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23화 (1,580/2,000)

1823화. 사성(死城)

*

펑!

구슬이 터져 자욱하게 보라색 마기 구름을 이루고 힘차게 허공으로 파고들었는데, 마운(魔雲) 속 주술문자들은 남아 회전하면서 은색 진법을 이루었다.

그 진법 중앙이 길게 갈라지면서 흑자색 공간통로가 형성되었고 언제라도 허물어 질 듯 불안하게 번득였다.

휘휘휙!

그 안에서 보라색 장포를 걸친 마기를 풀풀 날리는 마족 세 명이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나온 새까만 피부에 머리숱이 별로 없는 마른 노인은 해골에 가죽만 덮어 놓은 모습이었다.

두 팔은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앙상해서 그 위에 구불구불 보라색 주술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음으로 나타난 보라색 머리카락의 청년은 얼굴은 잘생겼지만 복장이 너무 화려했다.

머리카락은 너무 길에 거의 땅에 끌릴 법할 머리를 높게 묶고 보라색 장포 아래에 휘황찬란하게 붉은 색 깃털 옷과 보석이 가득 박힌 오색 신을 신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수컷 공작새 같았다.

그 옆으로 보라색 장포를 입은 머리숱이 풍성하고 자태가 우아한 여인은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이 나오고 공간통로가 바로 흩어져버렸다.

“공간통로가 너무 빨리 붕괴되었습니다. 흑토선역의 공간과 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 듯 한데, 소주께서 통로를 열어주시지 않았으면 만 년이 걸려도 찾지 못할 곳입니다.”

마른 노인이 잠시 뒤를 돌아보다 앞쪽의 하얀 소용돌이를 살폈다.

“저게 입구겠지요. 소주 일행이 금제를 파훼했나 봅니다. 들어가시죠.”

“안 될 말입니다. 소주께서 우리에게 반 각의 시간을 두고 이동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장 들어가려는 자발(紫髮) 청년을 마른 노인이 막았다.

“제가 마음이 너무 급했나 봅니다.”

청년은 그의 앞을 막아서 노인의 손끝에 보라색 수정실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해 웃음을 흘리며 해명했다.

작게 코웃음을 친 노인이 손을 내렸다.

* * *

소용돌이 통로로 들어간 한립은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하얀 빛의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엄청난 소음이 귀청을 때리는 통에 한립은 안색이 달라졌다.

하얀 빛의 흐름은 영환계에서 선계로 올 때 겪은 공간난류와 비슷했고 이곳의 공간의 힘이 10 배는 강한데다 시간법칙의 힘도 느껴졌다.

수행이 선계로 넘어 올 때보다 훨씬 강해진 한립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하얀빛의 흐름에 휩쓸려 앞으로 흘러갔다.

거대한 힘이 밀려드는 가운데, 한립은 수결을 맺고 별빛 수정막을 둘러 몸을 보호했다.

도처를 살폈지만 호삼과 열화선존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그가 무언가를 하려던 그때, 전방에 거대한 빛덩이가 나타나 그를 집어 삼켰다.

눈앞이 하얗게 변한 한립은 두 눈에 극통을 느끼고 눈을 꼭 감았다.

펑!

무언가에 부딪친 한립은 주변의 공간난류가 사라진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다행이 빛의 흐름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바닥에 깊게 파인 구멍에서 날아오른 그는 평평한 지형이 하얀 안개로 덮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가 진언문 유적 내부인건가…….”

기대하던 것과 풍경이 다르기는 했으나 그는 의식을 퍼트려 보았다.

주변에서 기이한 공간의 힘이 그의 의식을 억눌러 3, 4 백 장 밖에는 살필 수가 없었다.

구유마동을 발동해 눈에 보랏빛을 일렁인 그는 영목신통도 하얀 안개에는 통하지 않음을 알고 흠칫 놀랐다.

위험한 비경에 들어가본 경험이 많은 한립은 일단 지면으론 내려와 은색 진법이 그려진 보라색 옥판을 들었다.

석천공이 환연습지로 들어서기 전에 내준 전신법기였다.

마역 고유의 비술로 제련하여 공간의 힘을 품고 있었기에 공간장벽을 넘어서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웅.

수결을 맺은 그가 법결을 던져 넣고 기다려도 옥판은 반응이 없었다. 이 방법마저 통하지 않으면 호삼 등과 연락을 주고받기 어려운데, 그럼 윤회전 임무를 완수할 길이 요원했다.

정확히 임무가 무엇인지 물어도 호삼이 싱글벙글 웃으며 도착하면 말해준다고 일관해서 놔두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지.”

일단 출발을 하려던 한립이 손을 저어 호리병박을 불러냈다.

호리병박이 뱉어낸 금색 깃발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깃발이 발산하는 강렬한 시간법칙파동은 경양상인이 내어준 자물쇠보다 강했다.

“역시 품계가 있는 선기였어!”

한립은 기쁜 마음으로 금빛을 방출해 깃발을 삼키고 연화를 시작했다.

낯선 곳에 홀로 떨어졌으니 최대한 전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했다.

호리병박을 거둔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방향을 정해 날아올랐다.

“한 수사, 이미 진언문 유적에 진입하셨습니까? 마량의 곁에 있을 때 진언문의 위명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혼자 계시면 저도 내보내 주시지요.”

돌연 마광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울렸다.

“폐관수련은 마치신 겁니까?”

“오랫동안 노력한 끝에 드디어 육신과 안정적으로 결합했습니다. 하하, 앞으로는 태을경 경지에서 떨어질 일이 없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축하드립니다.”

눈썹을 꿈틀한 한립이 축하 인사를 했다.

“허허, 태을경 경지는 제가 수사보다 한 발 앞서 들어서겠습니다.”

마광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한립은 그의 자랑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법칙을 장악한 그는 막 태을경 초기에 이른 마광이 중기의 경지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상대해줄 자신이 있었다.

“물론 한 수사의 놀라운 자질에 태을경에 이르는 것은 시간문제 일 겁니다.”

“지금은 수행을 안정시킬 때이니 한 동안은 그냥 화지 공간 안에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진언문 유적은 기괴했고 마광의 회선 신분은 누군가에게 함부로 노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한숨을 내쉰 마광이 이 말을 남기고 조용해졌다.

시간이 흘러 한립은 피로감을 느꼈다.

의식이나 구유마동 신통을 펼치기 너무 안 좋은 환경이라 금방 몸에 무리가 왔다.

막 단약을 꺼내 삼키던 그가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 땅 속에 묻힌 무언가를 보았다.

휘잉!

그가 소매를 펄럭이자 돌풍이 흙먼지를 날려 은은한 남색 담벼락 잔해가 노출되었다.

무슨 석재로 만들었는지 모를 담벼락 잔해는 얼마나 오랫동안 묻혀 있었는지 상당히 풍화가 진행되어 있었다.

한립은 반가운 얼굴로 그걸 보다가 앞으로 나아갔다.

가면 갈수록 황량한 평원이 아닌 이런저런 잔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거대한 궁전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은은한 남색 재료로 건설된 궁전은 예전에는 웅장했겠으나 지금은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벽이 허물어져 격렬한 전투를 겪은 듯 했다.

침음하던 한립이 의식을 퍼트렸다.

……

한참 뒤 눈썹을 꿈틀한 그가 어느 바위 옆에 내려서 손으로 바위를 밀어냈다.

바위에 깔려 있던 이미 백골이 된 시체가 보였다.

하얀 장포를 입은 시체는 분명 시공간 초월 때 보았던 진언문 제자 복색을 하고 있었다.

한립은 엉망이 된 유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언문 공법을 수련해서 그런지 종문에 정이 생긴 듯 했다.

가라앉은 마음을 거둔 한립은 시체에 저물법기가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수색을 진행했다.

몇 구의 진언문 제자 시체를 발견했으나 누군가 가져갔는지 저물법기들은 없었고, 궁전 폐허 내부를 샅샅이 뒤져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날아오른 한립은 두 눈에 보랏빛을 형형히 빛내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쉭!

그의 손짓에 굵직한 푸른 검기가 허공을 가르고 격렬한 검은 파동과 함께 사라졌다.

마치 검은 파동이 검기를 잡아먹은 것 같았다.

“공간균열?”

호선(弧線) 모양의 검은 파동은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의식을 전력으로 개방하고 구유마동까지 펼치지 않았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을 굳힌 그가 금색 뇌전을 던져 넣어 보았다.

검은 호선이 그것마저 집어 삼키자 그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어렸다.

쉬익!

마지막으로 붉은 빛을 품은 거검이 검은 호선으로 달려들었다.

거검은 호선에 닿자마자 챙강 하고 두 조각으로 부러졌다.

미리 검은 호선을 발견해서 다행이지 맨몸으로 뛰어들었으면 죽지는 않았어도 중상을 면할 수 없었을 터였다.

부러진 검을 회수한 한립은 더욱 조심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 * *

반나절 후, 한립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져있었다.

진언문은 너무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나마 쓸 만 한 영초 몇 뿌리를 구한 것 외에는 살아 있는 동물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이 드넓은 공간이 싸늘하게 죽어 있는 것 같았다.

평원지대 곳곳에는 가끔 산봉우리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쉬지 않고 나아가던 한립이 커다란 산골짜기 형태의 지형에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는 궁전을 보고 급히 내려갔다.

위에서 보던 것은 그야 말로 빙산의 일각이어서 하얀 옥석이 깔린 바닥이 그의 시야 끝까지 쫙 펼쳐져 있고 크고 작은 건물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곳도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나 다른 곳보다 좋은 재료를 써서 건물을 지은 것인지 대부분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뜻 봐도 종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건물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한립은 골짜기 외부를 살피고 안쪽으로 향했다.

당시의 격렬한 전투를 대변하듯 진언문 제자들 외에 천정 수사들의 시체도 산재해 있었다.

골짜기 내부는 마치 거대한 성처럼 이리저리 골목이 나있었고 그 옆으로 상점이 존재해서 훼손되지 않은 곳에서는 몇 가지 쓸 만 한 재료도 찾을 수 있었다.

상가대로의 끝이 갑자기 확 트이면서 엄청난 규모의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엇!”

광장을 훑던 한립은 낮게 날아올라 맞은 편 거대 궁전 앞으로 갔다.

다른 궁전보다 크기가 크고 옅은 푸른 수정돌로 건설된 건물은 바닷 속 용궁처럼 은은하게 물빛을 퍼트렸다.

해람정(海藍晶)이라는 단단하기로 유명한 물 속성 수정으로 지은 궁전이었다.

진귀한 보물로 궁전을 짓다니 선원석을 쏟아 부어 놓은 것과 같았다.

하지만 궁전 깊은 곳에서 미약하게 신간법칙 파동을 느낀 한립은 안으로 들어가기 급급해 해람정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수연궁(水衍宮)…….”

대문의 편액이 남아 있어 궁전의 이름도 알 수 있었다.

막 대전의 문턱을 넘으려던 그는 엎어진 검푸른 석상에 시선을 빼앗겼다.

머리는 크고 몸이 가느다란 이상하게 생긴 아이 석상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눈에 익었다.

“아, 그때 그!”

수정벽을 통해 귀큰 승려 미라노조의 설법을 훔쳐 들을 때 주위에 앉아 있던 다섯 명 중 한 명이 석상과 똑같이 생겼다.

‘왜 그 사람의 석상이 이곳에? 수연궁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주위가 어둑해지면서 일종의 위압감 같은 게 느껴졌다.

드넓은 대전 안에는 거대한 해람정 기둥 말고는 다른 것이 없었고 전투의 흔적으로 기둥 하나가 잘려나가 있었다.

대전을 빠르게 훑어본 한립은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왼쪽과 오른쪽 벽에 거대한 문이 있고 그 뒤로 기다란 검은 통로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두 통로 앞에서 한립은 시간법칙의 위치를 감응해 보고 오른쪽이 더 가까울 것 같아 그곳으로 들어갔다.

검은 돌로 만들어진 통로에서 음산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통로 벽과 바닥에는 날카로운 병기에 의한 흔적이 가득했지만 단단하게 잘 버티고 있었고 수시로 진언문이나 천정 수사들의 시체를 만날 수 있었다.

휘이-

음산한 바람이 전방에서 불어오는 통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체내의 흉살기 때문에 고생하고 있어 이런 환경을 꺼렸으나 그렇다고 뒤돌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