아래쪽을 힘차게 때리자 입구에서 녹색 소용돌이가 나타나 축적된 강렬한 기세를 발산했다.

    이에 회선 청년의 안색이 확 달라져 잿빛을 발하면서 검은 영패를 꺼내 던졌다.

    날아오른 검은 영패는 방패 크기로 커져서 표면에 새겨진 짐승 머리 조각상이 두 눈에서 붉은빛을 반짝였다.

    영패의 짐승 머리 조각이 돌연 입을 벌려 입안의 핏빛 소용돌이에서 기이한 파동을 내뿜었다.

    콰릉!

    거의 동시에 뇌성과 함께 푸른 검빛이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청죽봉운검이었다.

    영패의 핏빛 소용돌이가 내뿜는 핏빛이 청죽봉운검과 충돌했다.

    쩌정!

    비검을 감싼 녹색 광채가 흩어지고 핏빛도 깨져 영패 속으로 돌아 들어갔다.

    이제야 눈앞의 인족 수사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회선은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그는 손목을 틀어 은회색 수정빛을 장갑처럼 끼고 발목의 자물쇠를 비틀었다. 웅웅 떨리던 자물쇠의 금빛이 사라지면서 찰칵! 하고 강제로 풀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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