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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17화 (1,574/2,000)
  • 1817화. 여유

    *

    호삼은 그들을 데리고 류운성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어느 ‘미주루’라고 적힌 주홍색 대문 앞에 이르렀다.

    총 5층으로 된 주루의 1, 2층은 커다란 식탁이 가득한 대청이었고, 3층 이상은 귀빈실로 개별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직 식사 때가 아님에도 1, 2층은 사람으로 가득했고, 앉아 있는 이들도 전부 수사에다 수행도 제법 높았다.

    바깥에서 속세의 범인들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던 이들은 거침없이 문으로 향하는 한립 일행을 보고 놀란 눈빛을 했다.

    호삼은 그들이 보든 말든 안으로 들어가 영패 모양의 물건을 점원에게 보였다.

    “아이고,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위로 모시지요.”

    영패를 알아본 점원은 허리를 숙이면서 네 사람을 5층의 귀빈실로 안내했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고급 식탁이 놓여 있었다.

    호삼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척척 주문해서 식탁 위에는 순식간에 산해진미와 청록색 술동이가 놓였다.

    술동이 안에서 풍기는 향기에 열화선존과 석천공도 침을 삼켰다.

    “과연 좋은 술입니다!”

    열화선존이 눈을 반짝였다.

    “물론이지요. 여기 미주루에 오는 이들은 다 이걸 마시러 오는 거니까요.”

    호삼은 수사들에게 한 잔씩 가득 따라 주고는 먼저 술을 쭉 들이켰다. 술잔을 들어 맛을 본 한립도 얼굴이 밝아졌다.

    호박 보석의 색을 닮은 술은 청아한 맛이 있었고 다양한 재료가 혼합되어 절묘한 향기를 냈다.

    그가 마셔본 여러 선주 중에서 으뜸이라 할만했다.

    “이 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열화선존이 맛을 보고 감탄하며 물었다.

    “호박선(琥珀仙)입니다. 천정이 군선회(群仙會)를 열 때도 이걸 가져다 쓴다니 알만하지요.”

    호삼도 술맛에 흡족한 얼굴이었다.

    “군선회요?”

    한립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정기적으로 선역의 선궁 궁주들을 불러 모아 상의하는 천정의 성대한 연회입니다.”

    호삼의 대답에 한립은 생각에 빠졌다.

    호삼은 그저 자신 앞의 술잔을 채우고 비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석천공은 맛좋은 음식에 손을 뻗었다. 열화선존도 호박선이 썩 마음에 드는지 열심히 잔을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에 가득하던 음식도 사라지고 커다란 술동이도 비었다.

    “맛 좋은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것도 삶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지요. 평생 고되게 수련만 하느니 나는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면서 즐겁게 살 겁니다!”

    호삼이 배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즐겁게 사는 것이 좋지요!”

    열화선존도 같이 소리치는데 석천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실 만큼 마셨으면 이제 흑토선역으로 넘어가는 일을 상의하시지요.”

    한립은 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펼쳐 방에 푸른 보호막을 펼쳤다.

    “편히 놀 시간을 안 주신단 말입니다.”

    호삼이 나른하게 한립을 쳐다보았다.

    “려 형의 말씀대로 이제 중요한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었습니다. 류운성은 흑산선역의 요충지로 천정의 눈이 모여 있는 곳이라 오래 머물러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석천공도 정색을 하고 열화선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호삼이 고개를 털고 장난기를 버리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석 형의 말대로 천정이 주시하는 곳이라 선역 간 전송진을 이용할 때는 엄격한 검사를 통과해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한립이 집중해서 듣다 물었다.

    “두 가지 방면으로 조사를 합니다. 첫째로 흑산선궁이 인정하는 신분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건 선원석만 쓰면 쉽게 규정에 맞는 신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가신 건 두 번째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열화선존이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천정이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천경진법(天鏡陣法)이라는 감응진법을 만들어냈습니다. 내부에 천정이 수배를 내린 범인들의 용모, 수련공법 그리고 사용하는 선기 등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지요. 우리 같은 천정의 수배자들이 천경진법에 걸리면 어찌 될지는 다들 아시겠지요?”

    호삼은 양손을 짝! 마주쳤다.

    “천정이 수배한 이들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니 대단한 진법이군요.”

    한립이 감탄을 했다.

    “천정을 좋게 보지는 않지만 선계 선역을 다스리고 휘하에 수많은 실력자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천경진법은 극도로 복잡하고 소모되는 자원의 양이 엄청나 아주 중요한 곳에만 이런 감응 진법을 설치해 사용합니다.”

    호삼의 말에 한립 등 다른 수사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 형도 취곤성에서 소란을 일으켰으니 벌써 천정의 주선대에 이름이 올랐을 겁니다. 열화 형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 둘 다 철저히 기운을 감춰야 합니다.”

    호삼이 석천공과 열화선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려 형도 그들이 천경진법을 설치한 목적에 윤회전 회원색출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보니 흉살기가 아주 짙고 특수한 방법으로 가려두었어도 완벽하지 않아 천경진법에 들킬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의미심장한 호삼의 말에 한립의 얼굴이 굳었다.

    “살쇠를 겪는 중이라 흉살기가 진합니다만, 누구나 이때는 그렇지 않습니까? 이걸 이유로 천정이 저를 윤회전 구성원이라 추정할 이유가 있는지요?”

    “신분을 막론하고 천경진법은 체내의 흉살기가 짙은 자를 걸러내 즉각 체포해 갑니다. 그 이유는 저도 모르겠고요.”

    대답을 들은 한립은 한 가지 이유를 떠올렸다.

    ‘회선!’

    천정과 회선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고, 회선의 주요 특징인 흉살기를 이용해 상대방을 찾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명한선궁에서 소진한을 죽여 천정에게 쫓기는 그는 반드시 기운을 숨겨야 했다. 그러나 그가 지닌 단약으로 억누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냥 흉살기를 숨기기만 하는 거라면 제게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한립이 걱정하는 모습이 보고 호삼이 입을 열었다.

    “어떤 방법인지 제게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립은 공수를 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호삼은 바로 손바닥을 뒤집어 은색 옥병을 꺼내 그에게 던져주었다.

    한립은 곧바로 뚜껑을 열고 은회색 단약을 꺼내 보았다. 허원단과 비슷하면서 기운이 훨씬 진했다.

    “이건…….”

    “살원단(煞元丹)이라 불립니다. 복용해 약성을 연화시키면 흉살기를 감춰줄 겁니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단약일 텐데 어찌…….”

    “허허, 아무리 귀해도 사람보다 중하겠습니까? 오랜만에 마음이 맞는 수사를 만났는데 이 정도는 내줄 수 있습니다.”

    호삼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세밀하게 은회색 단약을 살피고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단약을 삼켰다. 단약이 뱃속으로 들어가 빠르게 녹자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청량한 기운이 지나는 곳마다 흉살기가 동면이라도 들어간 듯 고요해졌고, 선규 내의 흉살기 소용돌이도 거의 멈추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빠르게 흉살기가 가라앉았다.

    몸의 변화를 감응한 한립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아직 완전히 약성을 연화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면 충분히 흉살기를 숨길 수 있을 듯했다.

    게다가 대충 셈해 보아도 약효가 10년 정도는 유지될 것 같았다.

    “호삼 수사, 살원단을 몇 개나 지니고 계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살원단의 약방을 갖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가격은 얼마가 되었든 구하고 싶습니다.”

    “이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우연히 구한 단약이라 딱 하나뿐이고, 약방은 당연히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서 구한 것인지라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태을경에 이르기 전 어느 교환회에서 누군가 선원석을 천 개나 써가며 살원단 한 병을 사가기에 그것을 가져온 겁니다. 병 안에 두 알이 들었었는데, 그중 하나는 제가 사용했고 마지막 남은 걸 드린 것입니다.”

    호삼은 정말 모른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살원단을 주신 것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원석 500개입니다.”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가 금방 평온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호삼에게 저물법기를 건넸다.

    “준다고 한 것에 대가를 받을 수야 없지요.”

    호삼은 손을 내젓다 못해 저물법기를 받지 않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받으세요. 저 성격은 못 말립니다.”

    석천공이 미소를 지으며 중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호삼 수사.”

    “류운성에 몇 번 온 적이 있으니 신분증명에 대해서는 제게 맡겨두시면 됩니다. 천경진법은 세 분이 알아서 하셔야 하는데, 절대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만 명심하세요.”

    호삼은 당부를 남기고 흐릿한 은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 * *

    보름 뒤, 한립 등 세 사람은 다시 호삼의 방에 모였다. 막 돌아온 호삼은 약간 피곤한 기색이었으나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세 분은 준비가 거의 다 된 모양입니다.”

    호삼이 세 사람을 보고 미소 지었다.

    하얀 장포로 갈아입은 석천공은 종이부채를 들고 속세의 도련님 같은 차림이었는데, 흉살기가 싹 사라져 양기가 가득한 파동이 느껴졌다.

    회백발의 노인으로 변한 열화선존은 보라색 지팡이를 들고 은은하게 보랏빛 뇌전을 번득였다. 체내의 화염의 힘이 뇌전의 기운으로 변해서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몸집이 더 커진 한립은 새하얀 피부에 복색이 달라져 있었고, 물 속성 파동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그는 보름간 객잔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살원단을 연화시키면서 정체를 들킬만한 물건과 청죽봉운검, 호리병, 해 도인, 정염소인 등을 화지 공간 내에 넣어 두었다.

    화진 공간은 외부와 격리가 되어 있지만 한립은 그 안에도 진법 공간을 마련해 마광 등을 전부 가려두었다.

    “호 형께서 요행을 바라면 안 될 거라 말씀하셨는데, 저희가 허투루 준비할 수 있나요.”

    열화선존이 웃으며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호삼이 세 사람의 신분을 증명할 물건을 나눠주었다.

    영패 모양의 노란 물건은 고목을 이용해 만든 것 같았다.

    한립의 영패에는 한쪽은 려 씨 성 말고 다른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다른 쪽에는 꽃잎 6개가 포개진 꽃봉오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 넷은 지금부터 유사대륙(流沙大陸) 천사종(天沙宗) 외문장로들입니다. 종주의 명을 받아 흑토선역으로 가서 수련 자원을 구해오는 것이 전송진을 이용하는 목적이고요.”

    호삼은 말을 하면서 전신에서 몽롱한 하얀빛을 반짝였다. 이리저리 왜곡되는 빛 속에서 그의 모습이 서서히 변해 백발 가득한 청년이 되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완전히 달라진 기운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네 사람은 바로 하얀 산봉우리 쪽으로 날아가 다시 비선전 입구에 도착했다.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드나드는 이들이 많고 매우 바빠 보였다.

    호삼은 정문으로 가지 않고 그들을 데리고 쪽문으로 가서 계단을 올라갔다.

    “다들 선원석 200개씩을 제게 주시지요.”

    갑자기 몸을 돌린 호삼의 말에 한립 등이 의아해했다.

    “무엇에 쓰려고요?”

    석천공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 성가신 일을 줄이기 위한 겁니다.”

    가볍게 웃음 짓는 호삼을 보고 다들 의심 없이 선원석 200개씩을 꺼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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