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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34화 (1,591/2,000)
  • 1834화. 장벽

    *

    침음하던 한립은 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남아 있는 그림들을 찬찬히 살폈다.

    어두운 지하궁전에 미라노조가 황포 나무 인간, 붉은 머리 사내 그리고 푸른 피부의 철탑 같은 청년을 데리고 검은 피풍의를 입고 잿빛 기운 속의 신비인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었다.

    미라노조와 그의 세 제자를 어찌나 실감나게 그렸는지 머리카락이 쭈뼛 솟을 정도였는데 피풍의를 걸친 신비인의 얼굴만은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상한 그림 뒤에 미라노조가 또 다른 이상한 공간에 홀로 서서 머리에 두 개의 뿔이 자란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마족의 손에서 맷돌 크기의 은색 나침반을 받아드는 장면이 있었다.

    그 뒤로 그림이 끊겨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열화 수사, 이 사람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한립은 피풍의를 입은 인물을 가리켰다.

    “오, 노조와 사부께서 연회 중에 갑자기 자리를 비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누구를 만났는지 이 은밀한 방문객이 누구였었는지는 모릅니다.”

    “사부요? 이 중에 열화 수사의 스승이 있단 말입니까?”

    “저기 불꽃 머리를 지닌 사내가 제 사부님이신 ‘기마자’이십니다. 그 옆 노란 장포를 걸친 나무 인간이 대사백 목연, 그 뒤의 건장한 사내가 셋째 사숙 무양이시고요. 연회 장면에서 보이는 두 분이 각각 넷째 사숙 금원자, 다섯째 사숙 화택이십니다.”

    열화선존은 그림을 향해 예를 올리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기마자라는 이름을 들은 한립은 내심 뜨끔하며 수연궁에서 보았던 머리 큰 어린아이가 열화선존의 다섯째 사숙인 화택임을 알아보았다.

    그가 원한을 품고 죽여야 한다고 소리친 상대가 바로 기마자였고 말이다.

    화택이 말한 것이 열화선존의 스승이라면 동문 사형제끼리 어찌 원수지간이 된 것일까?

    “왜 그러십니까?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열화선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한립은 굳이 그 일을 언급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요. 저 신비인의 신분이 그리 간단할 것 같지 않습니다.”

    “저도 그건 알 방법이 없군요. 하지만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노조께서 두 명의 사숙께 천정 사절의 접대를 맡기고 자리를 뜨셨을 리 없겠지요.”

    “수사가 종문을 떠나고 진언문이 화를 당했다면……. 저 신비인 혹은 천정 사절이 진언문 멸문에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한립이 신비인과 천정 사절을 가리켰다.

    미간을 좁힌 열화선존은 말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혹시, 저 그림 속의 밀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십니까?”

    한참 뒤에 한립이 돌연 이런 질문을 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몇 군데 짐작이 가는 장소가 있기는 합니다. 가 봐야 같은 장소인지 확신할 수 있을 거예요.”

    “<대오행환세결>이 그렇게 중요한 공법이라면 미라노조께서도 귀하게 여기셨을 테니 저런 은밀한 장소에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할 겁니다. 하나씩 찾아다녀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한립의 말을 끝으로 내부를 꼼꼼히 뒤진 그들은 대전을 나와 다시 길을 재촉했다.

    * * *

    보름 후, 한립과 열화선존은 호수 위에 떠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무수히 많은 공간균열이 발생해 하늘과 아래쪽의 호수를 절반으로 나누며 무형의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공간균열 끝에는 크기가 잘 가늠되지 않는 육지가 보였고 거대한 산봉우리 사이로 백옥 궁전들이 건설되어 있었다.

    대부분 심각하게 훼손되어 산과 함께 무너진 것도 있었지만 예전에는 상당히 번화한 곳이었을 것이다.

    한립은 공간균열들 너머의 하얀 광장을 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려 수사, 저리로 넘어가기는 힘들겠습니다. 다른 길을 찾아봅시다.”

    “저곳이 원래 어디였는지 기억하십니까?”

    “목연 사백님의 양생궁(兩生宮)이 있었던 곳 같은데 워낙 공간이 엉망이 되어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노조의 진언궁을 제외하면 종문에서 가장 중요시되던 장소 중 하나입니다.”

    그 말에 한립은 이곳이 그가 시공간 초월을 통해 진언문 멸문의 장면을 본 곳이자 목연의 시체에 깃들었던 공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들어가 봅시다. 만에 하나 <대오행환세결>이 이곳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이대로 건너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른 길이 없는지 찾아보는 것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공간균열들이 밀집해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길이 끊긴 것은 아니니까요. 저길 보시면 아직 육지로 향하는 길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열화선존이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호수 가장자리에 물기둥이 뻗어 나가 다리처럼 십여 리 밖의 또 다른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농을 하시는 것이지요? 저 물길은 공간균열에 둘러싸여 있어 까딱 잘못하다가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십상입니다. 거기다 저 끝에도 공간장벽이 있는데 안전하게 거기까지 간들 소용이 있겠습니까?”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다른 길을 찾아본다고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시간을 너무 허비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가능한 방법을 생각해 보시지요.”

    이미 이런 방식으로 다른 육지로 넘어가 본 한립은 자신이 있었다.

    열화선존은 더 설득해도 안 될 것을 알고 곰곰이 생각하다 더는 반대를 하지 않았다.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 저기까지 간 다음에, 공간장벽은 제가 알아서 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공간균열에 휘말리지 않고 장벽을 뚫고 지날 수 있을 거라 확신은 하시는 거겠지요?”

    위험한 일이라 열화선존도 다시 확인했다.

    “이곳의 공간장벽은 선역의 것보다 훨씬 두께가 얇습니다. 빨리만 움직이면 7할의 확률로 성공할 거라 예상합니다.”

    한립이 씩 웃음 지으며 차분하게 답했다.

    “그런…….”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열화선존도 그와 같이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첨벙!

    두 사람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동시에 출발해 호수 속으로 들어가 두 마리 물고기처럼 수로를 타고 대륙 방향으로 나아갔다.

    공간균열을 경계하느라 속도가 극히 느려서 평범한 사람이 수영하는 속도와 비슷했고 십여 리의 거리를 한 시진이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장벽이 가까워지자 두 눈에서 보랏빛을 번득인 한립은 호리병박을 꺼내 전방을 조준하고 열화선존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수결을 맺은 손이 호리병박 아래를 강하게 때리자 안에서 뇌전 소리가 울리고 청죽봉운검 한 자루가 녹색 소용돌이 속에서 튀어나와 흐릿하게 날아갔다.

    콰르릉!

    커다란 소음에도 공간장벽은 뚫리지 않고 수로의 물만 영향을 받아 일렁였다.

    주변의 공간균열들이 균형을 잃고 갑자기 확장하면서 물과 그들 두 사람을 빨아들였다.

    깜짝 놀란 열화선존이 서둘러 금색 거울을 꺼내 전력으로 발동해 그와 한립 주변에 금색 구역을 펼쳐 공간균열의 확장을 늦추었으나 완벽하게 멈추지는 못했다.

    콰직!

    바로 그때 전방의 공간장벽이 쪼개지면서 청죽봉운검이 작은 공간통로를 만들어 뚫고 들어갔다.

    이에 한립이 눈을 번득이며 열화선존의 옷깃을 잡아채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공간장벽을 지나고도 멈추지 않은 그는 청죽봉운검을 회수해 천여 장을 벗어난 다음에야 육지를 살폈다.

    그들이 지나온 수로는 완전히 공간균열에 잡아 먹혔고 공간장벽 틈으로도 몇몇 공간균열들이 넘어왔다.

    다행히 공간균열의 규모가 크지 않고 더이상 확장하지 않아 공간장벽 틈이 막히고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열화 수사께서 잠시 공간균열을 막아주셔서 성공적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호리병박을 거둔 한립은 열화선존의 옷깃을 놓아주고 웃음 지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려 수사께서 지닌 보물이 많다 했더니, 그게 우연이 아니었어요. 아주 담도 크십니다!”

    열화선존은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는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돌 더미가 된 백석 광장을 지나 방대한 규모의 궁전 폐허에 도착했다.

    다른 폐허와 달리 강한 불길로 소각되어 남아 있는 궁전 벽과 바닥에도 불에 탄 흔적이 보였고 시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양생궁이 맞았습니다. 종문의 대다수 업무를 목연 사백께서 처리하셔서 워낙 바쁜 곳이었는데 이렇게 심각하게 훼손되었을 줄이야…….”

    열화선존이 그 모습을 보고 탄식했다.

    한립이 기억하기로 시간도조의 엄청난 공격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양생궁이 이 꼴이 난 것도 당연했다.

    기억을 더듬으면서 좌우를 살피던 그의 발길이 어느 바위 더미에서 멈추었다. 한립이 두 눈에 보랏빛을 일렁이고 자세히 관찰하자 열화선존도 멈춰 기다렸다.

    “이 아래 무언가 있는 듯합니다…….”

    한립은 일부러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가 말입니까? 숨겨진 지하궁전이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그건 아닌 듯하고, 뚫고 내려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바위 더미를 부수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땅속에서 솟아오른 열화선존은 시체 한 구를 업고 있었는데 누런 장포를 입고 볏짚 같은 누런 머리카락을 지닌 목연이었다!

    시공간 초월로 보았던 목연은 옷이 낡고 피부가 퍼석하게 마른 것을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였다.

    “영목신통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깊이 묻혀 있는 목연 사백의 시체를 알아보시다니요.”

    열화선존은 시체의 의복을 단정하게 정돈해 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한립도 목연의 시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몰랐으면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문득 무언가 있는 것 같아 살피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게 인연이라는 거겠지요.”

    “그나저나 목연 선배님께서 <대오행환세결>을 지니고 있던가요?”

    한립은 뻔히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그보다는 양생궁에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열화선존은 무너져 내린 궁전을 보면서 답했다. 열화선존은 다시 목연의 시체를 업고 한립과 함께 대전 쪽으로 걸어갔다.

    목재로 만든 부분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석재로 만들어진 곳도 곳곳이 녹아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곳곳을 돌다 어느 벽돌 벽의 먼지를 날려버린 열화선존은 나무의 나이테 같은 기이한 무늬를 발견하고 기뻐했다.

    “진짜 있었어…….”

    한립이 쳐다보는 것을 보고 그가 설명해 주었다.

    “밀실 표시입니다. 사부님의 류화궁 안에도 있었던 것인데 사백의 양생궁에도 이게 있을 줄은 몰랐네요.”

    “두 분은 생전에 사이가 좋은 편이었습니까?”

    한립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슬쩍 떠보았다.

    “그건……. 목연 사백의 성정이 워낙 불같으셔서 사부님께서 편하게 대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숙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고, 동문 사형제 지간 인데 당연히 사이는 좋았지요.”

    열화선존은 목연 시체의 한팔을 들어 밀실 표식에 대고 체내의 선령력을 주입했다.

    파앗.

    말라붙은 목연의 손바닥 피부에서 푸른 빛이 일어 고목이 생기를 되찾듯 색깔이 푸릇푸릇 해졌다.

    곧 인장으로 빛이 옮겨가 한 사람이 드나들 만한 푸른 빛의 문을 만들었다.

    열화선존은 선령력 주입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따라오라는 턱짓을 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립도 그를 따라 빛의 문으로 들어가 거대한 지하궁전에 도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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