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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15화 (1,572/2,000)
  • 1815화. 거절

    *

    흑산선역 어딘가, 암녹색 울창한 수풀 위.

    은색 뇌전빛이 폭포처럼 떨어져 전송진을 이루고 한립과 열화선존이 나타났다.

    빛이 가시자마자 즉시 남쪽으로 달아난 그들은 산촌의 작은 마을 밖에 내려섰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기운을 감추고 낡은 산길을 따라 걸었다.

    마을 안과 밖을 구분 짓는 나무문에는 기와가 얹어져 있고 청림진(靑林鎭)이라는 명패가 걸려 있었다.

    한립은 이끼 긴 명패를 보고는 순간 어린 시절 그가 나고 자란 산골 마을을 떠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잠깐 예전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지금 간이 콩알처럼 작아졌는데 려 수사께서는 과거를 회상할 정신이 있단 말입니까? 그 정신력이 아주 감탄스럽습니다…….

    “대부분 남쪽으로 향했지만, 중간중간 동쪽과 서쪽으로 방향을 여러 번 틀었고 확인해봐도 누가 쫓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열화선존이 투덜대는 소리에 한립이 웃음 지었다.

    두 사람은 문을 지나 그리 크지 않은 마을로 들어갔다. 그래도 주루와 객잔 등 있을 만한 것은 다 있고 오가는 사람도 꽤 되었다.

    두 사람은 찻집으로 들어가 2층의 외진 방에 자리를 잡고 차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켰다.

    찻잔에서 풍기는 맑은 향기에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이런 산골에서 고급스러운 차를 팝니다…….”

    그 말에 열화선존도 차를 홀짝 들이켰지만 똑같은 범인들의 차였다.

    “이번에 려 수사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방안의 창문을 통해 길가를 내려다보고는 진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 말씀보다는 어째서 선궁 인물들에게 공격당했는지나 말해주시지요?”

    “그건…….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도 되고요. 종문에 무슨 문제가 생겼기에 제게도 화엽종 외문장로 신분을 알리지 말라 당부한 것이 아니셨습니까? 골짜기에 머물 때 저를 도와주셨으니 신세를 갚은 겁니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기는 한데 혹시 몰라서 당부드렸던 겁니다.”

    한숨을 내쉬는 열화선존을 보고 무어라 답하려던 한립은 벌떡 일어나 청죽봉운검을 쥐었다.

    그 모습에 열화선존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허공에 은빛이 나타나 공간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공격하지 마시게. 난 선궁 사람도 아니고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

    보라색 의복을 입고 구불구불한 백발을 늘어트린 잘생긴 사내와 마른 몸에 검은 장포를 걸친 사내였다.

    ‘저들은?’

    한립은 바로 석천공과 윤회전 괴도 호삼을 알아보았으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낯선 이들이 자신만 바라보자 열화선존이 입을 열었다.

    “전 석천공이라 합니다. 제 이름은 못 들어 보셨을 테지만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열화 수사를 찾아온 목적만 알면 되니까요.”

    석천공은 예를 취하고 잔잔히 웃어 보였다. 말을 하면서 한립을 훑는 그의 시선에 의혹이 어렸다.

    “자네는 옥곤루 경매에서 나와 보물을 두고 경쟁했던 수사구만. 주머니가 두둑한가 보군?”

    곁에 있던 흑포 청년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명성이 자자한 은호 괴도께서 겨우 그런 일로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답했다.

    “허허, 전혀! 오늘은 열화 수사를 찾아온 걸세.”

    “나를 대체 왜 찾으신 겁니까?”

    열화선존은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슬쩍 한립 곁으로 붙어 섰다.

    “우리가 왜 찾아왔는지는 수사께서 이미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석천공이 열화선존을 응시하자 한립도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난 모르겠습니다! 원한이 있어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할 말도 없고요. 려 수사, 우리 갑시다…….”

    “화 수사, 오랜 세월 종문을 떠나 있었으니 이제 한 번쯤 돌아가 볼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호삼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당신……. 돌아가 봤자 다 무너지고 부서졌을 텐데 왜 포기를 안 하시는 겁니까!”

    움찔한 열화선존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한립은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짐작할 수 없었으나 서로 악감정은 없는 듯하여 손에 쥔 장검을 거두었다.

    “우리가 포기한다고 해도 천정이 추적을 멈추지 않을 걸세. 화엽종은 선궁의 감시를 받고 있고 한운산은 난리가 났을 것이야. 이래도 모르겠는가?”

    호삼의 탄식 어린 말에 한립은 열화선존이 화엽종 장로라는 신분 외에 다른 과거가 있고 골짜기의 납치 살해 사건이 그와 관련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이 누구인지부터 밝혀 주시지요.”

    한참을 생각하던 열화선존이 입을 열었다.

    “나는 윤회전 사람이고, 여기 석수사는 마역에서 왔네.”

    호삼은 어깨를 으쓱하며 바로 답했다.

    “마역이 윤회전과 결맹한 것입니까?”

    “하하, 과한 생각은 마십시오. 저 같은 무명소졸이 마족을 대표할 수 있나요? 일단은 개인적으로 호삼 수사의 요청을 받아 동행한 것이고, 진언문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왔습니다. 제 궁금증을 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석천공이 웃으며 꺼낸 말에 한립의 고요하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진언문!’

    “하아, 진언문이 멸망할 때 저는 스승님의 명에 따라 바깥세상에서 경험을 쌓고 있었기에 위험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장로나 제자들은 전부 천정의 추적을 받았기에 저도 용모를 바꾸고 멀리 타향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니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리 없지요.

    저도 그게 궁금해 위험을 무릅쓰면서 흑산석역으로 와 남들의 이목을 숨기기 위해 화엽종을 건립했던 겁니다.”

    “그 말은 열화 수사께서 한운산에 은거해 있던 것은 종적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까?”

    한립이 가만히 듣고 있다 한마디 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야학곡에서 오래 머물렀던 것은 단 수사 등과 성격도 잘 맞고 그 한가롭고 화목한 분위기가 좋아서였는데, 저 때문에 모두에게 피해가 갈 줄은 몰랐습니다.”

    열화선존은 미안한 기색으로 답했다.

    “자책할 것 없네. 선궁이 윤회전 인물들을 색출하려 한운산을 건들려고 한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까 말이야.”

    호삼이 웃으며 위로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머물던 골짜기의 어느 수사가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는데 그건 윤회전의 소행입니까, 아니면 선궁의 소행입니까?”

    한립은 우자기의 이야기를 물었다.

    “아, 절벽에 쓰러져 있던 그 사내 말인가? 공격한 자는 붉은 우산을 들고 여인처럼 분칠을 한 녀석이었는데 흑산선궁 인물로는 보이지 않고 어느 감찰선사의 수하로 보이더군.”

    “그 사람을 구한 사람이 당신이었군요?”

    호삼의 대답에 한립이 눈썹을 꿈틀했다.

    “의식을 터트릴망정 추혼술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봐줄 만해서 한 번 도와줬네. 그런데 정말 데려다가 멀쩡하게 살려낼 줄은 몰랐군! 대단하더군.”

    호삼이 턱을 쓸어내리며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큼, 자꾸 딴 얘기하지 말고, 해야 할 이야기나 좀 마칩시다.”

    석천공이 호삼에게 재촉했다.

    “헤헤, 내 말 많은 것도 병이야. 열화 수사, 천정이 이미 자네의 행적을 찾았으니 앞으로 편한 생활은 끝이나 다름없네. 우리와 힘을 합쳐 진언문 유적을 찾아준다면 자네를 윤회전에 추천해 앞으로는 윤회전의 비호를 받게 해주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석천공에게 간사한 웃음을 흘린 호삼이 열화선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열화선존은 고민스러운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진언문 유적을 찾기 어렵다고 해서 꼭 수사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천정 인물들이 수사를 찾으면 이렇게 좋은 말로 부탁할지 의문이군요.”

    석천공은 씩 웃음 지었다.

    “석 수사 말대로 천정 인물들이 끈질기게 쫓을 텐데, 그때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당시 진언문이 어쩌다 멸문했는지 자네도 알고 싶지 않은가. 우리와 힘을 합치면 서로에게 득이 될 걸세.”

    호삼도 계속해서 권했다.

    한립은 두 사람이 어르고 달래는 꼴에 속으로 냉소를 흘렸으나 자신과 관련한 일이 아니라 굳이 나서지 않았다.

    “다 떠나서, 미라 노조가 남긴 <대오행환세결(大五行幻世訣)>이 천정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두고만 볼 텐가?”

    호삼의 이 말이 열화선존의 머리를 강타한 듯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놀랄 것 없습니다. 윤회전이 각종 소식에 정통한 것은 알 겁니다. 윤회전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천정이 진언문 유적을 찾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대오행환세결> 때문이라 합니다.”

    석천공이 적절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들도 그 공법을 원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만 어쨌든 천정의 손에 그 공법이 넘어가는 것을 막겠다는 목표는 우리나 수사나 같지 않은가?”

    호삼은 부인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당신들과 손을 잡겠습니다!”

    “하하, 현명한 판단일세! 역시 똑똑한 사람과 대화를 해야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구만.”

    “잠깐,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려 수사는 저를 구하려다 선궁 인물들을 죽였습니다. 반드시 이번 일에도 함께하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그건…….”

    열화선존의 조건에 호삼이 말을 흐렸다.

    “호삼, 내 생각에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요 며칠 지켜본 바로 천정 인물은 아닌데, 함께 한다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석천공은 찬성했다.

    “석 형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려 수사도 우리와 함께 가지.”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가 열화 수사를 구한 것은 그간의 정을 보답하기 위해서였지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진언문 유적에도 저는 별 관심이 없어서요. 이번 일에서는 빠지겠습니다.”

    호삼까지 허락한 마당에 한립이 포권을 하면서 거절했다. 다들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려 수사, 윤회전 세력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저들과 같이 다니면 자원도 풍부하게 지원받으면서 안전하게 흑산선역을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진언문 유적에 관심이 없다면 안전한 곳까지만 함께 가시지요.”

    열화선존은 다급히 전음으로 말렸다.

    “아시다시피 저는 살쇠의 겁으로 곤란한 처지라 다른 복잡한 일에 휘말릴 수가 없습니다. 선궁에서 잡으려는 것은 수사시니 저는 조심히 다니면 괜찮을 겁니다.”

    한립도 전음으로 뜻을 전했다.

    그도 진언문 유적이라는 말에 잠시 망설였으나 흉살기를 없애기 전에는 다른 일에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석천공과 호삼은 시선을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저도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이 넓다지만 세월도 유구하니까 언제고 다시 만나 이번에 받은 도움에 꼭 보답하지요.”

    “야학곡에서 서로 나눈 정이 있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열화선존의 인사에 한립도 포권을 했다.

    한립은 석천공과 호삼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푸른 둔광으로 변해 찻집 창문을 빠져나갔다.

    “유적으로는 언제 출발하실 예정입니까?”

    열화선존이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급할 것 없네. 아직 한 명이 더 와야 하니까.”

    호삼이 입꼬리를 쓱 끌어올리며 답했다.

    “일단 이곳을 떠납시다. 진법을 펼쳐 놓았지만 감찰사들이 언제 눈치채고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석천공이 양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전신에서 은빛을 방출했다. 허공에 강렬한 공간 파동이 일고 세 사람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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