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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30화 (1,587/2,000)

1830화. 시간 정지

*

괴석들이 있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한립은 숲을 벗어나 탁 트인 곳으로 빠져나왔다.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나아가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석림(石林)에 이를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원형으로 푸른 제단이 세워져 있었고,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곳곳에 푸른 이끼가 껴있었다.

한립은 어딘가 익숙한 원형 제단을 보면서 미간을 좁히다 훌쩍 날아올라 그 위에 섰다.

제단 바닥에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무늬가 덩굴처럼 퍼져나가고 있었고 은은하게 시간법칙의 힘이 느껴졌다.

그 밖에 제단 가장자리에는 이끼와 푸른 덩굴로 가려진 커다란 비석도 하나 보였다.

“법언천지(法言天地).”

가까이 다가간 한립은 비석에 금전문으로 적힌 금색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여기였어…….”

이곳은 그가 수정장벽을 통해 본 귀큰 승려, 그러니까 미라노조가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장소였다.

겨우 여덟 구절을 귀담아듣고 홀로 수련해 단번에 선규 8개를 뚫었을 만큼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된 경험이었다.

그는 인연이 닿아 직접 이곳에 오게 되자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진언보륜을 불러내고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당시에는 제단의 모습을 완전하게 보지 못했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파앗!

진언보륜의 시간도문 수백 개가 빛을 발하고 중앙의 진실안이 눈을 떠서 금색 액체와 같은 빛을 제단 위로 드리웠다.

금칠한 듯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한 제단 위로 허상들이 떠올라 익숙한 신영을 이루었다.

“과연…….”

노란 장포를 입고 볏짚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나무인간 목연, 수연궁 문 앞에서 조각상으로 보았던 머리 큰 아이, 헐벗은 상반신에 문신이 새겨진 인물 등을 하나씩 훑은 한립은 마지막으로 붉은 가삼을 걸친 귀 큰 승려를 바라보았다.

선한 눈빛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승려는 옥으로 만든 염주를 쥐고 입술을 달싹이면서 빠르게 무어라 말을 했다.

그가 입을 달싹일 때마다 오색 주술문자들이 입술을 비집고 나와 고공으로 날아오르며 천지와 공명하는 광경은 다시 보아도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과 달리 진실안이 복원한 허상에 불과한데도 한립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들었다가 마른하늘에 눈이 내리는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여러 의혹이 들었다.

이런 미라노조가 있는 진언문을 하루아침에 멸망시킨 시간도조는 대체 얼마나 강한 것인가…….

잠시 후, 나무 인간 목연이 질문을 하자 귀 큰 승려가 웃으며 대답하고 다섯 명의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계속해서 설법을 이어가려던 귀 큰 승려는 문뜩 고개를 들어 허공 어딘가를 쳐다보았는데, 한립도 그곳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설법에 심취해 있던 제자들도 정신을 차리고 그중 목연이라 불린 황포 나무 인간은 아예 벌떡 일어나서 노호성을 터트렸다.

한립은 그제야 이날 그가 엿듣는 것을 이들에게 들켰던 것을 떠올렸다.

쓴웃음을 지은 그는 목연이 앉아 있던 방석 옆에 광택이 흐르는 투실투실한 늙은 쥐가 두 발로 서서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 쥐는……모습이 꼭…….”

만황구역 심연 깊은 곳에서 보았던 녹색 거대 쥐가 크기만 다르지 꼭 저렇게 생겼었다.

한립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황포 나무 인간이 다시 자리를 잡으며 투실투실한 늙은 쥐의 머리를 톡! 쳐서 데굴데굴 굴려버렸다.

얼른 몸을 뒤집어 일어난 쥐는 미라노조 옆으로 줄행랑을 쳐서 그의 의복 자락 아래 자리를 잡았다.

미라노조는 고개를 들어 쥐를 보았지만 밀어내거나 쫓아내지 않고 설법을 이어갔고 황포 나무 인간과 다른 제자들도 늙은 쥐에 대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한립은 유심히 미라노조와 다른 제자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나 미라노조는 설법을 마치고 온화한 미소로 제자들을 한 명씩 둘러 본 다음 돌려보냈다.

그런데 제자들을 보내고 홀로 남은 미라노조가 눈을 감기 전 한립이 있는 곳을 잠시 쳐다보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깊은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설마 내가 설법을 엿듣는 것뿐만 아니라 이곳으로 찾아와 옛 모습을 복원할 것까지 알고 있었단 말인가?’

너무 터무니없는 추측이라 한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한참 정좌를 하고 있던 미라노조는 염주를 거두고 천천히 일어나 ‘법언천지’라고 적힌 비석을 향해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금빛이 흘러나와 ‘언(言)’ 자를 비추었다.

그 후, 손을 거둔 큰 귀 승려는 하늘을 쳐다보는 자세로 서서히 신형이 흐려져 사라졌다.

한립은 그 뒷모습을 보며 인생도 천지와 같이 아득하기만 하다는 느낌을 받아 넋을 놓았다.

허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법결을 맺어 진언보륜을 넣어둔 한립은 다시 제단 위 비석 앞으로 내려갔다.

소매를 저어 이끼와 덩굴을 거둬낸 그는 ‘언’자를 보면서 구유마동 신통을 발동했다. 글자의 끝부분에 예상했던 대로 금빛이 반짝이면서 뭔가 특이했다.

그는 손을 뻗어 오른손 중지와 식지를 칼처럼 비석에 찔러 넣고는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푸른 옥으로 엮인 옥간을 꺼내 들었다.

겉 부분에 금전문으로 ‘나날이 도를 익히고, 천지간의 인연과 법도를 익힌다’라고 적힌 옥간을 선령력으로 연화한 한립은 의식을 불어넣고 기쁨에 차올랐다.

<진언화륜경>의 9성 공법과 <수미감응편(須彌感應篇)>이라는 기괴한 문자가 적혀 있어서였다.

<진언화륜경>은 아주 익숙했는데, 훑어본 것이지만 몇몇 단락이 그가 익힌 내용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다행히 표면적인 내용이 확 달라진 것이 아니라 수행에 큰 방해가 되거나 주화입마에 들 정도는 아니었다.

9성 공법에는 목연에게 얻은 법언천지 신통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도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수미감응편>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난해한 수천 개의 글자에 불과했지만 앞으로 무엇인지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찬찬히 <진언화륜경>을 읽어본 한립은 당장 수련을 시작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귀 큰 승려 허상을 향해 깊이 예를 올렸다.

제단에서 내려온 한립은 빠르게 산을 내려가 대협곡 사이의 평평한 지형에 도착했다.

이전에 수연궁이 있던 곳과 비슷해 높다란 건물들이 연달아 지어져 있었는데 대부분 부서지긴 했어도 무척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한립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색을 했다.

반나절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영초 몇 그루를 찾은 것 외에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더 깊은 곳을 향해 들어갔다.

골짜기 깊은 곳으로 들어서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전방 천여 리쯤에서 시간 법칙의 파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흐릿하게 변해 그곳으로 향하면서도 한립은 긴장을 풀지 않고 주위를 경계했다.

금방 시간법칙 파동의 근원인 금색 대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경 수천 척에 이르는 대지에 각종 옥석과 재료들로 지어 금색 도료를 바른 대전은 그야말로 번쩍번쩍 광이 났다.

이 주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었는지 크고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었고 그 사이로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을 품은 금빛이 새어 나왔다.

한립은 설레면서도 조심스럽게 의식을 퍼트려 위험한 것이 없는지 확인하며 굳게 닫힌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대문을 밀어보니 금빛이 반짝이며 호응을 하듯 부드럽게 열려 오히려 깜짝 놀랐다.

내부도 금색 태양처럼 빛나서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의식으로 살펴보려 했는데, 부드러운 무형의 힘이 막아서 염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눈에 보랏빛을 일으켜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무형의 힘 때문에 역시 흐릿하게만 보였다.

잠시 동정을 살피던 한립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완전히 다른 공간에 들어선 듯 방대한 힘에 둘러싸여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깜짝 놀란 한립은 눈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방을 살폈다.

대전 안쪽에서 흘러나온 금빛 파동이 내부를 가득 채우고 이 시간의 힘이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그 외에도 수십 명의 수사가 서 있었는데 복색으로 확연히 천정 쪽과 진언문 쪽이 구분되었다.

바깥의 시체나 유골들과 달리 의복이 아직도 새것 같았고 싸우던 그 자세 그대로 각종 보호막을 방출하고 주변의 법보도 떠다니고 있었다.

수행을 감응할 수는 없었으나 법보의 광채로 보아 대부분 진선 수사에 우두머리 두 명만 금선 급인 듯했다.

모든 것이 어느 순간에 멈춰있었다.

한립은 눈앞의 광경에 경악했다.

그것은 그가 진언보륜을 펼쳐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하는 신통과 유사해 보였지만 이곳의 시간은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벗어나야 하지?’

몸을 움직이려 해봐도 시간의 힘에 갇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체내의 선령력이나 시간법칙의 힘은 아주 느릿하지만 미세하게 움직여지기는 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시간법칙의 공법을 익힌 것과 연관이 있을까?’

의문을 뒤로하고 한립은 전력을 다해 선령력을 움직였다. 금빛이 그의 몸에 떠올라 서서히 주변을 잠식해 나갔다.

평소 눈 깜짝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을 몇 시진이 지나서야 끝낼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법칙의 힘을 일으켜서 외부의 법칙의 힘의 영향을 최대한 밀어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등 뒤로 느릿하게 진언보륜이 떠올라 서서히 역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의 시간 흐름이 서서히 빨라지면서 외부의 구금 효과가 밀려나고 선령력과 시간법칙의 힘은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한립은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역전진륜 신통을 발휘하는 데 집중했다.

대략 반 시진이 더 지나서 진언보륜이 역전해 흐릿한 금빛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팔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역전진륜 신통을 극성으로 발동하면서 주변의 시간 구금 효과를 배척하는 걸 오래 유지할 수는 없지만 바로 뒤에 궁전 대문이 있어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리까지 움직일 수 있게 된 그는 마음의 무거운 돌을 내려놓고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길이 닿은 것은 가까운 곳에 있는 수사들의 저물법기와 주위의 비범해 보이는 법보와 선기들이었다.

천천히 그들 옆으로 다가간 한립은 저물법기와 허공에 뜬 선기, 법보를 챙기고 대전의 다른 곳으로도 가보았다.

그가 곧장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은 것은 사실 저물법기와 선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의 시간이 완전히 정지한 원인을 찾고 싶어서였다.

면적이 넓기는 해도 다른 궁전과 다를 바가 없었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거의 무너진 돌로 만든 제단 같은 게 보였다.

고개를 들어 제단을 살핀 한립은 별 이상이 없다고 판단하고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았다.

막 계단에 올랐을 때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이 느껴졌다.

‘찾았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갈수록 믿기지 않는 수준의 시간법칙의 힘이 존재해서 구금 효과가 높아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어렵게 떼면서 장장 반나절을 허비하고서야 제단에 오를 수 있었다.

제단 중앙에는 공격을 당한 듯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내부에서 진한 금빛이 법칙파동과 함께 반짝였다.

그 금빛이 이곳에 시간 정지 현상이 일어난 원인이었다.

금빛은 무슨 시간법칙의 힘을 품은 선기가 뿜어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공격이 남긴 힘의 잔재에 불과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한립은 대전 천장에도 같은 각도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격의 여파만으로 대전 내부에 시간정지 현상을 일으키다니 시간법칙을 얼마나 높은 수준까지 깨우쳤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설마 시간도조가…….”

한립은 퍼뜩 수결을 맺어 금색 고리 가운데 진실안을 불러냈다.

수직으로 형성된 진실안의 눈동자에서 금빛이 쏘아져 나와 둥근 구멍을 비추었다.

웅!

구멍 안의 금빛이 반응하면서 대량의 환영들이 솟아올라 팔뚝 길이의 금색 손가락 허상을 이루었다가 허공으로 날아 올라갔다.

눈앞에서 제단의 구멍이 빠르게 메워지고 원래 상태를 회복했으나 한립의 시선은 오로지 금색 손가락 허상에게 집중되었다.

반짝거리는 손가락 허상은 가닥가닥 시간법칙 정사가 보였고 무언가 현묘한 규칙을 이루면서 얽혀 있었다.

그 손가락 허상만 보아도 온몸이 관통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아…….”

진선계에 이르고 묵묵히 수련해 시간법칙의 힘을 다루는데 약간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금색 손가락 허상을 보고 나니 그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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