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화. 익숙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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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폭풍 속에서 한립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화아앗.
큰 소리로 기합을 넣고 몸에서 금빛이 터져 나와 시간영역을 이루고서야 주변의 공간 폭풍이 완화되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하얀 빛의 칼날들은 전혀 느려지지 않고 그에게 다가와 금빛 깃발과 남색 방패에 더욱 많은 힘을 불어넣어야 했다.
쿠르르…….
금색 은하수가 굉음을 내며 열 배로 불어나 그의 주변을 힘차게 흘렀고 남색 방패도 훨씬 커져 표면에 굽이굽이 흐르는 강 허상이 떠올랐다.
하얀빛의 칼날은 금색 은하수에 들어서면서 미묘하게 방향이 틀어져 한립을 비켜 지나갔고 한두 개만이 남색 방패에 도착했다.
남색 방패도 방어능력이 뛰어나 빛의 칼날을 흘려보내 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방법이 통하자 안심하고는 계속해서 난류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영역을 펼치면서 동시에 두 개의 선기를 발동하는 것은 힘에 부쳤기에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장장 일각이 지나 드디어 공간 폭풍을 빠져나온 한립은 주변 상황을 보고 움찔했다.
미친 듯이 날뛰던 허공 난류만 보이고 앞뒤로 두 개의 대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잠시 주춤하던 그는 공간 폭풍에 휩쓸려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내려 오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길!”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허공 난류 속에서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하면 곧 선령력이 바닥나 목숨을 잃을 것이 확실했다.
그는 단약 하나를 입에 넣고 양손에 중품 선원석을 꺼내 선령력을 빠르게 회복하면서 두 대륙의 위치를 기억해 내려 애썼다.
하지만 공간 폭풍 속에서 몸을 가누지 못해 방향을 잃었는데 대륙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오래 머뭇거리지 않고 한 방향을 정해 날아갔다.
극심한 선령력 소모에도 그는 빠르게 허공 난류를 돌파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것이었다.
운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는지 잠시 후 전방에 어느 대륙이 보였다.
기쁨에 찬 한립은 남은 선령력을 모조리 모아 손을 뻗었고, 금색 손가락 허상이 공간장벽으로 날아갔다.
푹!
공간장벽에 뚫린 구멍 속으로 몸을 던진 한립은 주변의 막대한 압력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고 시간영역과 두 선기를 거두고 호흡을 갈무리할 무렵 짙은 영기가 흐르는 끝없이 펼쳐진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곳 같았다.
이곳에는 하얀 안개가 깔려 있지 않아 의식은 여전히 퍼트릴 수 없어도 구유마동으로 아주 멀리 까지 볼 수 있었다.
한립은 몇몇 공간균열을 피해 아래로 내려가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반나절 후에야 눈을 뜬 그는 바로 방향을 정해 날아올랐다.
날아가는 동안 쉬지 않고 의식으로 산맥 곳곳을 훑어 영초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막 어느 산골짜기를 지나려다 돌연 어딘가를 보고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멀리서 극심한 영기의 파동이 충돌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양쪽의 수행이 그리 낮지 않았다.
조용히 보물이나 찾으면 몰라도 무의미한 전투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려던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격렬한 파동 속에서 익숙한 붉은 화염의 기운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어쩔 수 없이 흐릿한 허상으로 변해 파동 쪽으로 날아갔다.
전투 장소에 도착하자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새빨간 화염 거검을 머리 위에 띄우고 허리춤에는 금색 거울을 불러낸 열화선존과 푸른 장포를 입고 있는 키 크고 마른 사내였다.
후자는 취곤성에서 공수천과 함께 나타났던 성이 왕 씨였던 감찰 선사였다.
“저들은…….”
키 큰 사내는 열화선존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둥실 떠 있는 푸른 보름달 허상이 광채를 발산했는데 무슨 신통인지 알 수 없었고, 빛이 반짝일 때마다 수백 개의 빛다발들이 분출되어 열화선존을 노렸다.
열화선존은 검 그림자, 주작, 봉황, 필방(畢方) 등 화염 성조(聖鳥)들이 수놓아진 적금색 장포 선기에서 뿜어낸 화염으로 푸른 빛다발을 막고 있었는데, 공격의 위력이 너무 막강해 검기와 화염을 뚫고 들어왔다.
천만다행으로 금색 고대 거울이 적시에 파동을 방출해 위력을 크게 줄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화치자, 지도만 내놓으면 보내주겠다. 계속해서 저항한다면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줄 것이야!”
키 큰 사내가 소리쳤고 멀리서 듣고 있던 한립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녀석이 제 무덤을 파는구나! 그래, 네 소원대로 해주마.”
키 큰 사내가 살의를 드러내며 한 손으로 허공을 지웠고 머리 위의 푸른 보름달이 훨씬 커져 몇 배의 빛다발을 내뿜었다.
이에 열화선존도 서둘러 정혈을 토해 허리춤의 거울에 흡수시켰다. 거울이 불쑥 날아올라 금빛 화염을 마구 분출하면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채채채챙!
빛다발을 맞은 거울이 부들부들 떨려 언제라도 화염이 꺼질 것 같았으나 열화선존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그걸 본 키 큰 사내가 거울에 눈독을 들이며 소매를 털어 푸른 빛을 퍼트렸다. 이에 수십 리에 이르는 푸른 영역이 펼쳐졌다.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푸른 보름달 인근에 느닷없이 녹색 광채가 나타나 보름달을 감싼 것이다. 보름달의 빛이 흩어지고 그 안에 숨어 있던 푸르스름한 옥구슬 선기가 드러났다.
동시에 키 큰 사내의 뒤에서는 금색 자물쇠가 떠올라 번개처럼 그를 구속하려 들었다.
“웬 놈이냐!”
표정이 급변한 사내가 몸을 휙 돌려 입에서 은색 원반을 뿜었다.
탕!
원반이 금색 자물쇠를 막고 둘 사이에서 금속성의 날카로운 충돌음이 들려왔다.
두 손을 춤추듯 움직인 그는 푸른 죽간 선기를 불러내 보호막을 펼쳐 몸을 보호한 다음 녹색 광채로 둘러싸인 푸른 옥구슬을 회수하려 손을 뻗었다.
푸른 보름달 상공에서 파동이 일고 언덕 크기의 푸른 거대 손이 날아들었다.
펑!
녹색 광채가 흩어지면서 호리병박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 나와 방대한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현천영보!”
키 큰 사내는 크게 반색하며 수결을 연달아 바꿔 거대 손으로 호리병박을 가로채려 들었다.
호리병박은 웅웅 진동했으나 거대 손의 구금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건! 그렇다면…….”
열화선존은 호리병박을 보고 눈을 번득였다.
키 큰 사내가 주변을 훑으며 양손으로 법결을 날려 거대 손에서 흘러나온 주술문자들이 드디어 호리병박 주변의 광채를 완전히 조각냈다.
애달피 울던 호리병박이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키 큰 사내가 거대 손으로 호리병박을 잡아 끌어오는데 그사이 그 뒤로 흐릿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가고 있었고, 그림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립이었다.
콰릉.
한립의 두 손에서 푸른 빛이 순간적으로 터져 나와 거검 두 자루가 키 큰 사내의 머리로 떨어졌다.
그 눈부신 빛에 허공이 반으로 갈라질 것 같았는데, 키 큰 사내는 예상했다는 듯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사내의 머리 위에서 옥구슬이 호리병박의 광채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고 두 줄기의 굵직한 수정빛을 뿜어 거검을 막았다.
펑! 펑!
푸른 거검은 빛을 잃고 튕겨 나왔는데 손상이 간 듯했다.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한립도 내상을 입었는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감히 기습하다니? 죽어라!”
냉소를 흘린 사내는 푸른 거대 손에 이끌려 그 앞에 떨어진 호리병박으로 시선을 옮겼다.
겨우 진선 후기 존재가 그를 상대로 싸우려 한 것은 가소로웠으나 현천영보를 얻었으니 그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쿠르릉!
바로 그때, 꼼짝 않던 호리병박이 눈을 찌를 듯한 빛을 발하면서 안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키 큰 사내가 깜짝 놀란 사이 호리병 입구에서 금빛이 번쩍 빠져나와 푸른 죽간으로 만들어진 보호막에 충돌했다.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단단한 선기가 두부처럼 썰려 금빛에 자리를 내주었고, 키 큰 사내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몸이 거의 두 동강이 난 것처럼 보였다.
이상한 일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단면이 매끄럽게 타들어 갔다는 점이었다.
모든 일이 전광석화처럼 벌어져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열화선존도 기겁을 했다.
울컥 대량의 피를 토해낸 키 큰 사내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일촉즉발의 순간 몸을 틀어 겨우 단전이 뚫려 즉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그는 양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입에서 푸른 화염을 뿜어 불구슬로 몸을 감추고 물러났다.
푸른 옥구슬을 제외한 다른 선기들은 회수할 틈도 없었다.
그때 그의 뒤편 허공에서 수정 사슬 여러 개가 등장해 그의 의식세계로 침투했다.
발작하듯 몸을 떨다 굳은 사내는 멍하니 눈이 풀렸고 뒤로 물러나는 속도도 느려졌다.
츠즛!
키 큰 사내 앞으로 뇌전이 번득이고 나타난 한립은 멀쩡한 얼굴로 그의 머리통에 주먹을 날렸다.
퍽!
푸른 주먹 허상에 맞은 키 큰 사내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수정 사슬의 우리에 갇힌 푸른 혼백만이 허공에 떠올랐다.
한립은 즉시 손끝에서 금빛 뇌전을 날려 우리 속의 혼백을 태워버렸고, 우리는 해체되어 수정 사슬의 형태로 변해 그의 의식세계로 돌아갔다.
키 큰 사내의 육신과 선기 몇 개는 푸른 빛에 휩싸여 화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한 수사의 실력에 겨우 태을경 중기 수사를 상대하면서 기습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나른한 마광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
시간법칙을 사용하면 키 큰 사내와 정면 대결을 했어도 손쉽게 죽일 수는 있었으나 열화선존 앞에서 너무 많은 것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호리병박과 청죽봉운검 그리고 금색 자물쇠를 소매 속으로 불러들이고는 몸을 돌렸다.
“려 수사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열화선존이 다가와 감격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서로 돕기로 약조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두 분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어휴, 허공 난류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곳에 도착해 한동안은 아무 일이 없다가 갑자기 천정의 감찰선사를 마주쳐서 수사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면 이곳에 뼈를 묻을 뻔했어요.”
“그동안 외부에서 들어온 수사들을 마주치긴 했는데 천정뿐만 아니라 다른 세력도 섞여 있더군요.”
“뭐라고요? 어느 세력인지 알아보셨습니까?”
한립의 말에 열화선존이 화들짝 놀랐다.
“역포회 회원과 마역의 마족이었습니다.”
“역포회! 그들이 어떻게 이곳을……. 게다가 마역이라니…….”
“열화 수사?”
한립은 상대가 한동안 생각에 잠겨 말이 없자 그를 불렀다.
“아, 미안합니다. 너무 염려스러운 일이 많아 잠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천정에 의해 진언문이 멸문당하고 미라노조께서는 강력한 신통으로 종문 전체를 공간난류 속으로 이동시켜 저 이외의 다른 이들은 유적의 입구를 찾을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세력들이 이곳에 있는 것일까요? 설마 우리를 줄곧 쫓아왔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을까요?”
“어차피 그들이 이곳에 들어왔으니 그것을 고민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진언문 유적 안의 보물을 먼저 찾아내면서 안전에 유의하는 것이 상책이지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상당한 영력 파동이 퍼져서 다른 이들도 감지했을지 모릅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시지요.”
한립이 사방을 살피며 말하자 열화선존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하늘로 날아올라 방향을 정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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