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35화 (1,592/2,000)

1835화. 공령죽곡(空靈竹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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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움이 가시고 열화선존이 업은 목연 시체를 본 한립은 어둑한 전방을 쳐다보았다.

“려 수사, 가십시다.”

열화선존은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손바닥을 뒤집어 복숭아 크기의 새하얀 구슬을 던져 길을 밝혔다.

하얀빛이 호선을 그리면서 날아가 어두운 통로를 비추자 그 끝에 두 그루의 나무들이 서로 엉켜 있는 듯한 검푸르고 누런 의자가 보였다.

“목연 사백님께서 영단과 선초들을 보관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어찌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열화선존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따로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면 특별한 점이 있을 겁니다. 아니면 무언가를 숨겨 두었을 수도 있고요.”

“옳은 말씀입니다.”

한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열화선존이 의자로 걸어갔다. 목연의 시체에 선령력을 주입해 의자에 바로 앉게 만들어 주었다.

한립은 급히 움직이지 않고 그 앞에서 공손히 예를 올리는 열화선존을 기다리다 수색을 시작했다.

잠시 후, 각자 대전 양쪽에서 걸어 나오며 시선을 마주쳤는데 실망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어떤 숨겨진 공간이나 금제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다녀간 것이겠지요.”

열화선존과 한립이 한 마디씩 주고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한립의 시선 끝에서 목연 시체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목연은 여전히 나무 의자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저도 뭐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이들이 지하궁전의 존재를 알았을 리가 없을 텐데요…….”

열화선존은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했는지 아쉬움을 토로했다.

“진언문이 멸문을 당하면서 노출된 것은 아닐…….”

한립을 대답을 하다 말고 급히 소리쳤다.

“열화 수사, 조심하십시오!”

목연 시체에서 기이한 녹색 빛이 번득이고 복부에 뚫린 상처에 검은 흉살기가 응집해 눈 깜짝할 사이에 포도알만 한 구슬을 이루고 있었다.

이어서 목연 시체가 앉은 의자가 가지를 양쪽으로 뻗어 미친 듯이 열화선존을 휘감았다.

그는 한립의 경고를 듣고 피하려 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결국 팔이 붙들리고 말았다.

“악!”

열화선존의 소매가 재로 변하고 팔뚝 피부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 피와 살이 말라비틀어져 갔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려 불길을 뿜어 팔을 감고 있는 덩굴 가지를 타고 의자를 태우려 했는데, 무슨 일인지 불길이 이슬처럼 또르르 굴러떨어지며 나무를 전혀 태우지 못했다.

콰릉!

그 순간 푸른 검빛이 금색 뇌전을 품고 떨어졌다.

누런 나무 덩굴이 잘리면서 암녹색 액체가 뿜어져 나와 검은 연기로 흩어졌다.

겨우 벗어난 열화선존은 한립 옆으로 가서 푸른 문양이 그려진 부적을 꺼내 상처 부위에 붙였다.

스스스.

부적에서 비린내가 진동하며 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열화선존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상처는 제쳐두고 사태파악에 들어갔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정황상 수사의 목연 사백께 사기가 깃든 게 분명해 보이는군요.”

미간을 찌푸린 한립은 가지를 회수해 요물처럼 흔들어 대면서 그들을 공격했던 의자를 주시했다.

“아니 그 오랜 세월 동안 가만히 있다가 지금 말입니까?”

“저 의자가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엇, 의자가 아닙니다. 저건……!”

한립의 말을 듣고 멍해졌던 열화선존이 퍼뜩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 전에 한립이 끼어들었다.

“이런, 살태를 이루려 합니다. 어서 저와 같이 막으시지요.”

나무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목연의 두 눈꺼풀이 움찔거리고 다 썩어들어갔을 눈알이 악몽이라도 꾸는 듯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목연이 흉살기에 휩싸여 소생하려 하자 한립은 곧장 튀어 나가며 청죽봉운검 아홉 자루를 합일해 흉살기가 응결하기 시작한 부분을 찔렀다.

그가 시체로 다가가자 검푸른 나무와 누런 나무의 가지들이 난리를 치면서 사방팔방에서 채찍질을 해왔다.

그걸 본 열화선존도 서둘러 금색 거울을 불러내 던지고 수결을 맺었다.

“가라!”

그의 외침에 부르르 떤 거울에서 복잡한 주술문자가 흘러나와 금빛 광선으로 한립 주위 공간을 채워주었다.

그는 시간법칙 파동이 덩굴의 속도를 늦추자 그것들을 쏙쏙 피해 제뢰술로 응결한 벽사신뢰 뇌전 구슬을 뿜었다.

콰릉!

뇌전 구슬이 시체 복부의 구멍으로 들어가 터지면서 요란한 금빛이 반짝이고 작은 뱀 같은 뇌전들이 막 형태를 잡은 살태를 산산조각냈다.

치지지직…….

조각난 짙은 흉살기가 벽사신뢰에 증발해 소멸하고 있었다.

그 어지러운 금빛 속에서 한립은 목연의 시체가 눈을 뜨고 그 눈동자에 맺힌 어떤 인영을 보았는데 바로 앞의 그가 아니라 기마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금색 뇌전이 검기와 같이 목연의 시체뿐만 아니라 그 아래 양생수(兩生樹)까지 터트리고 있었다.

“안 됩니다…….”

“어휴…….”

거의 동시에 열화선존의 외침과 마광의 한숨 소리가 한립의 귓가와 머릿속에 울렸다.

바닥에 착지하며 검을 거둔 한립은 마광의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 아깝습니다.”

막 형태를 잡아가던 살태를 흡수해 수행이 대폭 늘어날 기회를 놓친 것을 아까워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립은 그런 상황을 원치 않았다.

태을 초기의 마광도 제대로 단속하기 어려운데 수행의 격차가 더 벌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마광 수사, 상황이 긴박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의식으로 대답했다.

“인연이 부족한 것이겠지요. 하늘의 뜻이 그런가 봅니다.”

울적하게 말한 마광은 더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한립은 잠시 화지 공간과 외부 연계를 차단하고 열화선존에게 고개를 돌렸다.

“열화 수사, 어째서 저를 말리신 것입니까?”

거울을 거두고 헐레벌떡 다가온 열화선존은 새까맣게 변한 괴상한 나무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려 수사도 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휴, 이 아까운 것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건 나무 의자가 아니라, 양생수라는 선목(仙木)입니다. 듣자니 목연 사백께서 바로 이걸 이용해 흉살겁을 이겨내셨다던데.”

“예?”

그 말을 듣자니 한립도 속이 쓰렸지만 이미 손을 떠난 일이었다.

바로 무릎을 굽힌 그가 아직 되살릴 여지가 남아 있는지 살피다 새까맣게 탄 나무속에서 녹색 가지를 발견해 꺼내 들었다.

“그게 설마…….”

나뭇가지 형태의 옥간임을 알아본 열화선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오행환세결>이 맞는지는 수사께서 직접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은 거침없이 옥간을 넘겨주었는데 열화선존이 되려 미안한 기색으로 받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에이, 되었습니다. 제 목숨을 벌써 몇 번이나 구해주셨는데, 종문의 입장만을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안에 <대오행환세결>이 들어있는지 아닌지는 려 수사께서 살피시고, 다만 이후 발견하는 물건들은…….”

“이후 발견하는 물건들은 당연히 열화 수사의 것입니다.”

한립은 그가 말을 맺기도 전에 대답했다.

“수사의 넓은 아량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열화선존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인사를 했다. 손을 내저은 한립은 옥간을 미간에 대고 의식을 불어넣었다.

내부에는 뿌연 푸른 빛 속에 조그맣게 금색 문자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주 난해한 공법은 맞지만 <대오행환세결>은 아니고 <동을고영경(東乙枯榮經)>이었다.

한립은 내용을 암기하고 옥간을 열화선존에게 주었다. 한립은 상대의 얼굴에서 희색이 가시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동을고영경>은 총 9권으로 이루어진 시간법칙과 연관된 공법으로 <수연사시결>, <환진보전>처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려 수사, <대오행환세결>은 아니라지만 이 공법도 외부인에게는 전수하지 않는 종문의 보물이니 외부에 알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지요. 그런데 남은 양생수를 달리 쓰실 게 아니라면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수사께서 일격으로 박살을 내놓아 이 모양이 되었는데 어디다 쓰시려고요?”

열화선존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휴, 제가 흉살겁으로 고생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양생수를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녹색 액체로 부활시켜볼 요량이었다.

“아, 이해했습니다. 가져가 보세요.”

“그런데 목연 선배님께서는 양생수를 이용해 어떻게 흉살겁을 이겨내신 것입니까?”

한립은 조심스럽게 남은 양생수를 거두면서 물었다.

“목연 사백님이 어떻게 수행하셨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체내의 흉살기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목연 선배님의 시체가 갑자기 이상해진 것도 양생수에 숨겨져 있던 대량의 흉살기 때문이겠고요.”

그들은 바로 떠나지 않고 열화선존이 팔의 부상을 치료한 후에 함께 지하궁전을 빠져나왔다.

“양생궁이 아니라면 가볼 곳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장진곡(藏眞谷)이 육지에서 분리되지 않았으면 거리가 멀지 않을 텐데 거기부터 가보시지요.”

광장으로 돌아온 열화선존이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진곡은 어떤 곳입니까?”

“노조께서 늘 폐관 수련을 하던 곳입니다. 설법을 하시거나 중요한 일이 없으면 대부분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셨으니 <대오행환세결>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리로 가십시다.”

그들은 비행 선박을 불러내 장진곡 방향으로 날아갔다. 고공에서 바라보니 무시무시한 힘이 남긴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립은 시공간 초월에서 보았던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손바닥을 떠올리면 아직도 한기가 돌았다.

폐허를 가로지른 선박이 평원에 이르러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다행히 장전곡은 떨어져 나가지 않고 목황역에 붙어 있었습니다.”

열화선존이 밝은 얼굴로 멀리 푸른 산골짜기를 가리켰다.

한립은 영목신통을 발동해 그다지 높지 않은 두 산 사이의 평평한 땅에 햇살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장전곡은 그리 깊지도 않고 중요한 공간으로 쓰일 만한 점도 보이지 않는데 특수한 금제나 수단을 펼쳐 놓은 것입니까?”

“허허, 괜한 생각을 하십니다. 노조께서 이곳에서 수련하신 이유는 천지영기가 가장 풍부해서도 엄청난 금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단순히 골짜기 내에서 자라는 공령죽(空靈竹)을 매우 아끼셨지요.”

“정말 제가 괜한 생각을 했나 봅니다…….”

대화를 나누며 골짜기 입구에 다다른 그들의 귓가에 디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귀가 밝아지는 것 같은 맑은 소리에 한립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공령죽곡(空靈竹曲)입니다. 골짜기 안의 산바람이 공령죽 사이를 지나며 내는 소리인데 대나무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아주 독특한 효과를 내지요. 오래 듣다 보면 마음이 맑아질 겁니다.”

“노조께서 이곳을 선택해 수련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차분히 수련하기에 좋은 곳이군요.”

“아직 골짜기 입구라 이 정도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풍령작(風鈴鵲)이라는 영물이 사는데 그 새소리가 더해지면 공령죽곡과 어우러져 세상에 다시없을 현묘한 소리가 탄생하지요.”

열화선존은 감탄하는 한립을 보면서 뿌듯해졌다.

골짜기 안으로 걸어 들어간 한립은 비취색의 대나무들이 양쪽의 비탈을 따라 자라 서늘한 바람이 불 때마다 내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대숲도 울창해졌고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좋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산바람을 맞으며 맑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연히 가슴이 탁 트여갔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소리는 작아지고 잿빛 안개가 짙어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두 눈에 보랏빛을 번득인 한립은 기껏해야 백 장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의 대나무는 이파리가 회백색으로 변해서 더이상 맑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열화 수사, 이곳의 안개가 뭔가 이상합니다. 의식의 힘을 제약하고 희미하게 흉살기를 품고 있군요. 우리가 실수로 골짜기 내의 무슨 금제를 발동시킨 것 아닐까요?”

“노조께서 금제를 펼칠 필요 없다고 하셔서 제자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던 곳입니다. 저도 예전에 수도 없이 와봤고요. 가끔 자연적으로 안개가 끼기는 했지만 이런 기괴한 안개는 처음 봅니다. 종문이 변고를 당한 후에 일어난 현상 같습니다.”

열화선존도 불편한 얼굴로 안개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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