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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27화 (1,584/2,000)
  • 1827화. 신의(信義)를 저버리다

    *

    한립이 철검으로 바다를 찌른 듯 막막함을 느끼고 있을 때 임호가 방출한 거검의 기세도 소용돌이에 통하지 않았다.

    또한 검은 거대 문이 방출한 빛기둥이 소용돌이에 막히자 풍림은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수결을 바꾸었다.

    웅!

    거대 문 위로 은색 문양이 떠올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술문자를 방출해 검은 빛기둥 속으로 녹아들게 했다.

    은빛으로 변한 빛기둥이 점점 반투명하게 변했다.

    푸쉭!

    힘이 들어 보이긴 했으나 반투명한 빛기둥은 소용돌이를 뚫고 남색 물고기 인간을 공격했다.

    검은 빛기둥에 둘러싸인 물고기 인간은 꽤 고통스러워했고 움직임에도 제약을 받았다.

    슉!

    풍림의 손짓에 검은 빛기둥이 부르르 떨리고 마기를 두른 거대한 신영이 튀어나왔다.

    보통 사람보다 10배는 큰 핏빛 머리카락에 굽은 뿔 두 개를 지닌 마물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새까만 창을 들고 있었다.

    체구는 엄청 크다고 할 수 없으나 발산하는 험악한 기운과 킬킬거리는 기괴한 웃음에 한립과 임호도 긴장했다.

    “우리 역외천마 13마왕 중 하나인 사비왕(娑毘王)입니다. 다른 역외천마의 심마환술과 달리 직접 혼백을 상하게 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경악한 마광의 목소리가 한립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가라!”

    풍림의 나지막한 명령에 사비왕이 움직임이 느려진 남색 물고기 인간을 향해 창을 뻗었다.

    쾅!

    물고기 인간의 몸이 터져 안개로 변해 흩어졌다.

    그걸 보고 희색을 드러낸 풍림은 수결을 바꾸어 빛기둥에서 갈라져 나온 검은 기운으로 연못 위의 두 보물을 낚아채려 했다.

    임호의 표정이 다급해졌으나 아직 남색 소용돌이가 사라지지 않아 어쩌지 못했고, 상황을 지켜보던 한립은 눈을 반짝이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두 보물이 검은 기운에 휩쓸리려는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물고기 인간이 터져 흩어졌던 안개가 다시 뭉쳐 아무렇지 않게 원형으로 돌아가 이를 드러내며 손에 든 낚싯대를 휘둘렀다.

    펑!

    곧 검은 기운이 폭발했다.

    “이럴 수가!”

    풍림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이 ‘사비의 문’은 마역의 어느 유적에서 오래된 선기 제련법을 얻어 고생 끝에 제련한 그녀의 본명선기였다.

    이걸 위해 거의 반평생 모은 재산을 쏟아부어야 했지만 그 위력에 만족해왔다.

    사비마광(娑毘魔光)만 해도 동급 수사의 혼백에 부상을 입히기에 충분했고 사비왕을 불러내면 태을경 존재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런 사비마광과 사비왕을 동시에 불러냈는데 물고기 인간이 멀쩡하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물고기 인간은 낚싯대를 빠르게 움직여 순식간에 남색 어망을 이루고 풍림의 사비의 문을 덮쳤다.

    찰나의 순간 본명선기가 붙들린 풍림은 정신을 차리고 두 팔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수결을 맺었다.

    휘이잉!

    검은빛을 강하게 머금은 사비의 문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어망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망은 커다란 물고기를 잡은 듯 빠르게 수축하면서 연못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쉭! 쉭!

    이와 동시에 낚싯대에서 낚싯줄 두 줄기가 한립의 청죽봉운검과 임호의 남색 거검으로 날아들었다.

    낚싯줄의 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한립은 서둘러 수결을 맺어 금빛을 방출해 신속하게 비검들을 피하게 했고 임호도 남색 거검을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에서 당황스러움을 읽었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쳤음에도 물고기 인간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립이 시간법칙을 펼쳐야 할지 마음속으로 고심하고 있는데, 풍림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그녀의 몸에서 검은빛의 물결이 급속도로 퍼져 영역을 이루고 수많은 마물 그림자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 듣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검은 영역과 공명하듯 사비의 문도 몇 배로 진한 검은 빛을 내뿜었고 문 양쪽에 조각된 마신들도 포효했다.

    포악한 기운이 대전 안을 휩쓸며 남색 물고기 인간 주변의 소용돌이도 영역에 제약을 받아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임호가 남색 빛을 터트려 영역을 펼쳤다.

    성난 파도처럼 남색 빛이 물고기 인간을 덮어 소용돌이들을 더 약화시켰다.

    “려 수사!”

    임호가 한립을 향해 소리쳤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없었다.

    눈을 번득인 한립도 수결을 맺어 대량의 금색 주술문자들을 품은 금빛을 방출했다.

    “이건…….”

    “시간법칙의 영역!”

    임호와 풍림이 한립의 영역에서 시간법칙을 감지하고 화들짝 놀랐다.

    대도를 이루는 법칙이 3천 개가 있고 각각이 세상 만물의 현묘한 이치를 담고 있다지만 3대 지존법칙 중 하나인 시간법칙을 깨우치는 일은 더없이 어려웠다.

    그들과 똑같이 금선경의 수사가 시간법칙을 익혔을 뿐 아니라 영역까지 방출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남색 물고기 인간의 소용돌이는 시간영역까지 펼쳐지자 거의 있는 듯 없는 듯 흐릿하게 변해있었다.

    눈빛이 서늘해진 한립의 뜻에 따라 아홉 자루의 청죽봉운검이 소매 속에서 앞다투어 빠져나왔다.

    “베라.”

    크기를 키운 아홉 자루의 거검들이 동시에 날아갔고, 임호도 기합을 넣으며 남색 거검을 움직였다.

    주변 영역의 물빛을 흡수한 남색 거검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한립의 청죽봉운검에 이어 소용돌이들을 갈랐다.

    본명 선기를 움직일 수 없는 풍림은 이를 악물고 주먹 크기의 검은 인장을 불러냈다.

    크앙!

    인장에서 검은빛을 반짝이며 호랑이 허상이 튀어나와 하늘을 찌를 듯 포효하며 영역의 검은 마물 그림자들을 빨아들였다.

    집채만 하게 커진 검은 인장은 사납게 소용돌이들을 향해 떨어졌다.

    드디어 표정이 달라진 물고기 인간은 남색 낚싯대를 이용해 무언가를 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영역 안에서 동작이 너무 느려져 한립 등 세 사람의 공격이 먼저 소용돌이에 충돌했다.

    콰르릉!

    요란한 빛들이 섞여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고 남색 소용돌이들에 금이 가면서 뒤쪽의 물고기 인간이 노출되었다.

    “죽어라!”

    풍림이 눈을 부릅뜨고 팔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인장이 파공음을 내며 물고기 인간을 짓눌렀다.

    임호도 기합을 넣고 남색 거검을 쏘아 보냈다.

    당황한 물고기 인간은 짙은 남색 안개를 인장과 거검 쪽으로 방출한 후 연못으로 숨으려 했다.

    물고기 인간의 몸에서 흘러나온 남색 빛이 미친 듯이 반짝이며 시간법칙의 힘과 격렬하게 맞섰다.

    “달아날 생각 말거라!”

    그걸 발견한 한립이 금색 자물쇠를 불러내 입에서 금빛을 훅! 불어냈다.

    금빛을 흡수한 자물쇠가 시간영역 속으로 녹아 사라지고, 물고기 인간 옆에서 거대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철컥.

    금색 자물쇠가 단단히 남색 물고기 인간의 팔을 붙들고 금빛을 발산해 쇄(鎖)라는 글자를 형성했다.

    영역의 힘으로 발동한 자물쇠가 만들어낸 글자는 어느 때보다 크고 깊게 물고기 인간에 박혀 강력한 구금의 힘을 발휘했다.

    다음 순간 검은 인장과 남색 거검이 안개를 뚫고 물고기 인간을 덮쳤다.

    퍼펑!

    물고기 인간은 남색 액체로 터져 사방팔방으로 튀었고 세 사람의 선기는 그걸 맞고 부식되었다.

    임호가 어두워진 거검을 빠르게 불러들이는데 양쪽에서 한립과 풍림이 손상된 선기는 신경 쓰지 않고 연못으로 몸을 날렸다.

    그것을 본 임호도 뒤늦게 움직였지만 그들보다 한발 늦고 말았다.

    풍림은 검은빛으로 남색 옥피리를 손에 넣고 한립은 푸른 빛으로 거대 손을 형성해 방패를 불러들였다.

    서늘한 방패는 뜻밖에도 탄성이 있는 부드러운 재질이었다.

    즐겁게 보물을 거둬들이려던 그가 허공의 미세한 파동을 감지하고 시선을 돌렸다.

    한립은 느닷없이 나타난 붉은 구슬을 보고는 안색이 급변해서 전신에서 금빛을 터트렸다.

    쿠르릉!

    그가 완전히 금빛을 발산하기 전, 구슬이 터지며 태양처럼 그를 집어삼키고 새하얀 화염이 이글이글 끌어 올라 허공에 구멍을 만들어냈다.

    대전을 채운 시간영역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광풍이 지나갔다. 엄청난 충격에도 궁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무너지지 않았다.

    임호가 흐릿하게 나타나 허공에 덩그러니 남은 남색 방패를 손에 넣고 웃음 지었다.

    “임호,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제때 피해 폭발에 영향을 받지 않은 풍림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검은 인장과 사비의 문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걸 말해줘야 압니까? 보물을 챙기고 있지 않습니까.”

    냉소를 흘린 임호는 뻔뻔하게 남색 빛으로 방패를 감싸 집어삼켰다.

    “구인류염주(九湮流焱珠), 태을경 수사도 죽일 수 있다는 필살의 보물을 지니고 있었군요. 정말 당신을 얕본 것 같습니다.”

    풍림은 아직도 빛을 발하는 붉은 태양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허허, 진언문 유적에 들어오면서 이 정도 준비는 당연하지요. 풍림 수사도 아직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숨겨둔 한 수가 있으리란 걸 압니다.”

    “괴물은 힘을 합쳐 잡고, 보물은 능력껏 취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신의를 저버리고 동류를 공격해 보물을 강탈하다니 역포회 회원다운 비열한 짓입니다.”

    “뭐 흔치 않은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시간법칙을 익힌 동급 수사와 동행하느니 깔끔하게 제거하는 것이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이런 수에 당했으면 머리가 모자라 죽은 것이지, 영민한 자였으면 당한 것은 저였을 겁니다.”

    임호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멸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소원대로 해드려야겠군요…….”

    바로 그 순간, 붉은 태양 속에서 코웃음 치는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호와 풍림 모두 놀랐지만 임호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붉은 태양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한립은 다치기는커녕 의복 자락 하나도 타지 않고 온전했다.

    그의 등 뒤에서 금색 고리가 천천히 돌면서 주변을 금색 파문으로 가득 채우고 있어 그가 지나간 다음에야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다, 당신…….”

    입을 다물지 못하던 임호는 별안간 몸을 틀어 번개처럼 대전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한립은 전신에서 금빛을 방출해 시간영역을 백리까지 뒤덮어 상대의 움직임을 10배나 늦춘 다음 움직였다.

    그의 소매 속에서 아홉 자루의 푸른 비검이 빠져나와 임호를 내리쳤다.

    쾅!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튕겨 나와 대전 벽에 부딪힌 임호는 겁에 질린 얼굴로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동전 크기의 남색 비늘들이 빼곡하게 연결된 남색 갑옷을 걸친 그는 머리에는 용머리가 달린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의 투구에서 용머리가 코를 벌렁거리면서 호흡하고 전신에 남색빛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그 강력한 갑옷 어깨에 비늘이 터져나가고 기다랗게 갈라진 흔적이 있었다.

    “흑토선역(黑土仙域) 성룡전(聖龍殿)의 용상전갑(龍相戰甲)!”

    풍림이 남색 갑옷을 보고 소리를 높였고 한립도 의외라는 기색이었다.

    흑토선역에 온 뒤 어려 경전을 살펴 이곳의 거대 세력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성룡전이면 개파조사가 진룡혈맥을 이어받은 고인으로 용을 숭배하는 신앙을 지니고 있었고, 이곳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종문이었다.

    성룡전은 각종 선기 갑옷을 제련하는데 능해서 그 품질은 백조산에도 뒤지지 않았다.

    옥곤루에서 경양상인과 이야기할 때도 상대가 성룡전을 언급하며 찬사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갑옷으로 이곳에서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보느냐?”

    표정이 서늘해진 한립은 임호가 성룡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도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체내에서 맑은 울음소리가 들리고 색색깔의 빛덩이 9개가 떠올라 진룡, 천봉, 뇌붕 등 진령법상의 허상으로 변했다.

    이전과 달리 거령의 진령 본체인 ‘몽염’ 오조 회룡의 허상도 섞여 있었다. 경칩 12결의 변신술 중 몽염진령 변신술도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수결을 맺은 한립의 몸으로 진령 허상들이 녹아들고 자금색 빛이 터져 나왔다.

    삼두육비의 마신으로 변한 한립은 손목을 털어 아홉 가닥의 시간정사를 푸른 거검 속으로 흘려보냈다.

    웅웅웅!

    푸른 거검에 금색 주술문자들이 일렬로 떠오르고 주변의 천지영기가 요동치면서 오색 빛 알갱이들을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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