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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16화 (1,573/2,000)
  • 1816화. 기다림

    *

    3년 뒤.

    흑산선역의 어느 검은 산맥 안, 높다란 두 산봉우리 사이의 작은 언덕.

    숲속에 덤불로 숨겨진 작은 돌길이 구불구불 오래된 도관으로 이어져 있었다.

    도관의 산문이 허물어지고 몇 개 안 되는 방들도 대부분 지붕이 무너져 내려 딱 삼청전(三淸殿)이라 적힌 방 하나만 겨우 남아 있었다.

    새까만 밤이 되자 그 안에서 몽롱한 하얀빛이 새어 나왔는데, 푸른 장포를 입은 사내가 그 안에서 방석을 깔고 앉아 하얀빛에 둘러싸인 암녹색 병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립은 열화선존 등과 헤어지고 홀로 청림진을 떠나 여러 번 뇌전을 이용해 멀리 이동했다.

    낮에는 열심히 이동하고 밤에는 평범한 마을이나 외진 산에 들어가 다른 수사들의 눈을 피해 장천병에 녹색 액체를 모으면서 시간 공법을 수련했다.

    마지막으로 숙살단을 복용해 꽤 흉살기를 줄여 놓았기에 한동안은 별일 없겠으나 수사들이 많이 몰려 있는 성이나 큰 마을에 가기에는 마음이 불안했다.

    하얀빛이 모두 병 속으로 흡수되어 녹색 액체가 만들어지자 한립은 멀지 않은 곳에 쌓아둔 장작에 불을 붙이고 작은 병을 들어 올렸다.

    일렁이는 빛 속에서 병 안의 액체가 천천히 찰랑거리는 게 보였다.

    화지 동천에 들어가 도병 모두에 부어주려던 그는 용오 가면에서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가면을 쓰고 수결을 맺자 그의 앞에 붉은빛이 빠져나와 누군가의 허상을 만들어냈다.

    키가 크고 넉넉한 검은 장포를 입은 상대는 매부리코에 송곳니가 길게 드러난 악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한립은 육인갑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윤회사의 복장과 흡사한 것을 보고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용오겠지? 윤회자가 된 지 거의 천 년이 다 되어가서 다음번 천년을 위해 새로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벌써 천 년이 지났습니까? 시간이 빨리도 지나가는군요…….”

    “임무를 받을 텐가 아니면 선원석으로 상환할 텐가?”

    “임무가 무엇인지부터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번 임무는 위작산(圍鵲山)에서 호삼을 만나 어느 유적 조사를 돕는 일일세. 그와 만나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고, 보상으로는 유적에서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 외에 호삼이 따로 선원석 2만 개 혹은 품계가 없는 선기를 내줄 것이네.”

    “호삼 수사가 바깥에서 괴도라 불리는 은호와 동일인입니까?”

    “그건……. 직접 만나 알아보는 게 좋겠군.”

    윤회사는 답을 주지 않았으나 한립은 이미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선원석으로 갚으려면 얼마를 내야 하는지요?”

    “5만 개.”

    냉랭한 윤회사의 대답에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선원석 5만 개가 많기는 해도 내주지 못할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가져다 버려도 될 액수는 절대 아니었다.

    그는 심각하게 진언문 유적에 대해 고려해보았다.

    <진언화륜경>과 육인갑 때문에 관심이 있기는 했으나 이전에 같이 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 중에는 호삼과 석천공을 믿을 수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하지만 윤회전에서 천 년에 한 번 주는 임무를 통해 가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간 흉살기를 없앨 방법을 찾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니 진언문 유적에서 발작하든 선궁에게 쫓기는 중에 발작하든 별 차이가 없을 듯했다.

    “그래서 무엇을 선택할 건가. 빨리 결정을 하게.”

    “이번 임무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알았네. 이번 임무를 수행하고 천년 간은 자유의 몸이고, 상응하는 선원석만 내면 윤회전 내의 자원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네.”

    윤회사는 허공에 은빛을 응결해 붉은색으로 위작산이라고 적힌 지도를 불러냈다.

    “반년 내로 표시된 곳에 도착하지 못하면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를 걸세.”

    이 말을 끝으로 윤회사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는 얼른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노요산(老凹山)이라는 지명을 보았다. 이곳에서 위작산까지는 벽옥비차로 길어야 3달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 * *

    3달 뒤.

    만두 모양의 높은 봉우리 위에 세 사람이 정교하게 지어진 백옥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은색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술잔 안에는 보랏빛의 술이 찰랑거렸고 그윽한 향기가 났다.

    세 사람 중 흑포 청년이 가장 편안한 태도로 술을 넘겼는데, 술동이는 무슨 선기인지 마셔도 마셔도 계속해서 술이 나왔다.

    “호삼 수사, 려 수사가 떠나지 않았으면 두 분이 잘 어울렸을 겁니다. 술에 관해서라면 그쪽도 해박해서요.”

    청년의 맞은편에 앉은 열화선존이 말했다.

    “오, 그런가? 그거 안타깝구만.”

    호삼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래서 온다는 사람은 언제 오는 겁니까?”

    석천공이 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옵니다. 길어야 한두 달이면 와요. 고위층에서도 이번 일에 상당히 관심을 보였으니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선발하는 중일 겁니다. 인내심을 갖고 좀 기다려 보세요.”

    호삼은 술잔을 꺾으며 말하다 눈을 번쩍 떴다.

    “예상보다 일찍 왔습니다!”

    그의 시선이 푸른색 둔광으로 향했다.

    “려 수사?”

    둔광이 가시고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이 떨어지자 열화선존이 반색하며 일어났다.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한립은 공수를 하고 웃으며 인사를 했는데, 호삼과 석천공은 미간을 좁혔다.

    “자네가……이번에 임무를 보조할 인원이란 말인가?”

    호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훑었다.

    “저도 이번 임무가 진언문 유적 조사가 될 줄은 몰랐군요.”

    한립은 탄식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 용오 가면을 썼다.

    “헤헤, 자네가 용오였다고?”

    “저를 아십니까?”

    “교삼에게 들었지. 연단도 잘하고 수행에도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용오라는 인물이 있다고 말이야. 그때 인상에 깊게 남았는데 만나게 되니 반갑구만.”

    호삼이 씨익 웃음 지었다. 이번에는 열화선존이 놀랄 차례였다.

    “려 수사……. 윤회전 사람이었습니까?”

    “죄송합니다. 특수한 신분이라 함부로 밝힐 수 없어서 속이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열화선존을 향해 포권을 했다.

    차라리 용모를 바꾸고 올까도 생각해 봤지만 서로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들킬 것이 뻔해 그냥 온 것이다.

    차라리 ‘려한’이라는 신분으로 다니는 것이 온갖 성가신 일을 줄일 수 있는 길이었다.

    “아닙니다. 저도 신분을 숨기고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다 이해합니다.”

    “허허, 다들 아는 사이니 이번 임무는 수월하겠습니다.”

    석천공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맞는 말일세. 열화 수사가 안 그래도 우리 둘이 술친구를 하면 좋겠다고 하던데, 자자 앉아서 들지.”

    호삼이 자리를 권하자 한립도 거절하지 않았다.

    한운곡에 있을 때 경양상인을 제외하고 술을 제일 좋아하는 게 열화선존이었다. 그런데 또 술을 좋아하는 호삼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들은 껄렁하고 되는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립은 이들에게 반감이 들기는커녕 예전 칠현문의 일이 떠올라 친근감이 느껴졌다.

    * * *

    흑산선역 원구대륙(元龜大陸), 류운성(流雲城).

    원구대륙은 흑산선역의 동남쪽에 있었고, 류운성은 그 운구대륙의 서쪽 끝에 있어서 위치상으로는 외지지만 실제로는 흑산선역에서 가장 번화한 성들 중 하나였다.

    성벽은 웬만한 산봉우리처럼 높고, 넓은 대로를 사이에 두고 화려한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오가는 이들이 엄청 많았다.

    성에 인접한 새까만 바다는 폭란해(暴亂海)라 불리는 만큼 사시사철 파도가 거세고 기후가 악랄해서 범인들은 물론이고 수사들도 함부로 들어가면 무사히 나오기 어려웠다.

    그러나 천지영기가 무척 짙어 요수와 진귀한 재료들이 풍성해서 위험한 줄 알면서도 수사들은 류운성을 찾아 바다로 나설 준비를 했다.

    유운성이 번화한 또 다른 이유는 이곳에 흑토선역으로 통하는 전송진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맹선구 사이에는 만황구역만 없다뿐이지 역시 딱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위험지대를 통과해야 오갈 수 있었고, 흑산선역과 흑토선역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폭란해였다.

    류운성 중앙 구역에는 구름까지 솟은 거대한 산이 있었고 그 위로 빼곡하게 건물들이 이어져서 마치 대형 벌집 같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장관이었다.

    그 산 중턱 하얀색 3층 탑에 비선전(飛仙殿)이라고 크게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바로 백옥을 쌓아 만든 류운성의 전송 대전이었다.

    대문을 통과해 긴 회랑을 지나 쭉 들어가면 너른 대청이 나왔고 좌측에 천정 수사 여럿이 나란히 앉은 기다란 옥탁자 6개가 늘어져 있어 각각 줄을 선 수사들의 수속을 도왔다.

    오른쪽에선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전송진들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고 그 옆에 옥패로 목적지가 적혀 있었다.

    전송진들이 수시로 웅웅 울리면서 하얀빛을 뿜을 때마다 누군가 류운성에서 떠나거나 어딘가에서 도착했다.

    웅!

    그때 전송진이 반짝이면서 열댓 명이 나타났다.

    그중 네 명이 먼저 내렸는데 세 명의 청년과 백발노인으로 이루어진 한립, 열화선존 무리였다. 그들은 용모를 바꾸고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혀 여기까지 오는 데 30년이나 걸렸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갑시다.”

    호삼이 두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다른 이들을 이끌고 바깥으로 걸어갔다.

    “저기, 바로 다른 전송진을 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선역 간 전송진은 다른 전송진과 달리 탑승자에 대한 조사가 엄격합니다. 일단 나가서 준비하고 돌아옵시다.”

    열화선존의 물음에 호삼이 설명해 주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호삼도 다른 이들을 동년배처럼 대해주었다.

    한립과 석천공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들을 뒤따랐는데 아무도 몰랐지만 열화선존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삼은 각 대륙을 돌아다닌 경험이 많아서 오는 동안 그가 결정을 내리고 다른 이들은 그 말에 따랐다.

    여기까지 무사히 온 데는 그의 공이 컸다. 겉보기에는 그래 보이지 않는데 아주 예민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부류였다.

    인파를 따라 하얀 탑을 나오자 아래로 성의 번화한 모습과 성 밖의 검은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폭란해군요. 듣던 대로입니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검은 해역을 보고 한립이 감탄을 터트렸다. 멀리서 쿠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발밑도 흔들렸다.

    “그래도 여기는 좀 낫습니다. 폭란해 깊은 곳으로 가야 이게 파도구나 싶을 겁니다.”

    호삼이 웃으며 말했다.

    “폭란해 깊숙이까지 가보신 겁니까?”

    “아주 오래전 일인데, 머리가 돌았었나 류운성에서 흑토선역까지 가는데 바다를 건너고 싶더군요. 그래서 수십 년을 허비해 폭란해 심처까지 가보았습니다.”

    “듣자니 각종 요수 외에도 기이한 바다 요족들이 무리 지어 살아서 아주 위험하다던데요.”

    한립이 계속 묻자 열환선존과 석천공도 흥미롭게 들었다.

    “려 형의 견문이 박식하십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해요족(海妖族)들은 인족 수사를 증오해서 한번 걸리면 끈질기게 추격해 죽입니다. 저도 해요족을 만나서 10년 동안 도망만 치다 마지막에는 부상을 입고 공간 선부를 이용해 간신히 도망쳤지요.”

    호삼은 옛일을 회상하는 듯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호 형 당시 수행이…….”

    열화선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하, 막 태을경에 이르러서 제 잘난 맛에 정신 못 차리고 다닐 때였습니다!”

    호삼의 실력에 태을경 수행을 지니고도 폭란해를 건너지 못했다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해요족에는 대라경의 존재도 있어 천정도 별 방법이 없어서 선역 간 전송진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군요.”

    “갑시다. 나머지 이야기는 객잔을 찾은 후에 하시지요.”

    호삼의 말에 그들은 깔끔한 객잔에 방을 네 개 잡았다. 얼마 뒤 호삼의 방에 모인 그들은 검문에 관해 물었다.

    “그건 급할 것 없습니다. 고생해서 류운성까지 왔는데 급히 떠나면 아쉽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미주루(味酒樓)라는 곳이 있는데, 술맛이 아주 좋아서 그 향이 입에서 3일을 맴돈다고 합니다.”

    호삼이 허허 웃으며 늘어놓는 말에 한립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매번 성에 이르면 이렇게 좋은 술과 요리를 찾아다니면서 길게는 보름도 머물고는 해서 여정이 늘어지곤 했다.

    “술맛이 그리 좋다고요?”

    열화선존도 술 이야기에 손을 싹싹 비볐다.

    “그러지요. 다들 긴장하면서 오느라 고생했는데 쉬었다 갑니다.”

    석천공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석 형 말이 맞습니다. 갑시다, 어서!”

    호삼은 석천공과 어깨동무를 하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립은 코끝을 긁적이고 그들을 따라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좋은 술에 목을 매지는 않아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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