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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25화 (1,582/2,000)
  • 1825화. 시매(尸魅)

    *

    “길이 갈라지는데 각자 원하는 길을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다들 어디로 가시렵니까?”

    임호가 표정을 바로 하고 물었다.

    한립은 시간법칙 파동이 느껴지는 삼수탑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그가 입을 열기 전 임호가 말을 이었다.

    “저는 골랐습니다. 물 속성 공법을 익히고 있어 삼수탑으로 한 번 가보려 합니다.”

    “저는 천약곡으로 가보고 싶네요. 좋은 영초나 몇 뿌리 구하면 좋겠어요.”

    풍림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럼 저는 승천전으로 가겠습니다. 이름이 좋지 않습니까.”

    봉경원까지 선택을 마치자 한립은 아무 말 없이 세 번째 길 그러니까 오령각이라 쓰인 곳으로 걸어갔다.

    “다들 갈 길을 고르셨으면 흩어지지요. 다들 좋은 보물을 찾으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임호가 호탕하게 웃고는 두 번째 길로 들어가 금방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이들도 자기가 택한 길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어 백옥 광장이 고요해졌다.

    그런데 잠시 후 푸른 그림자가 세 번째 길에서 돌아 나왔다.

    한립은 주변을 살피고 흐릿하게 푸른 그림자로 변해 소리 없이 삼수탑 쪽으로 날아갔다.

    그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번째 길에서도 봉경원이 돌아 나와 두 번째 길로 들어섰다.

    그 다음으로는 보랏빛이 반짝이고 풍림이 백옥 광장에 돌아와 가볍게 두 번째 길로 걸음을 옮겼다.

    길을 따라 쭉 걸어간 한립은 금방 3층 탑 형식의 궁전 앞에 이렀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푸른 벽돌을 쌓아 올린 탑은 세밀하게 주술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높다란 둥근 문이 정면에 있었다.

    주위를 살펴 임호가 없는 것을 확인한 한립은 정문으로 다가가 문고리의 짐승 눈알 모양이 부서져 금제가 파훼된 것을 보았다.

    바로 들어가지 않고 안을 살폈으나 연기 같은 게 자욱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남색 안개가 훨씬 짙게 밀려들면서 기이한 향기가 났고 발바닥에 불이 붙은 것처럼 바닥이 뜨거워졌다.

    고개를 숙인 한립은 깜짝 놀랄만한 광경을 보았다.

    자신이 어느새 불바다 속에 들어서 있었고 불길이 신발을 태우고 장포에 옮겨 붙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서였다.

    “또 환영이라…….”

    한립은 묵묵히 연신술을 운용했다.

    의식세계에 맑은 바람이 불어 탁한 기운을 밀어낸 듯 정신이 또렷해졌다.

    동시에 불바다도 급속도로 줄어들어 작은 불꽃으로 변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자욱한 남색 안개뿐이었다.

    한립은 구유마동을 펼쳐 사방을 살폈다.

    부서진 돌기둥 조각과 나무 파편 그리고 움푹 파여서 검게 타들어간 구멍이 잔뜩 있고 곳곳에 피가 굳어 말라붙어 있었다.

    바싹 마른 시체들도 수북하게 쌓여 있어 처참하기까지 했다.

    아직 완전히 썩지 않은 옷으로 판단하건데, 진언문 제자들도 있고 천정 수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유골들 틈에는 남색의 사람 형상을 한 괴뢰들도 완전히 망가져 쓰러져 있었다.

    벽으로 나뉘어 있는 여러 방들을 돌면서 조사를 했지만 핏자국과 시체만 가득했다.

    1층 끝에 이르자 백옥 계단이 구불구불 2층으로 이어져 있었다.

    굵은 거검 하나가 계단 위에 꽂혀 있었는데 심하게 녹슨 칼 주위로 시체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신중하게 거검과 시체들을 관찰한 한립은 이상이 없자 소리 없이 날아올라 계단에 박힌 검날을 밟고 2층로 향했다.

    막 2층에 이른 그는 뼈가 시리는 한기의 침식에 서둘러 선령력을 운용해 한기를 막았다.

    두꺼운 남색 얼음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바닥과 벽 그리고 창문, 기둥에 얼음이 가득하고 천장에는 고드름이 맺혀 있었다.

    바깥에서 보던 것과 달리 2층이 더 넓고 시야를 가로막던 벽도 없었다.

    2층에는 진언문과 천정 수사들의 시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완전히 썩지도 않아 참혹한 상태였다.

    그 밖에 일부에는 거대한 요수 시체의 뼈가 흩어져 있어 어떤 짐승이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강렬한 흉살기를 느낀 한립이 천천히 걸어가 가장 안쪽에 얼음으로 막힌 계단으로 다가섰다.

    “흠?”

    그러던 중 갑자기 표정이 달라진 그가 발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얼음이 거울처럼 그를 비출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 순간 얼음 속의 한립 그림자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동시에 한립의 손에서 청죽봉운검이 나타나 날카롭게 그림자를 찔러 들어갔다.

    그림자는 연기처럼 청죽봉운검을 피해 위로 솟구치면서 두 손을 한립의 가슴으로 뻗고 있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한립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그림자’는 의복이 헤지고 얼굴이 반쯤 썩어 뼈가 드러나 있었고, 뻗은 두 손에는 보라색 손톱이 길쭉하게 뻗어 나와 흉살기를 발산했다.

    “시매(尸魅)! 이런 귀물이 이곳에…….”

    귀물의 정체를 파악한 한립은 장검을 틀어 앞쪽을 막았다.

    챙!

    불똥이 튀고 괴력에 검을 든 채로 한립이 밀려났다.

    혼백과 시체가 결합해 만들어진 시매는 수만 년 동안 흉살기를 흡수해 불사체에 가까운 몸을 지니고 살아 있는 생물이나 혼백을 잡아먹는 것을 좋아했다.

    윤회에 들지 못해 귀물이 된 눈앞의 괴물은 태을급의 시매였다.

    한립은 시매의 눈동자가 뿌연 것을 보고 조금 안심했다.

    대량의 생명체와 혼백을 흡수한 시매는 잔학한 습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지능만 개발되어 동급 수사를 훨씬 능가하는 위력을 보인다고 들어서였다.

    그나마 그가 마주친 시매는 이곳 갇혀 있느라 사냥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해 지능이 없는 것 같았다.

    만일 상대가 지능까지 높은 태을급 시매였으면 한립도 당장 도망치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그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사이 시매가 휙 몸을 돌려 사라졌다.

    눈빛이 매서워진 한립이 발끝으로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섰다.

    쾅!

    그가 서 있던 곳에 나타난 시매의 두 발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남색 수정 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며 한립은 속으로 주문을 외워 금색 구슬을 퍼트렸다.

    시간영역이 2층 전체를 장악하자 빠르게 퍼지던 남색 가루가 느릿하게 이동했다.

    그런데 태을급 시매는 잔영을 남기면서 또 이동하고 있었다. 영역의 억제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움직임이 빨랐다.

    몸을 비튼 한립이 청죽봉운검으로 어딘가를 찔러 들어갔다.

    챙!

    검끝이 태을급 시매의 날카로운 손톱 두 개를 비집고 심장을 노렸으나 시매가 검기를 미친 듯이 빨아들여 옷만 너덜너덜 하게 찢기고 가슴 피부에 하얀 흔적이 남았다.

    근육이 엉켜 있는 검푸른 피부도 뚫지 못한 것이다.

    빠르게 팔을 거둬들인 시매가 보랏빛 손톱을 배로 길게 만들어 극독을 품고 한립의 목을 공격했다.

    한립은 피하기 보다는 기합을 넣으며 검 자루에 힘을 실었다.

    치치치칙.

    청죽봉운검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단단한 시매의 가슴 피부를 뚫고 들어갔고 동시에 검신에서 금색 뇌전이 일고 있었다.

    키하하학!

    사납게 울부짖은 시매가 뒤로 쓰러지며 가슴에서 검은 연기를 뿜었다.

    귀물과 상극인 벽사신뢰가 통한 것 같았다.

    한립이 흐릿하게 시매 앞에 나타나 검으로 시매의 머리를 잘라내려는데, 갑자기 뿌연 시매의 눈에 괴이한 보랏빛이 돌며 온 몸이 연기처럼 변해 흩어졌다.

    화들짝 놀란 한립은 다급히 물러섰다.

    연기로 흩어진 시매가 귀신처럼 그의 뒤에 나타나 독을 바른 검같은 열 개의 손톱으로 그의 등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도 영역의 영향을 받아 속도가 예전만 못해 한립은 검을 등 뒤로 휘둘러 손톱들을 막았다.

    채채채챙.

    검끝에서 수십 가닥의 뇌전이 흘러나와 그물을 이루고 달려드는 시매를 둘러쌌다.

    파치치칙!

    이어서 뇌전이 사방으로 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참혹한 비명을 질러댄 시매는 검기와 벽사신뢰에 당해 새까맣게 타들어 가면서도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한립이 다른 수를 쓰려할 때, 시매가 다시 허상으로 변해 검 그림자처럼 바닥의 얼음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바닥의 얼음 속을 흐르던 흉살기들이 시매를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저런 능력을 지녔을 줄이야.”

    벽사신뢰에 당한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되는 것을 본 한립은 당장 앞으로 박차고 나가 손에 든 장검으로 시매 위쪽을 갈랐다.

    콰쾅!

    바닥의 얼음이 갈라졌지만 시매는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공격을 피해 다시 위로 솟아올랐다.

    한립은 당장 검을 횡으로 들어 막았다.

    이번에는 시매도 벽사신뢰를 무시하고 양 손으로 청죽봉운검을 붙든 채 악귀 같을 얼굴을 한립 쪽으로 들이밀고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 한립은 바로 호흡을 멈추고 오감을 봉쇄 했지만 늦고 말았다. 짙은 보라색 시독(尸毒)이 펑! 하고 터져 그의 얼굴을 감싼 것이다.

    얼굴이 마비된 한립은 콧구멍을 타고 들어간 독에 의해 목이 붓고 미칠 듯이 가려웠으며, 두 눈도 쓸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참다못해 고함을 내지른 그가 들고 있던 청죽봉운검의 벽사신뢰를 한 번에 터트려 달려든 태을경 시매를 떼어냈다.

    한립은 연달아 대전 안을 휙휙 이동하면서 멈추지 않았고 잠시 튕겨나갔던 시매는 끈질기게 그를 쫓았다.

    오감이 마비된 한립은 영역 안의 의식만으로 시매를 감지해 피해야 했다.

    태을경 시매는 두 눈에서 수시로 보랏빛을 번뜩이면서 영역의 억제 하에 놀랍게도 점점 더 속도를 높여 한립도 충돌하는 일이 늘어났다.

    한립의 장포자락에 점점 무언가에 베인 자국이 늘어났다.

    얼굴이 자욱한 보랏빛 안개로 뒤덮인 한립은 체내의 선령력을 잔뜩 일으켜 목구멍과 코에 밀집된 시독을 배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시매가 홀연히 흩어져 다섯 개의 신영으로 분리되었다.

    의식 감응으로 다섯 신영을 구분할 수 없자 한립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독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구유마동 신통도 쓸 수 없었다.

    다섯 마리의 시매가 한립을 노리고 사방에서 몰려들어 기다란 손톱으로 그의 미간과 뒤통수, 목, 심장, 단전 등 급소를 노렸다.

    어느 쪽으로 달아나려고 해도 시매가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파아아앗!

    피할 길이 없어지자 한립은 전신에서 눈부신 금빛 광선을 터트렸다.

    금빛 찬란한 고리가 날아올라 회전하면서 몇 걸음 거리로 다가온 다섯 시매들이 광선에 휩싸여 멈춰 섰다.

    푸확!

    동시에 한립은 입에서 시독을 뭉친 보라색 안개를 뱉어 터트렸다.

    얼굴을 가리던 보라색 안개가 걷힌 그는 눈을 반짝이면서 다섯 마리를 살폈다.

    한 눈에 미간을 노리는 녀석이 나머지 네 마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놈!’

    한립은 들고 있던 청죽봉운검을 들어 미간을 노린 시매의 단전을 향해 찔러넣으면서 강력한 벽사신뢰를 일으켰다.

    장검에서 뇌전 실이 빠져나가 둥글게 뭉치더니 시매의 단전에서 폭발했다.

    쿠릉!

    물항아리 크기의 뇌전 기둥이 시매를 집어 삼키자 나머지 시매 허상들이 없어져 버렸다.

    한립의 제뢰술에 제대로 당한 시매는 진언보륜에 의해 아직도 허공에 구금되어 있었다.

    “성가시게 되었구나…….”

    한립은 뇌전이 소실되고 다시 나타난 시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능이 높지 않아도 태을옥선에 맞먹는 실력을 지녀 제뢰술 한 방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립이 현천 호리병 안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운을 배양하고 있던 청죽봉운검을 쓸까 아니면 정염불새를 불러내야 할까 고민하는데 머릿속에서 마광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건 음살귀매(陰煞鬼魅)에 속하는 종이라 불이나 뇌전에도 저항력이 있을 겁니다. 한 수사께서 처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제게 맡겨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방법이 있겠습니까?”

    “흉살기가 응결해 만들어진 존재라 쉽게 죽지 않겠지만 마침 제가 사혈(死穴)이 있는 급소를 아니 수사께서 허락만 하시면 없애 보겠습니다.”

    그 말에 한립이 오른손 검지손가락에서 보광을 일으켜 꽃봉오리 문양을 떠오르게 했다.

    파앗.

    그 옆으로 은색 빛의 문이 나타나면서 동시에 진언보륜이 빙글 돌아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시간 법칙의 힘이 사라지자 태을 시매는 즉시 그의 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쉭!

    그때 은색 빛에서 검은 그림자가 날아가 흉살기를 응결해 만든 암홍색 문양을 번뜩이면서 시매의 가슴을 꿰뚫었다.

    검은 그림자는 바로 회선 시체와 합일한 마광이었다.

    시매의 몸을 관통한 마광의 손바닥 위에 주먹 크기의 검은 살점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심장 모양을 하고 있었고 검은 흉살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시매의 약점은 단전이나 머리가 아닌 이 살태(煞胎)라는 것입니다. 이걸로 흉살기를 응결해 시체에서 시매가 되는데, 보통 물이나 불 혹은 법기로도 뚫기 어렵지요.”

    느긋하게 팔을 거둔 마광이 한립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때 시매의 잔해가 모래처럼 흩어져 검은 먼지처럼 바닥에 수북하게 쌓여갔다.

    “그런데 이 살태는…….”

    “마광 수사께서 시매를 친히 죽여 없앴으니, 살태도 알아서 처리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한립의 허락에 마광은 살태를 으깨 가루로 만든 다음 보랏빛이 흐르는 둥근 결정을 찾아 삼켜버렸다.

    “그럼 저는 돌아가 계속 수련하겠습니다.”

    “그러세요.”

    마광은 은색 문을 넘어가 수련하던 곳으로 돌아갔고 한립은 손가락을 까딱해 빛의 문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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