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화. 먼저
*
“치융 대인께 아룁니다. 은호가 흑산선역에 나타나 잡으려다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왕 사형은 부상도 입었고요.”
공수천은 고개를 들지 않고 이종족 사내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은호는 잡았고?”
“그게……. 어느 마족의 도움을 받아 달아났…….”
공수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치융이 ‘못난 것들’이라며 말을 끊었다.
공수천 등은 고개를 숙인 채 노기를 드러냈다가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시간도 늦었고, 진언문 유적이 출현하는 시간에 제약이 있으니 일을 마치면 이 일에 대해 죄를 묻겠다. 출발!”
“예!”
치융은 화염으로 화룡(火龍) 모양의 배를 만들어 모두를 태우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고 향 하나가 탔을 무렵 다른 둔광들이 화연성 쪽에서 도착했다.
사내 셋과 여인 하나였다.
평범한 사람보다 머리하나는 큰 중년인은 고동색 피부에 금색 갑옷을 걸치고 자금색 무늬의 삿갓을 쓰고 있었다.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는 취곤성을 지키던 소류였다.
“흥, 저런 자들까지 우리 머리 위에서 놀려 하다니…….”
소류는 불쾌한 기색이었다.
“같은 천정 소속이지만 서로의 일에 함부로 관여하지 않았잖습니까? 우리에게 언질도 없이 저리 헤집고 돌아다니다니 안하무인이 따로 없습니다. 허나 걱정할 것은 없지요. 우리 사맹선구가 손을 잡았는데 남들에게 보물을 빼앗기기야 하겠습니까.”
하얀 유생 복장의 사내가 부채를 부치며 말했다.
“조진 수사의 말이 맞습니다. 환연습지는 우리 앞마당이나 마찬 가지인데 저들이 날뛰어 봤자지요.”
보라색 궁장 차림에 미간에 붉은 반점이 있는 매혹적인 여인도 입을 열었다.
그녀는 환연성 성주이자 흑토선궁 궁주의 반려로 수행은 높지는 않았으나 사맹선구에서 지위는 상당했다.
그녀가 조진이라고 부른 유생 사내는 복택선역 택연성(澤淵城)의 감찰선사였다.
체구가 작고 목이 굽은 대머리 노인은 그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있었다.
“육 선배님, 이전에도 각자 진언문 유적을 찾으려다 실패했었습니다. 이번에 손을 잡기로 한 김에 확실히 해두지요. 정말 고안접점을 찾을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조진이 부채를 접고 키 작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원경선궁(元競仙宮)의 궁주인 육오량이었다.
“걱정 말게. 확신이 있으니 자네들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니까.”
노인은 탁한 목소리로 답했다.
“육 궁주만 믿겠습니다.”
요염한 여인이 곱게 미소 지었고 그들도 곧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 * *
그 시각 백만 리 밖의 습지 위.
미진환연이 짙은 허공에 거대한 돌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 위를 남색 삿갓을 쓴 남녀 수사들이 천천히 오르는데 가장 앞에서 걷은 청록색 모발의 여인은 사람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흘러넘쳤다.
옅은 남색 피부에 비늘 갑옷을 입은 여인 뒤로 체구가 크고 문짝만한 거검을 등에 진 험상궂은 사내와 누렇게 뜬 얼굴에 폐병이라도 걸린 듯 입술이 갈라지고 터진 마른 노인이 뒤따랐다.
거구 사내는 앞을 주시하면서도 긴장된 얼굴이었으나 병색이 짙은 노인은 음흉한 시선으로 남색 피부 여인을 훑었다.
돌연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훽 돌렸다.
아름다운 얼굴의 금색 눈동자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죽고 싶지 않으면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요?”
노인은 여인이 눈에서 번득이는 기이한 광채에 혼백이 빨려 들어갈 듯한 기분을 느끼며 뻣뻣하게 굳었다.
“조, 존명! 벽사 선자,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벽사 선자, 역포회는 평소 두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어째서 세 명이 함께 하는 것인지요?”
거구 사내의 물음에 여인의 얼굴이 풀어졌다.
“저 늙은이가 공간진법을 펼치는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임무는 이 누이가 수사만 데리고 갔을 텐데요…….”
“농담 하지 마시지요, 선자.”
요염한 웃음을 흘리는 여인을 보고 사내는 더욱 긴장해 얼굴을 굳혔다.
남색 피부 여인은 흥미롭다는 듯 웃음이 짙어졌고 병색 짙은 노인은 씁쓸한 얼굴이었다.
* * *
진언문 유적의 산문 바깥에서는 한립 등이 작은 은색 수정돌들과 깃발 원반 같은 것들을 바닥에 깔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석천공은 바닥에 커다란 은색 진법을 그려가면서 다른 이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네 사람이 힘을 합치자 오래지 않아 복잡하고 화려한 은색 진법이 완성되었다.
“옆으로 물러나 있으세요.”
석천공은 다른 이들을 물리고 수결을 맺었다.
웅웅!
천지원기가 밀려들고 강렬한 공간파동이 느껴졌다.
서서히 떠올라 은색 주술문자들이 이룬 구름 속으로 들어간 석천공은 신선 같아 보였다.
중얼중얼 주문을 읊던 그가 은색 달이 그려진 영패를 꺼내 들었다.
공(空)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영패에서도 공간법칙 파동이 느껴졌다.
그의 손을 떠난 영패가 화려한 빛을 터트리며 커지자 법칙파동도 강해졌다.
지켜보는 이들이 놀라는 사이 석천공은 술법을 이어갔다.
은색 초승달 모양의 빛의 장막이 영패를 빠져나가 하얀 빛의 장막과 충돌했다.
콰앙!
빛의 장막 표면에서도 은색 수정빛과 함께 강렬한 공간파동이 흘러나왔다가 평정을 되찾았다.
과연 공간금제에 석천공의 공격이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어서 공격을 해서 무너트리지 않으면 다시 원상복구될 겁니다!”
몇 번 더 영패로 금제에 공격을 가해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석천공이 소리쳤다.
기다리고 있던 한립 등 세 사람도 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열화선존은 시간법칙의 힘이 담긴 금색 고대 거울을 꺼냈다.
주문을 외운 그의 손에서 금빛이 거울로 흘러들어 커다랗게 변한 보물이 방대한 법칙파동을 방출했다.
하얀 보호막이 격렬하게 떨리면서 표면에 잔잔하게 금빛을 번득였다.
거의 동시에 호삼의 주문 소리가 들리고 다섯 명의 호삼이 나타나 손에서 핏빛을 터트렸다.
다섯 호삼 인영들이 입에서 뿜은 정혈을 흡수한 핏빛은 거대한 도끼로 변해서 핏빛 뇌전을 번득였다.
쿠앙!
핏빛 도끼 다섯 깨가 하얀 빛의 장막을 찍기 시작했다.
한립은 아홉 자루의 청죽봉운검을 불러내 입에서 푸른 빛을 뿜어 흡수시켰다.
몸집을 부풀린 푸른 거검들이 굵직한 금빛 뇌전에 휩싸여 날아갔다.
석천공도 심호흡을 하고 검은 고리 형태의 선기를 꺼내 공격을 가했다.
쿠쿠쿠쿵!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고 하얀 빛의 장막이 빠르게 얇아져 갔다.
다만 그 안의 수많은 하얀 수정실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그들의 공격을 모두 막고 금빛과 은빛이 퍼지면서 빛의 장막이 회복될 조짐이 보였다.
“이러다 안 되겠습니다!”
석천공은 손가락 크기의 보라색 단약을 꺼내 머뭇거리다 삼키고 전신에 보랏빛이 돌더니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검은 고리 선기를 불러들인 그가 다른 주문을 외워 등 뒤로 여섯 개의 병기를 든 삼두육비 보라색 법상을 불러냈다.
수결을 맺은 그가 하늘을 가리키자 보랏빛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콰릉!
머리 위 하늘에 광풍이 불고 어둑한 보라색 구멍이 뚫려 마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흑자색 마기를 불러 모은 석천공은 동색의 거대한 주술문자들을 응결해 법상 허상이 들고 있는 병장기 속으로 흘려보냈다.
용 두 마리가 양쪽에서 활시위를 물고 있는 듯한 거대한 궁이 흉포한 기운을 드러내고 보라색 법상의 또 다른 팔이 거대한 화살 허상을 만들어 걸었다.
다른 쪽에서 호삼의 다섯 허상도 한 곳으로 뭉쳐 거목 크기의 거인으로 변한 은색 여우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광채를 핏빛 도끼 속으로 불어넣고 있었다.
화르륵!
핏빛 불길이 붙은 도끼가 허공을 녹이고 있었다.
열화선존도 금색 거울에 손을 대고 신중하고 주문을 외웠다.
대량의 적홍색 화염이 분출되어 화염 관과 지팡이를 만들어 화염 제왕 같아 보였다.
그가 지팡이를 들어올리자 가느다랗게 응축된 화염 한 줄기가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호리병박을 불러냈다.
“가라.”
빠르게 크기를 키운 호리병 박 안에서 은은하게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바르르 떨린 호리병박 안에서 금빛 그림자가 튀어나갔는데 희미하게 푸른 칼날 같은 것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쿠콰콰콰쾅!
보랏빛, 핏빛, 붉은빛, 푸른빛이 각각 거대한 태양을 이루었다.
보라색과 푸른색이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인근의 천지영기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면서 하얀 빛의 장막에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격렬하게 떨리던 빛의 장막이 드디어 갈라지기 시작했다.
휘휙!
하얀 빛의 장막이 조각조각나 대량의 하얀 안개 구름으로 바뀌었고 그 속에서 금색과 은색의 깃발이 날아왔다.
별 도안이 그려진 깃발은 각각 시간파동과 공간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눈을 번득인 한립이 호리병박을 가리켜 녹색 빛으로 금색 깃발을 감쌌다.
거의 동시에 보라색 거대손이 은색 깃발을 잡아챘다.
석천공의 보라색 법상 허상이었다.
내심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한립은 금색 깃발만을 호리병 속에 넣었다.
한립과 석천공의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호삼과 열화선존은 말릴 틈도 없었다.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은 애석하다는 얼굴이었다.
선가의 산문을 지키는 진법을 구성하는 선기는 상당한 가치를 지닌 보물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차피 유적 탐사를 할 때는 능력껏 보물을 챙기는 것이 원칙이라 원망을 하지는 않았다.
“축하합니다. 아직 제대로 유적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물을 얻으셨습니다.”
호삼은 수결을 맺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하, 이번에는 저와 려 형이 빨랐지만 안에 더 많은 보물이 있을 테니 호 형과 열화 형도 곧 좋은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석천공은 보라색 법상을 수축해 흡수하고 머리 위의 마기 구멍도 없애버렸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공간 내부에는 마기가 가득해서 그의 구유마동으로도 끝이 어딘지 찾을 수가 없었다.
“석 형과 려 형이 금제를 깨는데 가장 힘을 많이 쓰셨으니 보물을 가져가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열화선존도 붉은 기운을 거두고 축하를 했다.
“그런데 려 수사가 방금 사용한 것은 선천영보입니까? 위력이 대단합니다.”
호삼이 갑자기 한립을 돌아보았고 다른 이들도 귀를 기울였다.
“운이 좋아 얻게 된 것인데 쓸만 하더군요.”
한립은 애매하게 답했다.
그가 이번에 호리병박을 쓴 것은 우선 열화선존이 이미 그것의 존재를 알았고 둘째로 태을경 수사인 호삼과 석천공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보물의 기운을 미리 숨겨 두어 기운을 전부 드러내지는 않았다.
“운이 좋으신 분입니다. 려 수사와 함께 하면 우리도 그 덕을 좀 보겠어요.”
호삼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제가 운이 좋아봐야 수사만 하겠습니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산문의 하얀 안개구름이 소용돌이치면서 그 중앙에 좁은 통로를 형성했다.
“금제를 깨느라 시간을 꽤 허비 했으니 서둘러 들어갑시다.”
호삼이 먼저 은빛으로 변해 들어가고 열화선존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
한립이 막 출발하려다 움직일 생각이 없는 석천공을 보았다.
“석 형 어서 들어가시지요. 늦게 들어가면 두 사람이 보물을 다 가져갈 겁니다?”
“려 형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진법을 회수해 바로 따르겠습니다. 마족의 비전이 담긴 것이라 함부로 외부인에게 보이기 그렇습니다.”
석천공은 웃으면서 바닥의 은색 진법을 덮고 빠르게 깃발과 원반을 불러들였다.
“알겠습니다.”
한립이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뒷모습을 보는 석천공의 눈빛이 묘했다.
진법을 빠르게 해체한 그 역시 보랏빛으로 변해 통로로 뛰어들었다.
그가 통로로 들어서는 순간 쌀알 크기의 은색 주술문자가 새겨진 보라색 구슬이 그의 몸속에서 튀어나와 산문 밖에 공간파동을 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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