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29화 (1,586/2,000)
  • 1829화. 화세형충(火歲螢蟲)

    *

    백의 청년은 갑작스러운 여인의 맹공에도 싱긋 웃음을 지으면서 연달아 법결을 방출했다.

    노란 영역에 수레바퀴만 한 빛의 원반들이 떠올라서 박쥐가 발산한 음파를 약화시켰으나 그의 하얀 장포에 주름이 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지직!

    장포가 미세하게 찢어지고 백의 청년 뒤쪽 지반이 음파에 부들부들 떨리면서 궁전 앞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 희색을 드러낸 안자연은 주문을 외며 비파를 빠르게 튕겼고 보라색 박쥐가 더욱 흉흉한 눈빛을 하고 직접 두 날개를 펴 쇄도했다.

    “곱게 데려가 주려 했더니 기어이 피를 보게 하는군요.”

    청년은 힐끗 자신의 옷이 찢어진 걸 보고는 화를 내면서 무쇠로 만든 커다란 부채를 꺼내 들었다.

    복잡한 노란 주술문자들이 새겨진 무쇠 부채에서 흙 속성 법칙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스르릉.

    무쇠 부채가 펼쳐지고 노란 야수 모양의 문양이 살아나 입을 쩍 벌리고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쿠쿠쿠…….

    모래폭풍 속에서 보라색 박쥐는 가루가 되고 비파를 든 안자연은 몸이 굳어 피하지도 못하고 퍽! 하고 날아가 류화궁 문에 부딪혀 안쪽으로 쓰러졌다.

    “쯧쯧, 얼굴이 상했으면 큰일인데…….”

    백의 청년이 혀를 차며 가슴 아프다는 듯 무쇠 부채를 거두고 서둘러 문 안으로 들어가려다 수많은 벌레들이 날갯짓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어서 안쪽에서 안자연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이게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바깥으로 튕겨 나와 호되게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걸 보고 움찔한 백의 청년이 힐끗 그녀 쪽을 보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쌀알 크기의 암홍색 벌레들이 붉은 화염을 둘러싸고 안자연의 온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고통스럽게 바닥을 구르던 여인은 화염 속에서 은은한 금빛 안개에 둘러싸여 눈에 보이는 속도로 피부가 말라붙고 새까맣던 머리는 하얗게 세고 있었다.

    대체 무슨 벌레가 정원을 불살라 금선경 수사를 이리 쇠락하게 만든단 말인가!

    난색을 표한 백의 청년은 절색의 미녀고 뭐고 당장 달아나려 했다. 그때 거구의 신영이 하늘에서 철탑처럼 떨어져 새빨간 영역으로 그를 둘러쌌다.

    붉은 머리카락에 코뿔소의 코 그리고 뾰족한 귀에 커다란 귀고리를 한 치융이었다.

    강대한 기운을 드러낸 태을경 후기의 치융을 보고 백의 청년은 혼비백산했다.

    “겨우 금선 따위가 사부님이 기르시는 화세형충(火歲螢蟲)을 건드려? 네 수명은 얼마나 잘 타오르는지 보자꾸나!”

    차가운 웃음을 흘린 치융이 입을 열었다.

    “화, 화세형충? 그런 게 진짜 존재했다니…….”

    백의 청년은 화세형충이라는 말을 듣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진선계에 떠도는 전술 중에 화세형충이란 기이한 영충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속세의 반딧불이를 닮은 영충은 괴이한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세월 화염을 지녀 생령의 수명을 불살라 번식을 위한 힘을 얻는 흉악한 존재였다.

    그저 수명이 매우 짧아 한 달밖에 생존할 수 없기에 불사를 생령을 발견하지 못하면 스스로 멸종하고 만다.

    듣기로 영충을 기르는데 능한 수사가 시간 보물과 특수한 금제를 이용해 화세형충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방법을 고안했다고 했다. 그런데 류화궁에 그런 금제가 펼쳐져 있었고 그와 안자연이 싸우다 금제를 부순 것이 틀림없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 백의 청년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이종족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휘잉!

    그는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끼고는 전신에서 노란빛을 발산해 황토색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몇 초 뒤 수백 장 밖에서 황토색 빛이 반짝이고, 붉은 영역에서 갈라져 나온 화염 거대 손이 바닥에서 청년을 콱 집어 뽑아냈다.

    “허허, 살아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본데…….”

    치융이 손을 들어 바닥 쪽으로 내리누르니 화염 거대 손이 백의 청년을 눌러 가두었다.

    느긋하게 품에서 암홍색 짧은 피리를 꺼낸 치융은 처량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류황궁 대전이 웅! 하고 울더니 영충들이 부름을 받은 듯 백의 청년에게 몰려들었다.

    참혹한 비명이 들리고, 치융은 백의 청년과 안자연은 쳐다보지도 않고 광장 한쪽으로 걸어가 어느 이종족 조각상 앞에 섰다.

    손바닥이 부채만 하고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조각상은 벌거벗은 상반신에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제자가 마음대로 화세형충을 데려가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스승님. 류화궁에 함부로 침입한 이들은 제가 벌을 주었습니다.”

    치융은 조각상 앞에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 * *

    10일 뒤, 진언문 유적 안.

    어느 숲 위를 푸른 인영이 백옥 비차를 타고 지나쳤다. 창백한 피부에 평범한 이목구비를 지닌 그는 려강류라는 가짜 신분으로 움직이고 있는 한립이었다.

    거대 연못 뒤쪽으로 계속 전진하면서 별다른 일 없이 보물이나 제대로 된 유적도 찾지 못하고 쭉 이동하고 있었다.

    마차 위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그는 지면으로 내려가 비행 법기를 거두고 청석 돌판이 깔린 길을 따라 무지개다리 앞까지 걸어갔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널따란 다리 양쪽에는 회백색 돌사자 상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한립은 지나가면서 돌사자상을 만져 보았으나 어떤 영력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아가던 그가 갑자기 중간에서 멈춰 섰다.

    앞쪽에 다리가 끊겨있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간균열이 벌어져 어두침침한 내부에서 공간 파동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는 물론 양옆으로 누각과 거목도 공간균열에 잡아 먹혀 절반씩 사라졌다.

    “이리로는 더 못 가겠구나.”

    한립이 몸을 돌려 내려가려는데, 걸음을 떼자마자 다리가 흔들거렸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검은 균열 속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공간 파동이 흘러나와 천천히 다리를 잡아먹고 있었다.

    흠칫 놀란 그는 바닥을 가볍게 박차고 석사자상 옆으로 이동했다.

    “설마……진언문 유적이 여전히 붕괴 중이란 말인가?”

    이렇게 되면 앞으로 유적을 살필 때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그가 서 있던 석사자상 아래에서 괴이한 파동이 느껴지고 사람 열댓 명이 누워도 될 만큼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가 생겨나 강렬한 흡인력을 일으켰다.

    한립은 서둘러 체내의 진언보륜을 발동해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공간의 힘이 너무 강하게 작용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그는 표정이 싹 가라앉아 시간영역을 펼치면서 자금색 빛을 터트려 전신을 금빛 비늘로 덮고 현무혈맥으로 만들어낸 암녹색 갑옷을 걸쳤다.

    그가 청죽봉운검까지 불러내려는데, 발아래 쪽에서 허공을 잡아 뜯듯이 강력한 힘이 작용해 그와 석사자상을 소용돌이 속으로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잿빛의 어두운 공간으로 이동한 한립은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공간균열 속으로 그와 같이 들어온 석사자상이 잿빛 소용돌이에 부딪혀 가루가 되는 소리였다.

    한립은 두 눈에서 보랏빛을 반짝이며 주위를 경계했고 두 손을 펼쳐 아홉 자루의 청죽봉운검과 암녹색 현천호리병을 불러내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휘이잉-

    주위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회백색의 공간 소용돌이와 길고 짧은 공간균열들이 혼재하는 공간은 아주 혼잡했다.

    극히 먼 곳에 간간이 크기가 제각각인 대륙 같은 게 보였는데 아직은 안정적이어도 공간균열의 압력으로 점점 와해되는 중이었다.

    쿠웅.

    멀리서 쩌렁쩌렁하게 무슨 소리가 울렸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거대하기 짝이 없는 회백색 기류가 미친 듯이 회오리치는 것을 보았다.

    공간 파동이 구불구불 휘어지고 공간균열도 버티지 못하고 그 어지러운 기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길, 공간 폭풍!”

    공간균열에 휘말린 것도 낭패인데 그 안에서 공간 폭풍까지 만나다니 이렇게 운이 나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수행이 늘고 육신이 강해졌어도 공간의 힘은 얕잡아 볼 수 없었다.

    빠르게 주변을 파악한 한립은 가장 가까이 있는 대륙을 확인하고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신속히 그곳으로 이동했지만 공간균열이 너무 많아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천여 장을 가다 뒤를 돌아본 한립은 공간 폭풍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를 향해 다가오지는 않아도 이미 수만 장에 이르는 공간 폭풍이 빠르게 확장하고 있어 무슨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었다.

    저기에 휘말리면 온몸이 가루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원영도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쉰 한립은 영역을 넓히고는 금빛 빛줄기로 변해 급속도로 허공을 관통했다.

    수만 장, 수천 장, 천여 장…….

    대륙이 가까워질수록 코끝에 초목의 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대륙 끄트머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쿠아앙! 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거대하기 짝이 없던 공간 폭풍이 돌연 폭발해 수많은 회백색 빛의 칼날을 사방팔방으로 날리고 있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칼날은 심지어 산봉우리만 한 것도 있었고 공간의 힘을 품고 있어 그 위력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변고를 당한 한립은 뒤도 돌아볼 틈 없이 오로지 대륙을 향해서만 전진했다.

    그때 느닷없이 강렬한 공간 파동이 그를 덮쳐왔다.

    퍼퍼펑!

    그의 시간영역이 회백색 칼날에 맞아 원래의 감속효과를 내지 못하고 흩어지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한립은 괴성을 지르면서 안간힘을 다해 대륙으로 몸을 날렸다.

    쿵!

    단단한 공간장벽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온 그가 신음을 삼키고 다시 대륙을 돌아 피하려 할 때, 딱 팔뚝 크기만 한 회백색 빛의 칼날의 등을 찌르고 말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한립은 생각할 것도 없이 현천 호리병을 등 뒤로 보내고 다른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훅.

    호리병박이 빛을 발하고 입구에서 소용돌이가 떠올라 회백색 빛의 칼날을 흡수했다.

    손으로 호리병박을 쥐고 있던 한립은 그 충격에 손을 놓을 뻔하다가 간신히 참아냈으나 손바닥에 극통이 느껴졌다.

    급히 고개를 숙이니 호리병박이 달군 쇠처럼 새빨갛게 변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급박한 순간에도 한립은 기민하게 청죽봉운검을 거두고 현천 호리병박의 아랫부분을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펑!

    호리병박에서 빠져나온 회백색 빛의 칼날이 대륙을 둘러싼 공간장벽 쪽으로 날아갔다.

    쿠르릉.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장벽에 뚫린 협소한 틈이 만들어지자마자 사라지고 있었다.

    한립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서 그 틈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인간 운석처럼 어느 높은 산에 떨어져 산사태가 일어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흙먼지가 뿌옇게 일대를 덮었다.

    쉭!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빛줄기가 그 안에서 내려와 고공에서 천천히 봉합되는 공간균열을 올려다보았다.

    한립은 조금 전 생사를 오가던 순간을 생각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천 호리병박이 없었다면 공간의 틈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진언문 유적에서 너무 방심했구나.’

    그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지면으로 내려와 현천 호리병박을 들어 붉은빛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몸속의 선령력이 요동치는 것을 제외하면 청죽봉운검과 다른 선기들도 이상이 없었다.

    그제야 호리병박을 거둔 그는 단약을 먹고 반 시진 가량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끝낸 그는 주변 숲속에 기괴한 돌무더기들이 솟아 산 깊은 곳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긴 어딜까? 아직 유적 내부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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