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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26화 (1,583/2,000)
  • 1826화. 미끼

    *

    한립은 단약을 꺼내 기운을 다스리며 계속해서 안쪽으로 걸어갔다. 3층 궁전의 계단 앞에 이른 그는 급히 위로 올라가지 않고 의식을 퍼트렸다.

    커다란 검을 짊어진 우람한 사내가 먼저 두 번째 길로 들어섰으니, 분명 궁전 안에 있어야 할 텐데 오는 내내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았단 말인가?’

    잠시 주위를 살펴봤지만 이상한 점이 없자 한립은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입구로 들어선 순간 낡은 병풍이 보였는데 그 위에 그려진 산수화의 물이 빠져서 윤곽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칼로 수도 없이 베였는지 이런저런 흔적이 가득했다. 아직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게 용했다.

    그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딛다 무의식중에 눈썹을 꿈틀했다.

    그리고 잠시 주춤거리다 평온한 표정으로 서서히 병풍 앞으로 다가가 잘려나간 틈 뒤로 낡은 책장과 그 위에 놓인 다양한 병들 그리고 검푸른 서적들을 살폈다.

    병풍을 빙 돌아 뒤쪽으로 가니, 책장이 원래 백여 개는 되었는데 다 망가지고 남은 것은 몇 개 되지 않은 듯했다.

    한립은 쓰러진 책장과 어지럽게 흩어진 서적들을 지나면서 그나마 멀쩡한 서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금석록(金石錄)>

    고대 글자로 제목이 적힌 서책에는 금석(金石)에 관해 연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후 연달아 집어 든 서적들도 비슷하게 일상적인 잡학들에 관한 것이었다.

    “누가 이곳에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세상만사에 흥미가 많은 사람이었겠어.”

    한립은 몇몇 문을 통과해 3층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섰다.

    막 마지막 문을 통과했을 때, 마치 결계 안에 들어선 듯 강렬한 시간법칙의 힘이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피자 대전 중앙에 남색 연못 하나가 찰랑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의식중에 머릿속에 광음의 물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시간법칙의 힘이 이렇게 짙다니? 저 연못을 이룬 물이 광음의 물이라도 된단 말인가?’

    막 의식으로 자세히 조사해보려던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연못에서 시간법칙 파동 외의 다른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몇 걸음 다가서자 시체 하나가 둥실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키가 작고 몸은 마른 데 비해 머리가 비대해 당장이라도 연못 깊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어서 잠시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머리가 큰 아이의 시체는 수연궁 입구에서 보았던 조각상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워낙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남색 방패가 시체 옆에 떠서 요란하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방패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남색 수정 피리도 있었는데 대나무 줄기를 가져다 엮은 듯 자연스럽게 구멍이 뚫린 모습이 퍽 정교해 보였다.

    두 개 모두 영기가 왕성하고 강렬한 시간법칙의 기운을 품은 높은 품계를 지닌 시간 선기였다.

    “…….”

    한립은 보물을 보고 눈빛이 뜨거워졌으나 함부로 건들지 않고 두 눈에 보랏빛을 일렁이면서 대전 서북쪽의 원형 돌기둥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스스로 임호라 칭한 우람한 사내가 무슨 보물을 사용했는지 물빛 돌기둥과 기운을 일체화시키고 숨어 있었다.

    연신술 5성을 익히고 있었기에 3층에 들어서자마자 기운을 감지했지 다른 이들이었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돌연 한립이 흐릿하게 변해 그 자리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가 종적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3층 계단 입구에서 붉은 그림자가 등장했다. 바로 봉경원이었다.

    창백한 얼굴을 한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와 한립처럼 망가진 서가에서 이런저런 경전들을 들추어 보고는 한쪽으로 던져두었다.

    봉경원의 걸음걸이는 자연스러웠지만 두 눈만은 수시로 사방을 살피며 기습에 대비했고 의식을 대전 전체에 퍼트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한립과 임호의 은신술이 더 고명했던지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걸음을 서둘러 연못 앞까지 도착했다.

    남색 방패와 피리를 본 그의 눈빛에 탐심이 어렸지만 한립과 마찬가지로 무턱대고 달려들진 않았다.

    그도 우람한 사내가 두 번째 길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3층까지 와서도 찾을 수 없어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임 수사,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저와 연못 안의 보물을 건져내시지요?”

    보물에서 눈길을 돌린 봉경원이 낭랑하게 외쳤다.

    한립이 서북쪽 돌기둥을 바라보니 우람한 사내는 여전히 기운을 감추고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전 안에는 봉경원의 목소리만 울리다 조용해졌다.

    봉경원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자 결국 욕심을 참을 수 없었는지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자 팔이 8개 달리 금갑괴뢰가 불려 나와 연못으로 두 선기를 건지러 뛰어들었다. 괴뢰는 수면에 거미처럼 엎드려 두 팔을 남색 피리와 방패로 뻗었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주시하고 있는데 금갑 괴뢰의 두 손이 보물에 닿기 직전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찰랑.

    거울처럼 평평하던 수면에서 물빛 신영이 홀연히 튀어나와 금갑 괴뢰를 채간 것이다.

    터텅!

    금갑 괴뢰는 제대로 반항도 못 해보고 연못가에 떨어졌고 물갈퀴가 달린 남색 발이 펑! 하고 그 가슴을 밟아 진선 후기 수사에 맞먹는 괴뢰의 핵심 기관을 파괴했다.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일에 봉경원도 위협을 느끼고 암홍색 우산을 펼친 채 물러섰다.

    괴뢰의 가슴을 짓이기고 있는 발의 주인은 물고기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수정 조각 같은 비늘을 지닌 물고기 인간이었다.

    그는 수행을 전혀 종잡을 수 없는 데다 시간법칙 파동을 발산해 봉경원의 가슴을 더욱 철렁하게 했다.

    그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어 계단 쪽을 힐끔 쳐다보며 달아나려 했지만, 남색 물고기 인간이 먼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물고기 인간은 소리 없이 으르렁거리며 남색 안개로 퍼져 봉경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들짝 놀란 봉경원이 붉은 우산을 활짝 펼쳐 빙글빙글 돌리면서 계단 쪽으로 몸을 날렸지만, 남색 안개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가 우산이 발산한 붉은 빛과 봉경원을 함께 집어삼켰다.

    “컥…….”

    억눌린 비명이 흘러나오고 묵직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3층은 다시 고요해졌다.

    퐁당.

    잠시 후 안개가 뒤로 물러나더니 물고기 인간으로 변해 연못으로 펄쩍 뛰어들었다.

    남색 방패와 피리는 먹이를 찾기 위한 ‘미끼’인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계단 앞에는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갈색으로 변한 시체와 영기가 고갈되어 엉망이 된 우산만 남아 있었다.

    대전 천장의 대들보에서 그걸 보고 있던 한립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순식간에 금선 수사를 죽이고 사라진단 말인가?

    바로 그때 보라색 신영이 소리 없이 3층 입구에서 나타났다. 풍림이라는 여인이었다.

    천천히 봉경원의 시체를 지나친 여인은 그리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두 분, 저도 연못에 뛰어들어 저 물고기 인간의 실력을 시험해 보길 원하시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저는 원봉이 아니라서요. 그만 나오시죠.”

    풍림은 정확히 한립이 있는 곳과 돌기둥 쪽을 바라보면서 담담히 말했다. 그녀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덮여 있어 어둠 속에 뜬 보라색 별 같았다.

    한립은 그녀도 구유마동을 익혔으며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온화하고 매력적이던 분위기도 확 달라져서 여왕과 같은 위압감과 차가움이 느껴졌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한립은 더는 숨지 않고 나섰다. 그제야 꼼짝 않고 숨어 있던 임호도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말씀이 과하십니다. 원봉이야 스스로 경거망동하여 저리된 것이니 어쩔 도리가 있나요. 그나저나 려 수사와 풍 수사의 수행이 대단하십니다.”

    임호가 허허 웃음 지었고 한립은 무표정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시지요. 일단 힘을 합쳐 저 괴물을 죽이고 보물은 각자 능력껏 챙기는 것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풍림은 코웃음을 치고는 임호의 가식적인 언사에 냉담하게 반응했다.

    “좋습니다. 괴물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 세 사람이 힘을 합친 것만 하려고요?”

    임호는 고개를 끄덕여 찬성했으나 한립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려 수사께서는 동의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풍림이 그런 그를 보고 물었다.

    “협력해 함께 싸우는 것은 동의합니다. 허나 저는 견문이 얕아 괴물의 내력에 대해 전혀 모르겠으니 두 분께서 아는 바를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겸손하시네요. 솔직히 저도 남색 물고기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겠군요.”

    풍림이 고개를 젓고 임호도 모른다는 표시를 했다.

    ‘아무도 모른다라…….’

    한립은 실망했으나 어차피 힘을 합치기로 한 것, 전술을 상의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연못을 노리기로 했다.

    임호의 속도가 가장 빨라 연못 인근에서 손을 뻗었다.

    촤륵!

    집채만 한 남색 짐승 발톱이 나타나 방패를 움켜쥐려 했다.

    그러자 연못에서 물보라가 일고 남색 물고기 인간이 떠올라 마른 손에 물빛 지팡이 허상을 만들어냈다.

    고풍스러운 지팡이는 그 기운 역시 태고의 황량함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펑!

    위력적으로 보이던 남색 짐승 발톱이 터져 대량의 물빛으로 흩어지고 임호가 놀라 서둘러 수결을 맺었다.

    그의 등 뒤로 남색 거검이 튀어 나가 산봉우리처럼 몸집을 키우면서 물고기 인간을 베었다.

    솨아아-

    파도가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물의 기운이 왕성해지면서 공기가 묵직해졌다.

    그때 다른 쪽에서 풍림도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서 검은빛이 빠져나가 거대 문으로 변했다.

    적갈색 얼룩이 있는 거대 문에는 보라색 문고리가 달려 쩔그렁거렸고 두 개의 문짝에는 각각 흉측하게 생긴 핏빛 눈의 마신이 조각되어 있었다.

    대량의 마기가 검은 문에서 방출되어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불길하게 만들었다.

    풍림이 주문을 외며 정혈을 토해 거대 문에 스며들게 하자 악귀 얼굴이 입을 벌려 핏빛을 발산했다.

    핏빛들은 거대한 손으로 변해 보라색 문고리를 잡고 당기고 있었다.

    쿠쿵.

    검은 문이 열리고 악귀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대전을 가득 채우면서 굵은 빛기둥이 빠져나와 남색 물고기 인간을 향해 날아갔다.

    그 검은빛 속에서 인간과 짐승의 얼굴이 뒤섞여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무슨 신통을 펼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연못 앞에 이른 한립은 검은 빛기둥의 기운에 일순 머리가 아득해졌다가 급히 연신술을 발동하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지긋이 풍림을 바라보다 검결을 맺었다.

    푸른 비검 세 자루가 소매를 벗어나 강력한 금빛 뇌전을 번쩍였다.

    한립의 주문에 푸른 거검으로 변한 비검들이 품(品)자 형태를 이루고 남색 물고기 인간 주위에 대량의 금빛 뇌전을 발산했다.

    휘휘휘…….

    세 사람이 동시에 공격을 날리자 물고기 인간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러 수많은 지팡이 허상들로 두꺼운 빛의 장막을 만들어냈다.

    세 사람 다 전력을 다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폭풍과 같이 쏟아지는 공격은 평범한 태을경 초기의 수사도 가볍게 막아낼 수 없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쿠콰콰쾅!

    지팡이 허상이 만든 남색 장막이 점점 얇아지다가 무너져 내렸다.

    남색 물고기 인간은 부서진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또 다른 손에서 남색 낚싯대를 불러내 가느다란 낚싯줄을 휘둘렀다.

    낚싯줄이 지나는 곳마다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급속도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청죽봉운검이 발산한 대량의 금색 뇌전도 남색 소용돌이와 접촉하면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고, 소용돌이는 잠시 진동하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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