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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20화 (1,577/2,000)

1820화. 등장

*

그렇게 시작된 선박에서의 생활이 30년간 계속되었다.

이날, 호삼이 오랫동안 폐관 수련 중인 한립의 객실 문을 두드렸다.

“려 수사, 수련하느라 임무를 잊은 건 아니겠지요? 이제 곧 연파성(烟波城)이라 내려야 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호삼은 한립을 아래위로 살피면서 웃음 지었다.

“제가 임무를 잊고 싶어도 호삼 수사께서 그렇게 두실 것 같지 않은데요? 하하, 먼저 가시면 저도 짐을 정리해서 곧 갑판으로 가겠습니다.”

한립이 가볍게 대꾸하자 호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반각 후, 한립 일행은 선박에서 내려 연파성 바깥 관도를 따라 성 쪽으로 걸어갔다.

“호삼, 환연성에서 내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석천공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그건 석 형이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들 미진환연(迷塵幻烟)이 진언문 유적이 나타날 징조라는 것은 알지만, 정확히 미진환연이 어디서 나타날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미진환연이 연파성 인근에 나타났단 소립니까?”

“연파성, 환연성, 풍회성(風悔城) 그리고 유연성(流烟城)이 모두 환연습지 인근이지만 여러 번 미진환연이 나타난 위치를 관찰한 결과 연파성 주변일 때가 많았습니다. 하하, 제 예상으로는 유부도(幽浮島) 주변에 그 근원지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호삼 수사, 미진환연에 대해 말씀하시던데 그게 무엇입니까?”

듣고 있던 한립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질문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언문이 멸문을 당한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종문 전체가 파편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3,600여 년에 한 번씩 환연습지 위로 분홍색 안개가 일면 진언문 유적의 일부가 나타났지요. 하지만 신기루처럼 볼 수만 있을 뿐 다가설 수는 없었습니다.”

열화선존이 기억을 회상하며 말했다.

“열화 수사도 진언문 유적에 대해 조사를 해두셨습니다…….”

석천공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허허, 그냥 들려오는 소문이나 주워들은 정도입니다.”

“진언문 유적이 없을 때는 습지도 환연습지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호삼이 화제를 돌렸다.

“유적이 없었다고요?”

뜻 모를 소리에 한립이 반문을 했다.

“없었습니다. 수만 년 전에서야 습지 위로 처음 미진환연이 나타나고 진언문 유적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 그 일대가 환연습지란 이름을 얻게 된 겁니다.”

호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진언문 유적은 갑자기 생겨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그건 아직 이론이 분분합니다만, 석 형의 추론으로는 진언문 멸문 시 발생한 전쟁의 여파로 종문 전체가 공간의 틈 속에 떨어졌다가 수만 년 전에 우연히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립의 질문에 호삼이 답했다.

“저도 그저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하는 것뿐이니 무턱대고 믿지는 마십시오, 려 수사.”

석천공이 듣고 있다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연파성 문밖에 도착해 있었다.

입구에는 진선 초기의 수사를 우두머리로 하는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신분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었으나 한립 일행은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별문제 없이 조사를 통과했다.

“범인과 수사들이 공존하는 성이라 수사들은 신분을 확인해도 범인들은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사들을 대상으로 한 검문도 형식적인 편이지요. 성주의 수행이 금선 중기밖에 되지 않는데,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겠습니까?”

호삼은 한립의 표정을 읽고 설명해 주었다.

“확실히 돌아다니기 편하겠군요. 호삼 수사께서 이곳을 택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들이 거주하는 북쪽 구역에서 남쪽으로 걸어가자 훨씬 면적이 넓고 성주부가 있는 수사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나왔다.

성주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망연산(望烟山)이라는 작은 산에 객잔이 몰려 있어 그들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윤회전 내의 소식에 따르면 지난번 환연습지에 미진환연이 나타난 때가 대략 3,500여 년 전이었다.

그러니 다음번 미진환연이 나타나려면 백 년 정도가 남은 셈이었다.

백 년은 속세에서는 한 세대가 바뀔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수도자들 특히, 한립과 같은 금선들에게는 손가락을 까딱할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 * *

한립 일행은 금방 진연습지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고 130여 년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습지 쪽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 일로 호삼이 가장 긴장하고 석천공과 열화선존도 초조해했지만 한립만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흉살기를 쫓을 방법만 연구했다.

아직 윤회전에서도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가 나서지 않았으나 안정적으로 수련하면서 난해하던 연신술 5성 공법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고 화지 동천 안의 도병 모두와 영초들도 쑥쑥 자랐다.

도병에 영액을 부어주고 동천을 나온 한립은 객잔 창가에 서서 성 너머의 멀리 떨어진 환연습지를 바라보았다.

한낮이라 볕도 좋고 하늘도 맑아 환연습지의 안개가 많이 가셨는지 평소보다 훨씬 넓어 보이고 영목신통을 펼치자 유부도까지 보였다.

유부도는 진짜 섬이 아니라 수초와 진흙이 엉킨 자리에 먼지가 쌓여 만들어진 지형이라 뿌리가 땅속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자랄 수 있는 관목들만 자랐다.

바로 연신술을 수련하려던 한립은 문득 눈을 크게 뜨고 보랏빛을 발산했다.

유부도의 검은 관목들 사이로 회백색 돌기둥들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는데 주변 풀들과 크게 차이나지 않아 한립의 안력이 아니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어서 분홍색 안개가 돌기둥에서 흘러나와 점점 진하게 습지 표면을 덮어갔다.

“나타났구나…….”

유부도가 완전히 분홍색 안개에 가려지자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거의 동시에 누각 바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려 수사, 미진환연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출발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내려가겠습니다.”

호삼의 목소리를 알아챈 한립이 즉시 답했다. 네 사람은 유부도로 출발하기 위해 망연산 정상에 모였다.

“다들 제가 너무 서두른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미진환연이 예상보다 늦게 나타나서 적잖은 수사들이 혹시 모를 기연을 바라고 몰려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유적 입구를 찾을 가능성은 없지만, 우리의 행적을 사람들이 알아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더 늦지 않게 갑시다.”

호삼의 말에 석천공이 답하고 한립과 열화선존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더는 성의 규정을 지키지 않고 둔광을 일으켜 성벽 너머로 날아갔다.

파연성을 벗어난 한립은 아래쪽에서 들리는 소음에 고개를 숙였는데 수백 명은 될 법한 이들이 징과 북을 치면서 관도를 따라 환연습지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앞에서 걷는 수십 명은 키의 절반 정도 되는 기괴한 가면을 쓰고 불을 피운 연초(烟草)를 들고 춤을 추고 있었다.

“호삼 수사, 범인들인 것 같은데 왜 저러고 있는 겁니까?”

한립의 말에 호삼이 힐끗 아래를 보았다.

“저들은 원래 환연습지에 살던 토착민들입니다. 평범한 인족과 큰 차이는 없지만 장수해서 2백 년은 거뜬히 살지요. 만여 년 전인가 습지를 빠져나와 이주했는데, 선조들이 분홍 안개가 나타날 때마다 족인들이 실종되거나 죽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오래전부터 하늘의 벌을 피하기 위해 나무(儺舞)라는 춤을 추는 전통이 전해져 내려왔답니다.”

“사실 지금은 저들도 수사들과 교류를 통해 분홍 안개가 나타나는 대략적인 원인을 들었지만 그래도 전통을 지켜나가기 위해 하늘에 복을 비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석천공이 보충을 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 * *

반각이 지났을 때 네 사람은 환연습지 변두리로 내려갔다.

안개가 드리운 습지는 호수처럼 물이 찰랑거렸는데 그 위를 암녹색 수초들이 하늘하늘 떠다니고 수시로 기포가 올라와 터졌다.

미진환연의 속도는 꽤 빨라서 벌써 유부도 인근 백 리를 뒤덮고 있었다.

“여러 번 말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미진환연의 위력이 상당하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환영에 속는 일이 없을 겁니다.”

호삼은 평소의 느긋한 표정을 거두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신령환(神靈丸)입니다. 의식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가 있으니 다들 한 알씩 복용하세요.”

석천공은 암녹색 옥함을 꺼내 들었다.

“석 형, 저는 윤회전을 통해서도 구하지 못한 것을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호삼이 놀라 물었다.

“윤회전이 구하지 못한다고 광원재도 그러리란 법은 없지요.”

눈썹을 꿈틀한 석천공은 옥함을 열어 먼저 단약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신령환을 복용하면 훨씬 안전하겠습니다.”

웃음을 흘린 호삼이 다음으로 단약을 집어갔다. 열화선존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한립을 슬쩍 살폈다.

“고맙게 받겠습니다, 석 수사.”

한립은 자연스럽게 단약을 들어 올리고 웃음 지었다.

순간적으로 자세히 살펴봐도 이상한 점이 없자 그도 단약을 삼켰다. 목구멍을 내려가면서 은색 화염 한줄기가 나타나 신령환을 감싸고 뱃속에 봉인되었다.

의식에 관해서라면 자신이 있는 한립은 신령환을 복용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냥 뱃속에 넣어두기만 한 것이다.

옆에서 열화선존이 한립이 단약을 삼키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면 의식연계로 서로를 이끌어 주면서 절대 흩어져선 안 될 겁니다.”

준비를 마친 호삼이 은색 배를 습지의 물 위에 띄웠다.

한립 등 일행이 배에 오르자 그는 수결을 맺었고, 은색 배의 주술문자들이 밝게 빛나며 쉭!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습지가 다른 호수와는 달리 물이 아주 묵직해서 배가 지나가도 물방울이 튀지 않고 잔잔히 파문만 일었다.

몸을 굽힌 한립은 두 손가락을 물에 담가보고는 물속에 검은 모래 같은 것이 섞여 있고 부식성을 지녔다는 것을 알아챘다.

은색 배는 빠르게 물을 가르고 나아가 아직 미진환연의 범위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촤악!

그들이 막 거대한 녹색 부평초를 지나갈 때 물보라가 일면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검은 비늘을 지닌 거대한 괴어(怪魚)가 거대한 부평초를 머리카락처럼 얹고 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괴어의 공격에 배 위의 네 사람은 전혀 놀라지 않았고, 호삼은 심지어 ‘못생겼다’고 품평을 하기도 했다.

석천공이 양손으로 수결을 맺자 은빛이 괴어를 두 동강 냈다. 하지만 괴어는 피가 나지 않았다.

첨벙!

공간의 힘 때문인지 괴어 잔해는 물속에 떨어지고서야 핏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이상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주의하십시다.”

석천공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습지 속에서 머리 두 개 달린 거대 악어가 튀어나와 배를 물어 뜯어려 했다.“

“석 형, ‘까마귀 주둥이’라고 불길한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인데 들어보셨습니까?”

호삼이 농지거리를 했으나 석천공은 신경 쓰지 않고 무척 얇은 은색 보호막을 펼쳐 배 한 쪽을 막았다.

펑!

머리 둘 달린 악어는 은색 보호막에 부딪혀 망치로 뚜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터지고 이빨이 부서져 죽었다.

“쯧쯧, 머리는 나쁜 것이 힘만 좋아 저 꼴이 납니다.”

열화선존이 보고 있다가 혀를 찼다.

“앞에 큼지막한 녀석이 있군요.”

돌연 한립이 입을 열어 경고를 하고 청죽봉운검 한 자루가 날아가 전방의 습지를 갈랐다.

크악!

처절한 포효소리와 함께 대량의 피가 흘러나왔다.

잠시 뒤 처음 보았던 괴어와 모습은 똑같으면서 크기만 열 배는 큰 녀석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둘로 갈라져 떠올랐다.

쉭!

은색 배가 그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하하! 두 분이 나서주시니 배를 멈출 필요도 없겠습니다.”

호삼이 은색 배를 조종하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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