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화. 지하 성
*
네 사람은 빠르게 계단을 올라 하얀 대청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천정 수사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정 수사 중 은발 청년 하나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왔다.
“선배님들 선역 간 전송진을 이용하시겠습니까?”
다른 천정 수사들의 눈빛에 조금 분한 기색이 스쳤으나 그들은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
“저를 따라 저쪽으로 가시지요.”
호삼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발 청년은 희색을 드러내고 그들을 안쪽의 더 큰 대전 안으로 이끌었다.
그 안에는 돌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은 각진 얼굴에 코고 넓적한 거한 옆에 백발노인이 서서 무언가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각진 얼굴 거한은 금선이었고 입고 있는 금색 장포는 아주 화려하고 가슴에 금룡(金龍) 수가 놓여 있었다.
그들의 걸음 소리에 각진 얼굴 거한이 고개를 돌리고 백발노인도 말을 멈추었다.
“방 집사님, 선역 간 전송진을 이용하고 싶다고 오신 분들입니다.”
은발 청년이 보고했다. 고개를 끄덕인 각진 얼굴 거한은 네 사람을 훑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역 간 전송진을 이용하기 위한 규정은 다들 아시겠지만, 다시 한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전송비용은 1인당 선원석 1천 개이고, 각자의 신분을 증명한 다음 감응진법을 통과해야 전송진법에 오를 수 있습니다.”
한립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찡그렸다.
호삼은 전송비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데 가는데 선원석 1천 개면 돌아오는데 또 선원석 1천 개가 든다는 소리였다.
“하하, 규정이야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저희의 신분증명입니다.”
호삼이 앞으로 나서서 고목으로 만든 영패를 건넸다. 한립 등 나머지 세 사람도 영패를 꺼내 보였다.
파앗.
거한이 품에서 금색 옥책(玉冊)을 꺼내 영패들 위로 훑자 금빛이 날아가 영패들을 감싸고 글자들이 떠올랐다.
“천사종 장로분들이셨군요. 흑토선역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거한은 예리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고는 예정된 질문을 했다.
“종주의 명을 받아 연단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러 갑니다.”
호삼이 슬쩍 앞으로 나서며 티 나지 않게 상대의 손에 저물반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후로 각진 얼굴 거한의 안색이 한결 푸근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 그 멀리까지 재료를 구하러 가시다니 수고가 많으십니다. 신분증명이 끝났으니 다들 저를 따라오시지요.”
거한은 일어나 영패를 돌려주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은발 청년과 백발노인도 그를 따라갔다.
한립 일행도 성큼성큼 걸어가 또 다른 대전으로 들어섰다.
그 중앙에는 수많은 문양이 교차하는 커다란 원형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고 주위로 8개의 금색 돌기둥이 보였다.
역시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은 진법과 연결되어 있고 각각 금포 수사 한 명씩이 그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대전의 네 벽도 금색 진법과 연결된 주술문자들이 각인되어 있고 천장에도 거대한 둥근 거울이 떠서 진법을 마주 보고 있었다.
진법 주변 공기가 웅웅 떨려 음악처럼 대전을 울렸다.
‘이게 천경진법…….’
한립은 대전의 바닥, 벽, 천장 그리고 기둥까지 전체를 사용한 거대한 감응 진법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진법을 발동하고 자세히 검사하라.”
각진 얼굴 사내는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가 돌기둥 위의 여덟 명의 사람들에게 명을 내렸다.
눈을 뜬 수사들은 주문을 외면서 법결을 날려 진법을 발동시켰고, 복잡한 주술문자와 문양들이 내뿜은 빛기둥이 허공의 거울로 솟아올랐다.
거울에 각인된 문양에도 빛이 흘러 들어가 기이하게도 금색 눈이 만들어져 천천히 눈을 떴다.
금색 파동이 흘러나와 진법에 드리우고 있었다.
“차례로 올라가 주시면 됩니다.”
각진 얼굴 사내의 말에 네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는 호삼이 먼저 진법으로 들어갔다.
웅!
금색 빛기둥 속의 주술문자들이 무수히 많은 빛의 실로 뭉쳐 촉수처럼 호삼의 몸 곳곳을 스쳤다.
거울 속 눈은 더욱 짙은 빛을 뿜어 호삼을 감쌌다. 호삼은 아무렇지 않게 천천히 앞으로 이동해 진법을 통과했다.
그걸 본 한립은 안심하면서 금색 진법의 변화를 눈여겨 보아두었다.
“다음.”
거한의 말에 석천공이 공수를 하고 진법으로 걸어갔다.
금실들이 몰려들어 몸을 더듬고 거울에서 빛이 내렸으나 석천공은 잠시 멈칫하다 무사히 걸어 나갔다.
다음으로 한립이 각진 얼굴 수사가 입을 열기 전에 태연히 진법으로 걸어갔다.
진법에 오르자 형언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 그를 둘러쌌다. 만장 심해에 들어간 듯 압박감을 느낀 그는 잠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금색 빛의 실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들고 머리 위에서는 금빛이 내리쬐었다. 두 가지 역량이 그의 몸속을 돌아다니면서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한립은 두 역량을 막으려 하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떼서 진법을 벗어났다.
그는 객잔을 떠날 때부터 <수연사시결>의 방식대로 선령력을 운용했고 비술로 왕성한 진령혈맥과 대주천성원공의 기운을 숨겨두었다.
한립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호삼과 석천공 옆에 섰다.
마지막으로 열화선존은 거들먹거리며 진법 위에 올라 아주 순조롭게 감응진법을 통과했다.
“됐습니다. 이제 선역 간 전송진을 사용하기 위해 비용만 내시면 됩니다.”
각진 얼굴 거한이 다가오며 하는 말에 한립 일행은 선원석 1천 개씩을 냈고, 호삼은 또 슬쩍 저물반지 한 개를 거한의 손에 같이 건네주었다.
“이리로 가시지요.”
미소를 띤 거한은 그들을 데리고 또 다른 대전으로 이동했다.
그 안에는 천경진법 못지않게 화려하고 복잡한 공간 전송진이 펼쳐져 있었고 강렬한 공간 파동이 느껴졌다.
한립 일행은 거한의 말에 따라 전송진 위에 섰다.
파파파팟.
각진 얼굴 거한은 손을 털어 하얀색 삼각형 부적을 한 장씩 그들의 몸에 붙여주고 은색 옥패를 꺼내 주문을 외웠다.
은발 청년과 백발노인도 옆에서 옥패를 꺼내 들고 주문을 외고 있었다.
후우웅.
전송진법이 밝게 빛나고 은빛에 휩싸인 네 사람이 종적을 감추었다. 각진 얼굴 거한이 술법을 멈추자 전송진 진법이 빠르게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너희들에게 내리는 상이다.”
거한은 저물법기 하나를 꺼내 은발 청년과 백발노인에게 주고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감사합니다, 방 호법님!”
즐겁게 인사를 올린 두 사람은 거한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저물반지에 든 선원석 100개를 똑같이 나눠 가졌다.
“비선전 2층에서 일을 하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품계가 있는 선기를 살만한 선원석을 모으겠어요.”
은발 청년은 흥분해 속삭였다.
“허허, 그야 당연하지요. 그러니 다들 비선전 2층에서 근무를 서고 싶어 난리인 것 아닙니까.”
백발노인도 기분 좋게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찰싹 붙어 시시덕거리면서 바깥으로 나섰다.
* * *
흑토선역 북방의 얇고 기다란 대륙은 오룡대륙(烏龍大陸)이라 불렸다.
그 북부는 산맥과 강이 많아 지형의 복잡하고 물이 풍부했는데 특수한 지형 탓에 넓은 땅에 비해 큰 성은 별로 없었다.
그중에서 그나마 큰 성이 체량산맥(屉梁山脈) 중부의 흑유성(黑釉城)이었다.
흑토 선역 북방은 인구수는 적었지만 진귀한 토양에 수많은 선초와 요수들이 서식해서 인근의 많은 상회들에게는 보물과 같은 곳이고 자연히 지부도 많았다.
체량산맥에 있는 흑유성도 원래 검은 영토 흑유토(黑釉土)의 산지라 그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진흙처럼 생긴 영기를 함유한 토양은 영초를 심는 데는 적합하지 않아도 가져다 괴뢰를 제련할 수 있었다.
흑유토는 특유의 점성과 영기를 머금는 특성 때문에 괴뢰를 제련할 때 일정 비율로 넣으면 위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체량산맥에서 흑유토 채굴이 엄청나게 이루어졌다.
근 백만 년간의 무분별한 채굴로 현재는 산맥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흑유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체량산맥은 높이가 낮아지고 다른 산에 비해 지형이 평평해져서 선가의 나루터를 건설해 각종 선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십만 년 전부터는 영토 채굴이 아닌 대형 나루터 건설이 진행되었고, 남은 땅의 좋은 흙에는 각종 영초를 심었다.
그 중간에 거대하게 조성된 지하 성이 바로 지금의 흑유성이었다.
깊이가 수백 리에 이르는 흑유성은 총 7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칠중성(七重城)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이날 지하 깊은 곳의 흑유성 전송 대전에서 네 명의 수사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무리를 이끄는 검은 의복을 입은 마른 수사와 그 곁의 백발의 잘생긴 청년은 호삼과 석천공이었다.
한립과 열화선존은 그들과 한 걸음 떨어져 걸어가고 있었다.
“열화 수사, 흑토선역에 돌아오시니 심란하신가 봅니다.”
한립은 복잡한 표정의 그의 얼굴을 보고 웃음 지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만 확실히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기는 합니다.”
“다른 선역에 오니 확실히 뭔가 다르기는 하군요. 전송 대전이 지하에 다 있으니 말입니다.”
위쪽 천장에는 커다란 야명주가 박혀 있어 빛을 발하고 석벽의 좌우로 뚫린 널따란 통로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려 수사, 저희가 있는 곳은 지하에 건설된 성입니다. 이곳에는 전송 대전뿐만 아니라 선가며 객잔 상점들이 가득하니 곧 보시게 될 거예요.”
호삼은 이런 광경이 익숙한지 고개를 돌려 말해주었다.
“알겠습니다.”
왼쪽 통로로 나온 네 사람은 산의 벽을 따라 수많은 대전이 있고, 바깥에는 푸른 기와를 얹은 벽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담에 걸린 상점을 뜻하는 깃발이나 편액은 이전의 다른 성에서 보았던 상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곳은 상가가 거의 없는 편이고 가장 큰 선가 객잔은 1층에 있는데 그곳은 이곳보다…….”
상가 거리를 따라가면서 호삼은 열화선존 등에게 소개를 해주었다.
반원형의 동굴 문을 빠져나와 수백 걸음을 걸어가니 아주 넓은 대청이 나왔고 산 쪽으로 만들어진 2층의 석제 문루(門樓)가 보였다.
꽃, 새, 물고기, 곤충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아름다운 다락을 얹은 대문 위쪽에는 금색으로 백조각(百造閣)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안에 들어가 구경해보시겠습니까?”
석천공은 한립이 문루를 빤히 보고 있자 관심을 보였다.
“백조각은 백조산과 연관된 곳인지요?”
“모르고 계셨습니까? 백조산은 연기술로 명성이 자자해서 거대 상회와 거래를 하는 것은 물론 외문장로들이 머무는 상점을 열어 법보나 괴뢰들을 매매합니다. 그런 백조각의 지점이 선역 곳곳에 분포해 있지요.”
“하하, 민망하게도 저는 처음 듣는 소립니다…….”
경양상인과 어울려 지냈지만 백조산이나 연기술을 주제로는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어 이런 정보를 알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합니다. 교삼 수사의 말을 들으니 북한선역 구석에서 수련하셨다지요?”
호삼이 그럴 수 있다는 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천공이 일순 미간을 좁히며 티 나지 않게 한립을 훑었다.
한립 일행은 다시 몇 리를 걸어가 둥그런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곳에 6층으로 갈 수 있는 소형 전송진이 있습니다. 성 곳곳에 이런 곳이 퍼져있지요. 들어갑시다.”
호삼이 간략히 설명하고 문턱을 넘자 나머지도 따라 들어갔다.
바닥에는 소형 전송진이 설치되어 있고 도마뱀을 닮은 녹색 피부 이종족이 가부좌를 틀고 탁자 앞에 앉아 졸고 있었다.
호삼은 걸어가 상대를 깨우고 극품영석이 담긴 주머니를 탁자 위에 놓은 다음 일행을 데리고 전송진에 올랐다.
나른하게 주머니 속의 내용물을 세어보던 녹색 피부 이종족은 그들이 원래 비용보다 넉넉하게 담은 것을 보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서둘러 호삼에게 예를 취한 그는 6층으로 갈 수 있게 준비했다.
웅.
호삼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었고, 곧 전송진이 빛을 발하면서 네 사람은 자취를 감추었다.
“헉!”
녹색 피부 이종족은 막 극품영석를 거두려다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자신의 손에 있던 저물반지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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