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화. 9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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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 수사들이 습격을 당하거나 실종되는 일이 잦아지자 한운산에 은거를 하던 이들이 속속들이 떠나고 있었다.
한립도 진작 법기며 동부에 두었던 각종 물건을 정리해 두었다.
선궁의 이목을 끌까 걱정하며 때를 기다렸는데, 이제는 웬만한 이들은 다 떠나는 판이니 지금 떠나면 특별히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 따라붙으면 따돌리거나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영원히 입을 막는 방법도 있었다.
한립은 동부를 떠나 열화선존 등과 자주 모였던 계곡 근처의 정자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표정이 어두웠고, 창백한 얼굴의 우자기와 막무설은 나란히 앉아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려 수사,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소식을 전하려던 참입니다.”
경양상인이 가장 먼저 알은체를 했다.
“다들 무슨 이야기 중이셨습니까?”
“골짜기 안의 상황이 나날이 안 좋아진다는 이야기지요, 뭐. 지난달에만 세 명이나 습격을 당해서 그중 한 명은 죽었답니다.”
단여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우리도 어디로 피신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 상의 중이었습니다.”
열화선존이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열화 수사께서는 어찌할 작정입니까?”
한립이 그를 보며 물었다.
“저는 일단은 종문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래도 그곳은 안전할 것 같으니까요.”
“저도 잠시 이곳을 떠나 가운성(嘉雲城)으로 가려 합니다. 그곳에 친한 벗이 있어서 신세를 좀 지려고요.”
열화선존과 단여재가 차례로 답했다.
“려 수사께서는 계획이 있으십니까?”
경양상인이 한립에게 물었다.
“야학곡이 그립기는 하겠지만 저도 떠날 생각입니다.”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그러지 마시고 잠시라도 백조산에 머무시겠다면 안전을 물론 필요한 자원도 충분히 지원하겠습니다.”
경양상인은 오늘도 그를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몇 년 전 신분을 밝혀 다들 그가 백조산 출신인 것을 알았다.
“고맙습니다만, 저는 따로 갈 곳이 있어 귀종으로는 가지 못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백조산으로 저를 찾아오세요.”
한립의 거절에 경양상인이 아쉬워했다.
“우 수사와 막 수사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열화선존이 물었으나, 막무설은 야학곡을 쓸쓸하게 훑으며 대답이 없었고 우자기도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 수사와 막 선자도 갈 곳이 없으면 일단 백조산으로 가셔도 됩니다. 제가 두 분을 위해 위험하지 않고 할 일도 많지 않은 적당한 직위에 추천해 드릴 수 있습니다.”
경양상인은 웃으며 그들에게도 백조산으로 갈 것을 권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동안은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 같네요.”
막무설의 말에 다들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우자기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이런 위험한 때에 꼭 남아 계셔야겠습니까?”
단여재가 급히 물었고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마음을 알겠지만 저는 이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기로 맹세하였기에 떠날 수가 없습니다.”
막무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우자기의 얼굴에 핏기가 더욱 사라졌다. 두 사람의 표정 변화에 한립은 미간을 좁혔으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남녀 사이의 일은 남들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괜찮으시다면 우 수사와 함께 백조산으로 가시지요.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아 계속 요양해야 할 것입니다.”
막무설의 부탁에 경양상인이 흔쾌히 답을 하려는데 우자기가 벌떡 일어났다.
“당신이 떠나지 않겠다면, 저도 여기 남아 함께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막무설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두 분이 그렇게 결정하셨다니 제가 떠나기 전 야학곡 바깥에 백조산 독문의 금제를 펼쳐 두겠습니다. 누군가 금제를 건드리면 미리 알 수 있을 테니 지금보다는 안전하겠지요.”
“고맙습니다, 경양상인.”
막무설은 정말 감동한 기색이었다. 그녀도 정말 죽고 싶어 이곳에 남는 것은 아니었다. 우자기도 서둘러 경양상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잠시 후, 경양상인은 골짜기 바깥으로 가서 금제를 펼치기 시작했다.
열화선존과 막무설도 동부로 돌아가고 이제 남은 것은 한립과 우자기 둘이었다.
우자기는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막무설이 동부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 시선을 돌렸다.
“우 수사, 부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단약들입니다.”
한립은 내심 한숨을 쉬며 저물반지를 하나 꺼내 건넸다.
“아닙니다. 아직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 이렇게 귀한 단약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껴두셨다가 수사께서 필요하실 때 쓰셔야지요.”
우자기가 깜짝 놀라 거절하려 했다.
“제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단약들입니다. 게다가 수사가 어서 나아야 막 수사도 마음을 놓지 않겠습니까.”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낙담할 것 없어요. 수사의 자질이 빼어나니 머지않아 금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은 저물반지를 주면서 우자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럴 지도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우 수사,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으나 몸조심하십시오.”
“바로 떠나려 하십니까?”
인사를 하는 한립을 보고 우자기가 놀라 물었다. 한립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홀로 날아올랐다.
그가 아주 멀어지고서야 시선을 거둔 우자기는 저물반지 안에 의식을 불어 넣고 멍해졌다.
그 안에는 부상치료용 단약 외에 수련에 도움이 될 만한 종곡단(種谷丹) 그리고 금선에 이를 때 가능성을 높여줄 단약까지 들어있었다.
이렇게 많은 단약이라면 그가 고비를 넘어 금선에 이를 때까지 쓸 수 있을 것이다.
“려 수사,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번 고비를 넘겨 살아남는다면 기필코 은혜를 갚겠어요.”
우자기는 저물반지를 꼭 쥐고 의지를 다지며 자신의 동부로 돌아갔다.
* * *
한립이 막 야학곡을 빠져 나가려는데 골짜기 바깥에서 경양상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려 수사 이렇게 급히 가십니까?”
“떠나야 한다면, 지금 가뿐한 마음으로 가려 합니다.”
“정말 백조산에 들어올 마음은 전혀 없으시고요? 조건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여러 차례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홀로 다니는 것을 선호해서요.”
끈질긴 경양상인의 요청에 한립은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하긴 딱 봐도 자유롭게 살 분 같아 보이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자꾸 묻습니다만…….”
경양상인이 술병을 통째로 들어 올려 꿀꺽꿀꺽 삼키고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우리가 벗인 것은 변함이 없는 겁니다. 백조산 부산주들끼리 경쟁이 아주 치열해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가면 거절하기 없기에요.”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아, 지난번에 부탁한 흉살기를 떨쳐낼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은 잘 안 됐습니다. 명을 내려 사방으로 알아봤지만 딱히 좋은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쉽게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그 일로 고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앞으로도 소식이 있는지만 살펴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시간법칙을 지닌 물건이면 재료든 선기든 상관없이 모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한립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난번 시간법칙의 실이 8개나 늘어난 것을 보고 앞으로도 시간법칙을 지닌 물건으로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시간법칙을 지닌 물건이라…….”
침음하던 경양상인은 손바닥을 뒤집어 은은한 금색 자물쇠를 꺼내 들었다.
자물쇠에서 퍼진 강렬한 시간 파동은 한립이 지난번에 얻은 단시호나 푸른 나무 자 이상이었다.
“9품 시간법칙 선기입니다. 3대 지존 법칙을 품고 있어서 7품 선기에 맞먹는 물건인데, 지난번에 빌린 선원석 8만 개를 갚지도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으니 이걸로 대신 갚은 셈 치겠습니다.”
경양상인은 아까워하는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자물쇠를 한립에게 주었다.
“9품 선기요? 선기에도 품계가 있었습니까?”
자물쇠를 받으며 기뻐하면서도 한립은 처음 듣는 소리에 놀랐다.
“모르셨습니까? 하긴 보통은 태을급은 되어야 아는 사실이긴 합니다. 품질이 좋고 법칙의 힘을 지니고 있으면 다 선기라 부르지만 선기끼리도 위력 차이가 엄청나게 크지요. 그래서 저희 백조산에서는 선기가 함유한 법칙의 힘의 양에 따라 총 9품으로 나누어 구분합니다. 9품이 가장 낮고 1품이 가장 높은데, 이 자물쇠 선기가 9품입니다.”
“이렇게 강렬한 법칙의 힘을 지닌 선기가 9품이라면 보통 선인들이 선기라 부르는 것은 품계에 들지도 못하겠군요?”
“맞습니다. 품계가 있는 선기는 무척 귀해서 보통 태을경 수사들이나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선 이하의 수사들은 보통 선기 한두 개를 구하기도 어려운데 어디 품계까지 관심을 둘 여력이 있겠습니까?”
경양상인은 웃음을 흘렸다.
“그랬군요. 좋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한립은 손에 든 자물쇠를 바라 보았다.
시간법칙을 이리 강렬하게 내뿜는 보물이라면 선원석 8만 개에 2만 개를 더 얹어주고라도 구했을 것이다.
경양상인이 이것을 내놓은 것은 확실히 회유의 뜻이 담겨 있었다.
“겨우 선원석 8만 개를 빌려드리고 받을 물건은 아니지만 필요하던 것이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수사에게 신세를 진 것으로 해두지요.”
“허허허, 신세는요 무슨!”
한립의 말에 경양상인이 밝게 웃음 지었다. 인사를 나누고 떠나는 한립의 머릿속에 또 다른 수사의 전음이 울렸다.
“어디를 가시든 지난번에 구해다 드린 화엽종 장로 영패는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우뚝 멈춰 야학곡 방향을 돌아본 그는 열화선존 동부 안에 사람은 없고 흐릿하게 공간 파동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전음을 보낸 것은 바로 열화선존이었다.
동부에 금제가 펼쳐져 있어도 그의 구유마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립은 몸을 돌려 취곤성 방향을 힐끗 보고는 다시 남쪽으로 날아갔다.
취곤성 안에 전송진이 있다지만 화엽종 장로 영패를 쓰지 말라는 열화선존의 충고에 위험을 무릅쓸 마음이 싹 가셨기 때문이다.
부운산맥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흉살기를 없앨 방법을 찾아 태을경에 이르는 것이 시급했다.
* * *
보름 뒤, 비차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립 앞에 금색 자물쇠가 둥실 떠서 시간법칙 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수결을 맺은 그는 법결을 날려 제련하면서 그 안에 담긴 시간법칙의 힘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한참 후 눈을 뜨고 손을 뻗어 자물쇠를 들었다.
구금의 힘을 지닌 것이 진언보륜과 유사하면서도 어느 선기보다 강력한 법칙의 힘을 품고 있었다.
이걸 흡수하면 시간법칙 정사가 많이 늘어날 것 같기는 한데 선기 자체도 위력이 상당해서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일단은 급한 일부터.”
한립은 결정을 미루고 입에서 금색 기운을 뿜어 자물쇠를 삼키고 흑산선역 지도가 담긴 옥간을 꺼냈다.
부운산맥을 떠난 지 보름이 넘었는데 아직 누군가 따라붙지 않아 이제야 안심하고 자물쇠를 연구한 것이었다.
비차 아래 구불구불 이어진 새까만 산은 검은 안개로 덮여 있었다. 오다 보니 이런 산맥이 많아서 괜히 이곳이 흑산선역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운산맥과 취곤성은 흑산선역 북쪽 지역에 위치해서 만황구역과도 가까운 편이었다. 달리 말해 천정이 수천만 년 전에 만황구역의 흉악한 짐승들과 전쟁을 치러 빼앗은 영토였다.
취곤성에 만황 흉수들이 출몰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대량의 범인들과 속세 국가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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