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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24화 (1,581/2,000)

1824화. 동행

*

통로는 아주 길어서 반각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고 점점 길이 넓어졌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진한 흉살기가 공기 중에 떠돌아 체내의 흉살기를 자극했다.

“…….”

서둘러 운공을 해서 외부의 흉살기를 차단한 그는 얼아 가지 못해 걸음을 멈추었다.

희미하게 폭음이 들리고 통로가 잘게 흔들려 누군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문을 외워 흐릿한 그림자로 변한 한립은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의 끝에는 어두침침한 궁전이 연달아 이어졌고 그곳에서 다른 방향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어 아주 길이 복잡했다.

한립은 전투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서 열댓 개의 궁전을 지나 천장 규모의 대전으로 들어섰다.

열댓 명이 팔을 벌리고 서야 겨우 감싸 안을 만한 굵은 돌기둥들이 대전 곳곳에 박혀 있고 그 위에 주술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돌기둥들 대부분이 쓰러진 빈 공간에 세 명의 수사가 대여섯 마리의 검은 그림자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철탑처럼 우람한 체구의 남색 삿갓을 쓴 거한은 문짝만한 거검을 휘둘렀다.

보라색 장포를 걸치고 얼굴은 천을 가린 호리호리한 여인은 마기에 둘러싸인 마족이었다.

마지막으로 붉은 옷을 입은 준수하게 생긴 청년은 얼굴에 분을 발라 여인인지 사내인지 애매했다.

한립은 마지막 사람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야학곡에서 스쳐지나갔던 봉경원이란 자였다.

‘진언문 유적을 노리는 게 윤회전만은 아니구나. 천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곳을 찾은 걸까?’

그들이 싸우는 검은 그림자 괴물은 사람보다 몇 배는 키가 크고 전신에 검은 털이 자란 원숭이였다.

머리에 두 개의 검붉은 뿔이 솟고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든 원숭이 괴물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저건 또 뭐란 말인가…….”

돌기둥 뒤에 숨은 한립이 검은 괴물 원숭이를 자세히 관찰했다.

바람처럼 움직이는 원숭이 괴물은 봉경원 등이 날린 선기를 맞고도 상처가 나지 않았다.

반대로 원숭이 괴물들이 분출하는 검은 화염은 꽤 강력한지 수사들이 거의 막지 않고 피하기 급급했다.

세 사람은 약간 밀리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괴물들의 맹공을 막고 있었다.

한립은 그들이 싸우는 곳 주위를 살폈으나 보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빼앗으려고 괴물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운 나쁘게 마주쳐서 전투가 벌어진 듯 했다.

한립은 보물도 없겠다 괜한 일이 끼고 싶지 않아 조용히 빠져나가려했다.

훅!

그런데 그가 몸을 움직이자마자 흉흉한 바람이 뒤쪽으로 날아들었다.

검은 짐승의 발톱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안색이 달라져 번개처럼 앞으로 피한 한립이 동시에 팔을 휘저었다.

푸른 검빛이 소매를 빠져나와 검은 짐승의 발톱을 갈랐다.

펑!

푸른 검빛이 깨지면서 비검으로 돌아가 빙글빙글 튕겨나갔고 검은 짐승의 발톱도 기다란 흉터가 생겨 거의 두 동강이 날 뻔했다.

어둠 속에서 숨어 있던 검은 원숭이 괴물이 한립을 향해 포효했다.

동족보다 배는 큰 괴물은 검은 털에 핏빛 문양이 들어가 있었고 손에 법칙파동을 발산하는 검은 깃발까지 들고 있었다.

‘선기!’

괴물의 포효소리에 음산한 흉살기가 흘러들어 상처 난 발톱을 치유했다.

그걸 보고 흠칫 놀란 한립은 일단 청죽봉운검을 불러들여 지면으로 내려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봉경원 등도 그를 발견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분노한 혈문(血紋) 원숭이가 검은 그림자로 변해 달려들었다.

냉소를 흘린 한립은 소매 속에서 굵직한 벽사신뢰를 뿜었다.

금빛 뇌전이 닿는 곳마다 흉살기가 거품처럼 사라졌으나 혈문 원숭이는 겁없이 입에서 검은 화염을 분출했다.

쿠아앙!

뇌전과 화염이 충돌해 마치 황금룡과 흑룡이 엉켜 싸우는 듯 서로를 공격했다.

빠르게 승부가 나지 않자 한립이 눈썹을 꿈틀했다.

또 다른 푸른 비검이 날아가 금빛 뇌전을 휘감고 엉켜 있는 뇌전과 화염을 관통했다.

펑!

검은 화염이 폭발해 불꽃으로 갈라진 뒤 푸른 비검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혈문 원숭이를 베었다.

크앙!

날카롭게 울부짖은 혈문 원숭이가 광채를 터트린 깃발로 거대 손처럼 푸른 비검을 휘감았다.

그걸 본 한립이 코웃음을 치면서 검결을 맺었다.

부들부들 떤 푸른 비검에서 굵직한 금빛 뇌전이 빠져나와 검은 깃발을 찢고 그대로 혈문 원숭이에게 날아갔다.

드디어 겁에 질린 원숭이 괴물이 전신의 핏빛 문양에서 빛을 발했다.

푸확!

등 뒤로 갑자기 핏빛 날개가 펼쳐지고 괴물이 흐릿하게 잔영을 남기며 이동했다.

수십 장 밖에서 나타난 원숭이 괴물은 어깨가 검에 길게 베어서 왼쪽 팔이 너덜너덜 했으나 피는 흘리지 않았다.

검은 원숭이 괴물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짐승이 아닌 것 같았다.

한립은 이상하다는 기색도 없이 푸른 비검을 불러들였다.

푸른 빛이 세 자루의 검으로 갈라져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격노한 혈문 거원은 더는 직접 달려들지 않고 멀리서 검은 화염을 끊임없이 뿜었다.

화염이 퍼지는 속도가 엄청나서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콰르릉!

그걸 본 한립이 어깨를 털어 온몸에서 수많은 금색 뇌전을 일으켜 검은 화염과 충돌하게 했다.

쿠르르르.

쌍방의 위력이 엇비슷한지 대치상태가 이어지고 주변의 돌기둥이 박살나 대전이 흔들거렸다.

그래도 워낙 견고하게 지어진데다 내부의 금제가 남아 있어 무너지지는 않았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금빛 뇌전을 남기고 사라졌다.

혈문 거원도 멍청하지는 않은지 핏빛 날개를 털어 달아나려 했다.

이때,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괴물의 뇌리에 울리고 날카로운 의식의 힘이 의식세계를 찔러들어갔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외마디 비명을 지른 괴물이 움찔한 사이 오른 팔에 금색 자물쇠가 떠올라 찰칵! 하고 잠겼다.

금색 자물쇠에서 금빛이 흘러나와 ‘쇄(鎖)’를 이루고 괴물의 몸에 낙인 찍히듯 박혔다.

팟.

얼어붙은 듯 몸이 뻣뻣하게 변한 혈문 원숭이 뒤로 번득 금색 뇌전빛이 반짝였다.

한립은 백옥 같은 두 손가락을 펼쳐 가볍게 괴물의 뒤통수를 찍었다.

화아앗!

눈을 찌를 듯한 수정빛 속에서 은은하게 은색 꽃송이 허상이 떠올라 괴물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혈문 거원은 머리가 갈기갈기 찢기고도 움직임이 없었다.

한립이 손가락을 거두고 몸에 박힌 ‘쇄’ 글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금색 자물쇠가 풀리면서 거원의 시체가 검은 기운으로 흩어졌다.

진득한 검은 흉살기로 흘러든 기운 속에 주먹 크기의 새까만 수정돌이 떨어지고 있어 한립이 푸른 빛을 보내 끌어왔다.

“알고 보니 지혼요(地魂妖)였군…….”

귀물의 일종인 지혼요는 시체의 흉살기가 짙은 곳에서 탄생했다.

은신술에 능하고 지능도 높아 상대하기 골치 아픈 귀물 중 하나였다.

“살기결정(煞氣結晶)! 한 수사, 제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니 제게 주십시오.”

마광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울렸다.

흉살기가 그득한 수정돌을 살피던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원하는 대로 화지 공간에 넣어 주었다.

혈문 거원이 살해당하자 나머지 검은 원숭이 괴물들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

봉경원 등도 귀물을 막지 않고 선기를 거둬 들인 다음 시선을 교환했다.

“지혼귀왕을 죽여 나머지 귀물까지 쫓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사.”

우람한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공수를 했고 봉원경과 자포(紫袍) 여인도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세 분의 실력에 제가 나서지 않았어도 금방 해결하실 수 있었을 겁니다.”

잔잔히 미소를 지은 한립이 겸손히 답했다.

셋 다 비술로 수행을 감추고 있었으나 그의 강대한 의식을 속일 순 없었다.

적어도 금선 후기 이상의 수사들이었다.

“허허, 그래도 도움을 받았으니 인사는 해야겠지요.”

한립은 허허 웃는 우람한 사내와 봉경원보다 자포 여인이 더 신경쓰였다.

마족이 진언문 유적에 나타나다니 석천공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우리 네 사람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데, 함께 돌아다니는 것이 어떠십니까? 앞으로 어떤 위험한 존재가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우람한 사내는 말솜씨가 좋고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는 성정 같았다.

“좋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괴이한 곳을 다니려면 일행이 있는 것이 확실히 낫지요.”

한립이 흔쾌히 대답하자 청년과 여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셋 다 실력이 상당했으나 조심만 하면 그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어서 한립은 동행을 하며 상대의 내력을 파악할 작정이었다.

“허허, 잘 되었습니다. 저부터 소개를 하지요, 저는 임호라 합니다.”

“저는 려강류입니다.”

한립은 호삼이 그를 위해 준비해준 천사종 신분 영패에 쓰인 이름을 댔다.

“원봉입니다.”

봉경원은 자신의 이름을 뒤집어 답했다.

“풍림입니다.”

빙긋 웃은 자포 여인도 거리낌 없이 이름을 밝혔다.

이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와 관계없이 통성명까지 하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임호의 주도로 나머지 세 사람이 민감한 주제를 피해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세 분은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저는 막 도착했는데 무슨 황궁처럼 건물들이 많아 어디가 어디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군요.”

임호가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세 분보다 더 늦게 도착한 것 같군요.”

한립이 고개를 젓고 봉경원과 풍림도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뭐 그럼 앞으로 계속 가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들 기관이나 금제를 건드리지 않게만 조심해 주세요.”

임호의 당부에 다른 이들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고 출발했다.

네 사람은 가끔 한담을 나누면서도 서로서로 거리를 두었다.

가장 마지막에서 걸으며 주변을 살피던 한립은 천정, 마족 등의 세력이 나타난 마당에 호삼과 열화선존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호삼 등이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몰랐다면 모를까 그에게만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거라면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한립은 임무를 받은 것이 조금 후회가 되었으나 돌이킬 길은 없었다.

몇 개의 궁전을 더 지나자 시야가 확 트이면서 산비탈 같은 곳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닥에 넓은 백옥 길이 위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립은 시간법칙 파동이 백옥길 쪽에서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을 감지했다.

이 정도 기운이면 다들 눈치 챘을 거라 생각해서 어떻게 보물을 나눌까 상의를 하려다 한립이 세 사람의 표정을 살피고 움찔했다.

눈빛 깊은 곳에 열망은 가득했지만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아서였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한립은 머리를 굴렸다.

‘저들은 시간법칙 파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구나.’

일부러 연기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앞쪽에도 건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간 궁전을 지나쳐 오기만 했는데 계속 가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서 나머지 궁전부터 수색할까요?”

우람한 거한 임호가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한립 등 세 사람은 말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안 들어도 알겠습니다. 하하, 그럼 계속하시지요.”

다시 성큼 걸어간 그들은 금방 산꼭대기의 광장에 도착했다.

백옥 벽돌을 깔은 광장 가운데에는 또 커다란 검푸른 석상이 놓여 있었다. 바로 머리 큰 동자 상 이었다.

네 사람은 부서지지는 않았으나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석상을 힐끗 보고 광장의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백옥이 깔린 다섯 갈래의 길이 구불구불 안개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각각의 길마다 사람 키만 한 남색 옥패가 세워져 있고 제자평(弟子坪), 삼수탑(三水塔), 오령각(五靈閣), 승천전(承天殿), 천약곡(天藥谷)이라는 지명까지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네 사람은 각양각색의 표정을 했다.

이름으로 볼 때, 제자평과 천약곡은 진언문 수연궁의 제자들이 거주하는 동부와 영초와 영약을 보관하는 곳이 분명했다.

다만 삼수탑과 오령각 그리고 승천전은 그 구체적인 용도를 추측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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