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화. 목황역(木皇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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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문 제자시니 이곳 지리에 익숙해 수확도 상당하셨겠습니다. <대오행환세결>을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것이라 알고 있는데 얻으셨는지요?”
한립은 웃으며 물었다.
“부끄럽습니다. 운이 좋지 않아 감찰선사에게 쫓겨 다니기만 한 것을요. 게다가 <대오행환세결>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몰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열환선존이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찾기 쉽지 않겠습니다.”
“아예 <대오행환세결>을 아무도 찾지 못한다면 몰라도 천정의 손에 들어갈까 걱정입니다. ……한 수사, 진언문 유적 내에 여러 세력이 횡행하고 있다니, 만일 <대오행환세결>이 나타나면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겠지요. 저를 도와 그것을 얻게 해주신다면 수사가 실망하지 않을만한 보답을 하겠습니다.”
열화선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공수를 해보였다.
“진언문 유적 안에 많은 고수들이 들어와 있는 만큼 어떤 것도 장담할 수는 없으나, 능력이 닿는 한에서는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체 <대오행환세결>이 어떤 공법이기에 다들 눈독을 들이는 것입니까?”
“시간법칙과 관련된 공법입니다. 진언문에 적잖은 시간법칙 공법이 있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그중에서도 <대오행환시결>이 단연 최고의 공법이자 종문의 비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 보물이라면 확실히 외부인의 손에 들어가게 두고 보실 수 없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화선존은 유심히 한립의 표정을 살피다 욕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고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솔직히 한립은 천정이 욕심내는 <대오행환세결>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진언화륜경>의 완전한 구결을 손에 넣었으니 그것만 수행해도 대라경에 이를 수 있었다.
<대오행환세결>이 진언문 최고의 공법이라 하나 수련을 위한 요구조건이 만만치 않을 테고 그에게 잘 맞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과한 욕심을 부리며 더 좋은 공법을 찾으려 들다가 오히려 수행의 길을 망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산맥을 벗어나 작은 언덕들이 이어지는 구릉지대로 접어들었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언덕이 낙타의 등처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어째서 그런 지형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수많은 초목이 생기 넘치게 자라고 있었다.
“초목의 영기가 아주 왕성합니다. 이곳이 어느 구역에 속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보아하니 려 수사께서도 진언문의 구조에 대해 파악을 하셨군요?”
한립의 물음에 열화선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간략한 진언문 지도를 얻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이곳은 진언문 목황역입니다. 다만 변두리라 별다른 건 없고 중심구역으로 가야 약재밭이 있겠지요. 이전의 전쟁으로 훼손이 되지 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그들은 서서히 속도를 높여 푸른 빛과 붉은빛으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 * *
같은 시각.
하얀 안개가 뿌옇게 낀 폐허 위를 보라색 빛줄기가 지나고, 또 다른 두 개의 둔광이 나란히 그 뒤를 쫓았다.
빛줄기 속의 백발의 잘생긴 자포(紫袍) 청년이 미간을 좁히고 수시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십여 리 간격을 두고 키가 작고 몸이 굽은 대머리 노인과 하얀 유생 복장의 사내가 둔광을 연결해 베틀북을 타고 쾌속으로 날아갔다.
앞에 가는 이들은 한립과 헤어진 석천공이었고, 뒤에서 쫓는 이들은 원경선궁 궁주 육오량과 복택선역 택연성에 상주하는 감찰선사 조진이었다.
“저 녀석의 공간 법칙에 대한 깨달음이 저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달아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7품 선기를 힘을 합쳐 발동하는데도 어느 세월에 붙잡을지 모르겠어요.”
인상을 찡그린 육오량이 푸념했다.
“상관없습니다. 3대 지존법칙을 발동하면 선령력 소모가 심하니 얼마 버티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진언문 유적이 박살이 난 꼴을 보니 우리가 있는 대륙이 그리 넓지도 않을 겁니다. 그 끝까지 몰고 가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조진은 태연하게 답했다.
“허허, 제가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조 수사의 말대로 저 녀석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잡아서 어찌할 것이냐 아니겠습니까.”
베틀북을 전력으로 조종하면서 조진은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아직 모르시겠군요. 취곤성에서 저자가 나타나 소류 수사와 손속을 겨루었었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신분이 워낙 특수하다 합니다.”
“조 수사, 하실 말씀이 있으면 속 시원하게 털어놔 보세요.”
뭔 일인가 싶어 육오량이 재빨리 물었다.
“배후에 광원재가 있답니다. 게다가 신분이 낮지 않다는데, 소류 수사와 연락이 닿지 않아 정확하게 물을 수도 없군요.”
“이런……. 어차피 원수를 졌겠다, 이제와서 그냥 보내주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진언문 유적 안에서 깨끗하게 해치우고 혼백까지 흩어 버리면 누가 알겠습니까?”
난색을 표하던 육오량이 망설이다 결정을 내렸다.
“그러는 수밖에 없을 듯싶군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보랏빛 빛줄기가 갑자기 길을 틀어 어느 넓은 산골짜기로 내려갔다.
급히 쫓아가 보니 높은 산봉우리 사이의 골짜기에는 여러 동굴이 뚫려 있었다. 요새로 사용되던 곳인지 각종 문양과 주술문자 그리고 금제의 흔적이 보였으나 상당 부분 파괴되고 오른쪽 산도 절반이 허물어져 있었다.
골짜기로 내려선 조진과 육오량은 상대가 백석 광장 가운데의 검은 원형 기석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감히 막다른 곳으로 스스로 들어서다니 우릴 대적할 방법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육오량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얕보고 무턱대고 덤벼서는 안 됩니다. 공간 법칙을 수련한 자라 상식을 넘어서는 실력을 보일 수 있어요.”
미간을 좁힌 조진이 진중하게 답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든 못하게 막으면 그만입니다.”
육오량은 입꼬리를 비틀고 노란 영역을 방출해 주변 천여 장을 뒤덮고 펄쩍 뛰어올랐다.
영역 안에서 피부가 갈색으로 변한 육오량이 천 배로 몸을 키워 석천공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조진은 무슨 말을 하려다 결국에는 입을 다물고 신중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쿠쿠쿵.
육오량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며 만들어낸 바람만으로도 영역 안의 공기가 떨려왔다.
백석 광장이 석천공과 함께 가루가 되려 할 때 은색빛이 아무 징조도 없이 영역을 이루고 작은 공간을 둘러쌌다.
눈앞이 일순 하얗게 변한 육오량은 몽롱한 수증기에 잠식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쾅!
흙먼지가 일고 바닥의 돌들이 튀어 올라 커다란 구멍이 생기자 공중에서 지켜보던 조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명 육오량은 백석 광장으로 떨어졌는데 구멍은 광장 밖에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육오량이 빠르게 구멍을 빠져나왔다.
“육 수사, 어찌 된 일입니까?”
“흐흐, 확실히 뭔 수가 있기는 하더군요. 부딪치기 전에 공간나이술을 펼쳐 저를 멀리 이동시켰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저놈을 가둬 술법을 펼칠 수 없게 할 테니, 그때 수사가 죽이면 되겠어요.”
“수사의 뜻대로 해보시지요.”
조진은 석천공을 응시하며 반신반의하듯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육오량이 술법을 펼치려는데, 석천공이 홀연히 뒤로 돌아 도발적인 미소를 흘렸다.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나침반으로 어느새 핏방울이 흘러 들어가고 은빛을 타고 강력한 공간 파동이 주변에 일렁이고 있었다.
후우웅!
동시에 석천공 뒤의 검은 비석을 중심으로 동그란 진법이 펼쳐져 조진과 육오량의 시야를 가릴 만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마족 여인 풍림과 보라색 머리를 높게 묶고 붉은 깃털 옷을 걸친 화려한 청년이었다.
“소주를 뵙습니다!”
두 사람은 석천공 앞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석천공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망가진 나침반을 던져버리고 입을 열었다.
“어째서 둘이지? 정 노인은?”
“소주께 아룁니다. 저는 유적으로 들어오자마자 정 노인 그리고 자청과 흩어져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풍림이 서둘러 답했다.
“제가 정 노인과 같이 다녔으나, 어느 유적에 들어갔다가 다른 세력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정 노인은 갑자기 출현한 회색 안개에 휘말려 실종되었고, 일단 철수한 저는 다시 돌아가 조사할 틈도 없이 소주의 공이반(空移盤)에 의해 이곳으로 전송되었습니다.”
자청이라 불린 청년이 눈을 내리깔며 포권을 했다.
“알겠다. 그쪽은 이미 단서를 찾아냈으니, 일단 이곳 상황을 해결하지.”
석천공의 말에 자청과 풍림이 시선을 마주치며 안심했다. 느긋하게 조진과 육오량을 돌아보는 석천공의 입가에 피식 비웃음이 걸렸다.
“감히 광원재 소주를 건드려? 수행이 너무 쉽게 풀려 이제는 살기도 귀찮아진 건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조진과 육오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 *
며칠 뒤.
한립과 열화선존은 급히 좁은 통로로 들어가 그 끝에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잡초가 무성한 길 양쪽에는 부서진 석상과 등잔 등이 수북해서 황량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방금 지나온 거대한 원형 제단은 천년대제(千年大祭)를 치르던 장소이고요. 당시에는 사맹선구라는 말조차 없었지만 때가 되면 만여 종문에서 참배하러 왔었지요…….”
열화선존은 감회가 새로운지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결국 그 끝은 긴 한숨이었다.
“고금을 통틀어 어떤 세력이든 흥할 때가 있으면 쇠할 때도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열화수사, 너무 마음 아파 마시고 귀종의 보물인 <대오행환세결>을 찾는데 집중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립의 위로에 열화선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황폐한 일대를 살피는 눈길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대전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지만 남아 있는 기둥과 그 위에 새겨진 문양만 보아도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의 주홍색 대문에 금색으로 경양각(敬讓閣)이라는 세 글자가 보였다. 그 앞에 이른 한립과 열화선존은 기둥 사이로 난 거대한 문을 천천히 밀어보았다.
쿠쿵.
낡은 문이 뻑뻑하게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벽과 지붕이 무너져 혼란스러운 내부에 이끼와 잡초가 무성한 것을 발견했다.
기와와 벽 잔해 속에서 백옥 비석 절반만이 우뚝 솟아 천(天)자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립은 벽으로 걸어가 마치 얼마 전에 그려 놓은 것처럼 아직 색깔이 선명한 생동감 넘치는 벽화들을 바라보았다.
“천력각(天曆閣)은 본종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이라 일반 제자들은 평소에 들어올 수 없던 장소입니다. 벽화에 그려진 것은 대부분 종문의 중요한 역사로 대전이 망가지지 않았으면 진법을 통해 모든 그림을 볼 수 있었겠죠. 남은 것은 이게 다인가 봅니다.”
의아한 얼굴의 한립을 보고 열화선존이 탄식하듯 설명했다.
“흠?”
그런데 어느 그림을 보다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진언문이 손님들을 맞이해 하늘을 모시는 제사를 올리고 금색 경전 안에서 연회를 베푸는 내용이 연달아 그려져 있었는데 그중에는 미라노조와 다섯 제자, 중요인물들의 초상도 남아 있었다.
“열화 수사,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초대를 받은 인물 중 저들은 천정 수사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연회에 초청받는 사람 중에는 존귀한 신분의 천정 사절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선궁 인물들과 달리 중토선역에서 온 천정의 정식 사절로 종문에서도 예를 다해 대우했지요. 그 성대한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그렇다면 진언문과 천정의 관계가 처음부터 골이 깊었던 것은 아닌 듯한데 어쩌다 대대적으로 전쟁을 치르게 된 것입니까?”
“제가 종문으로 돌아온 것도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연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님의 명을 받아 종문을 나섰기 때문에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거든요.”
열화선존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립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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