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화.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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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유부도 천 리 밖에서 은색 배가 분홍 안개 속으로 진입해 속도가 확 줄었다.
“과연 미진환연 안에서는 의식의 힘이 영향을 받아 멀리까지 살필 수 없군요. 방향을 분간하는 것도 어렵겠습니다.”
“그렇다면 안전을 위해 각자 한 방향을 맡아 주시하지요.”
호삼의 말에 석천공이 의견을 냈다.
한립은 자신의 강대한 의식도 안개 속에서 고작 수십 리 밖에는 퍼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괜찮습니다. 종문의 유적이 나타났다면 제가 감응할 수 있을 겁니다.”
열화선존이 이렇게 말하고 용 눈알 크기의 분홍색 구슬을 꺼내들었다.
평범한 진주처럼 생긴 구슬은 아주 미세한 금색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석천공이 구슬을 보았다.
“진언주(眞言珠)라고 스승님께서 주신 법보입니다. 종문 내의 전송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증표인데, 멸문을 당해 이제 이것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겁니다.”
“열화 수사의 말씀은 이 진언주가 유적을 찾는데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구슬은 종문 내의 3백여 개의 전송진과 연결되어 있어 인근에 전송진이 나타나면 감응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미진환연 때문에 감응 거리가 짧아 백 리 내로 다가가야 하겠지만요.”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온전한 전송진을 찾으면 바로 진언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어요.”
열화선존의 대답에 호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립의 눈길은 시야의 끝에 나타난 암홍색 처마로 옮겨져 있었다.
안개를 뚫고 곧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는 벽돌로 만들어진 3층 패루가 나타났다.
“저건 오량방(烏梁坊)……. 종문 내의 상인거리 밖 10 개의 문 중 하나입니다.”
열화선존이 얼룩덜룩하고 성한 곳이 없는 명패를 보고 입을 열었다.
“운이 좋습니다!”
호삼이 희색을 드러내고 배를 그쪽으로 돌렸다.
“잠깐, 저건 환영에 불과합니다.”
이때 한립이 언질을 주자 은색 배가 패루 백여 장 앞에서 멈추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고개를 돌려 눈동자 깊은 곳에서 보랏빛을 일렁이는 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설마 구유마동 아닙니까? 어찌 우리 마족의 영목 신통을 익히신 겁니까?”
석천공이 미간을 좁혔다.
“산수가 이런저런 공법들을 섞어 익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하하, 부끄러운 일입니다.”
한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고, 석천공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하하, 이번에 려 수사가 합류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호삼이 낭랑하게 웃고 장포를 털어 패루로 빛을 날렸다.
빛이 패루에 닿는 순간 은색 빛 덩어리가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해 무시무시한 공간의 힘을 발휘했다.
패루 환영이 왜곡되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주먹만 한 검은 구멍으로 변한 다음 주변 공간을 끌어들이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걸 본 호삼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려 수사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공간의 틈으로 빨려 들어갈 뻔 했습니다.”
석천공도 무서운 일이라는 듯 말했다.
그런데 이때, 느릿한 음률이 흐르고 사람을 현혹시키는 향기가 퍼지면서 안개 속에 궁전 건물이 나타났다.
그들이 탄 배도 습지가 아닌 꽃이 무성하게 자라고 곳곳에 정자가 있는 뜰 안에 위치했다.
정자는 서로 연결이 되어 그 사이를 지나는 다리 위에 궁장 차림을 한 아리따운 여인들이 과일과 옥병을 담아 오갔다.
정자 안에는 많은 선인들이 마주 앉아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호삼이 서둘러 배를 멈추었다.
“석 형, 신령환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환각이 이렇게 심해서야…….”
“호삼 수사, 환영이 너무 강한 것이지 석 수사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신령환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이 환영을 보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겁니다.”
한립이 석천공을 대신해 해명했다.
그는 신령환을 복용하지 않았기에 진작 연신술로 의식을 보호하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인사불성이 되었을 터였다.
“려 수사의 영목신통으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열화선존이 입을 열었다.
“위험을 알릴 수는 있어도 환영 자체를 파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석 수사께서 공간법칙의 힘을 사용해 주변의 미진환연을 밀어내면 환영 일부를 제거할 수 있을 지도요.”
“일 리가 없는 말은 아니지만 소모되는 힘이 상당하고 환영의 규모가 너무 커서 그렇게 뚫고 나가기란 불가능합니다.”
한립이 자신을 언급하자 석천공이 난색을 표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려 수사의 영목신통으로 위험한 곳만 피하면서 열화 수사는 진언주로 전송진을 감응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반응이 오면 석 형이 환영을 뚫어보는 것이지요. 저야 뭐, 모두를 위해 뱃사공 노릇이나 하겠습니다.”
호삼이 제안을 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다들 찬성을 하여 배가 다시 천천히 출발을 했다.
저기 덤불 뒤로는 전진하면 안 되고 왼쪽으로 꺾어야 합니다.
두 눈에서 보랏빛을 반짝인 한립이 손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그럼 저 다리와 충돌을 할 텐데요.”
“저를 믿으세요.”
호삼이 더는 아무 말 없이 배를 왼쪽으로 틀어 다리와 충돌하게 했다.
백옥으로 만들어진 난간이 종이처럼 찢어지고 배가 오가는 여인들을 관통해 지나갔다.
“저쪽에서는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다 한립이 다른 곳을 가리켰다.
반 시진정도 지나 배가 어느 연못을 지나는데 열화선존이 눈을 번쩍 떴다.
“찾았습니다!”
다들 서둘러 열화선존이 들고 있는 진언주를 보았다.
보광을 반짝이는 구슬 표면의 문양들이 금빛을 머금고 있었다.
“전송진입니까?”
배를 멈춘 호삼이 즐겁게 물었고 열화선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 수사, 이제 수사의 능력을 보여줄 때인 듯합니다.”
한립은 석천공을 바라보았다.
석천공은 대답 없이 눈을 감고 두 손을 합장해 찬란한 은빛을 퍼트렸다.
강렬한 공간파동이 퍼지면서 그가 양손을 펼쳐 문을 여는 자세를 취하자 은색 빛의 장막이 넓게 퍼져 미진환연을 겹겹이 뒤로 밀어냈다.
은색 보호막이 펼쳐진 천여 장 가량의 공간에 다시 습지가 나타나자 한립은 두 눈에서 강력한 보랏빛을 뿜어 전방 어딘가에 하얀 돌들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깁니다.”
그의 인도에 호삼이 배를 움직였다.
몇 사람이 누우면 꽉 찰 작은 공간에 돌기둥들이 부서진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런……. 전송진의 일부인 돌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는 사용할 수가 없겠어요.”
열화선존이 탄식했다.
“괜찮습니다. 진언문 유적을 찾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겠습니까.”
호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일행은 다시 안개를 뚫고 나아갔다.
……
습지 곳곳을 뒤진 그들은 무너진 벽이나 기둥 혹은 몇몇 전송진을 발견했지만 손상 정도가 너무 심해 사용할 수가 없었다.
“려 수사, 유부도에서 너무 멀어진 것 같은데 방향을 바꿔보는 것이 어떨지요?”
호삼이 배를 조종하며 물었다.
“좋습니다. 환연성 방향 쪽으로 가보는 것도…….”
한립이 알겠다고 하는데 열화선존이 말을 막았다.
“잠깐, 근처에 전송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의 말에 다들 큰 기대 없이 배를 멈추고 안개를 밀어냈는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습지 안 너른 모래섬 위에 하얀 돌기둥 일곱 개가 우뚝 솟아 있었다.
서둘러 배를 하얀 모래섬 위로 이동한 그들은 드디어 전송진을 볼 수 있었다.
총 열한 개의 돌기둥 중 일곱 개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무너진 상태였다.
“산문 밖 8 대 전송진 중 하나인데 손상 정도가 심해서 이것도 못 쓰겠습니다.”
기대를 품었던 열화선존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한립은 찬찬히 돌기둥들을 돌아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석 수사, 공간법칙의 힘을 지닌 물건이 있으십니까?”
잠시 후 몸을 돌린 그가 석천공에게 물었다.
“공간의 물건으로 돌기둥을 대신해 진법을 복구하려는 생각이시군요. 아마 소용없을 겁니다.”
“되고 안 되고는 해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석천공의 조심스런 말에 한립이 씩 웃어 보였다.
“석 형, 석사자(石獅子) 한 쌍이 있지 않습니까? 인색하게 굴지 말고 꺼내 주세요. 망가지면 제가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호삼이 석천공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확실히 복구할 수 있는 겁니까?”
석천공은 호삼이 그러든 말든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성공확률 3 할입니다.”
“요즘 승률이 좋지 않아서…….”
망설이던 석천공은 결국에는 손바닥을 뒤집어 팔뚝 만 한 회백색 석사자 한 쌍을 바닥에 불러놓았다.
웃으며 그것들을 끌어온 한립이 전송진 위에 놓고 여러 진법 원반과 깃발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 * *
몇 시진 뒤.
“되었습니다.”
“겨우 이렇게 말입니까?”
호삼이 의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공간의 물건으로 돌기둥을 대신해 그 안에 함유된 공간의 힘으로 진법을 운용하기는 하지만 진법원반과 깃발이 견고하지 않아 잠시 동안 발동한 뒤 망가질 겁니다.”
“우리를 전송하기에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습니다.”
열화선존도 걱정스러워했다.
“원래 수백 명을 전송할 수 있게 설계된 전송진이라 우리 몇을 전송하는 것쯤은 괜찮을 겁니다. 출항할 준비를 마쳤으니 순풍이 불기를 바랄 뿐이지요.”
“더 필요한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선원석은 아무래도 중품 이상의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호삼을 향해 한립은 전송진에 뚫린 구멍 몇 개를 가리켰다.
“려 수사, 겨우 선원석 몇 개를 가지고 그러십니까?”
“저 같은 산수들은 가진 것이 얼마 없어서요.”
한립이 미소를 짓자 호삼과 석천공도 시선을 마주치고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절대 한립이 평범한 산수라 여기지 않았다.
결국 다들 전송진 중앙에 모인 뒤, 호삼이 중품 선원석 몇 개를 전송진 빈자리에 박아 넣었다.
후우웅.
한립이 수결을 맺자 강렬한 빛이 일어 그들을 집어 삼켰다.
그들이 사라지고 전송진은 어둑해 졌으나 석사자 두 개는 멀쩡했고 나머지 진법 깃발과 원반들도 대부분 남아 있었다.
* * *
잠시 후 한립 일행은 거대한 산문 앞에 나타났다.
웅장한 산문은 거대한 백석 광장까지 연결되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는데 도처가 안개로 가로막혀 공간장벽으로 둘러싸인 듯 했다.
그 앞에 선 열화선존은 감회가 새로운 얼굴이었다.
쿵!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열화선존이 고개를 돌렸다.
석천공이 하얀 금제를 공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신통을 펼쳐도 빛의 장막은 바르르 떨리기만 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호삼이 나서서 몸을 백배로 키우고 다섯 손가락으로 허공을 할퀴었다.
거대 손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하얀 빛의 장막을 갈랐다.
촤르르륵.
오색 뇌전빛이 튀고 허공이 웅웅 울렸으나 여전히 빛의 장막은 그대로였다.
“힘 빼지 맙시다. 공간법칙의 힘과 약간의 시간법칙의 힘이 혼재된 금제라 이렇게는 못 뚫습니다.”
실험을 마친 석천공이 손을 저었다.
한립도 마찬가지 결론을 낸 상태였다.
“석 형,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공격이 실패한 호삼이 몸을 돌렸다.
“공간의 힘을 겨냥해 제가 진법을 펼쳐 금제를 약화시켜 보겠습니다. 그 후에 모두 힘을 합쳐 공격을 가하면 파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두릅시다.”
* * *
그 시각 환연성 수백 리 밖 환연습지 변두리에는 철탑 같은 거구의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붉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습지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아주 위풍당당했다.
인족과 비슷하게 생긴 사내는 코가 코뿔소의 뿔처럼 검푸르고 단단했으며 기다란 귀에 커다란 금색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습지에 만연한 안개를 보는 사내의 얼굴에 은은하게 분노가 어려 있었다.
멀리서 남색 빛이 날아들었다. 갑자기 붉은 영역에 둘러싸인 남색 빛은 끌려오듯 이종족 사내 앞으로 이동했다.
쿵!
남색 벽옥비차가 바닥에 떨어지고 붉은 머리 거한과 대나무처럼 마른 사내 그리고 붉은 옷을 걸친 준수하게 생긴 사내가 동시에 내려 민망한 기색으로 예를 올렸다.
“치융 대인을 뵙습니다.”
세 사람은 공수천, 그의 사형 왕효삼 그리고 그의 직전제자 봉경원이었다.
“어찌 내가 말한 시일 보다 보름을 늦은 것이냐?”
이종족 사내가 싸늘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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