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12화 (1,569/2,000)
  • 1812화. 검을 녹이다

    *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한립은 백옥 자기병을 꺼내 들었다.

    그 안에든 옅은 보라색 액체는 탄혼화로 배양한 혼백을 보양할 수 있는 여액으로 지기화신을 수련할 때 다친 의식을 회복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미리 충분히 제련해 두었었다.

    한립은 병마개를 열어 우자기의 입속으로 액체를 흘려보낸 뒤 가만히 상대의 눈꺼풀을 덮어주었다.

    “대체 누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일을 벌였단 말입니까.”

    막무설은 우자기의 창백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원한 관계가 아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이곳의 소식을 캐내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어요.”

    고개를 저은 한립이 입을 열었다.

    “그게 목적이었으면 성공을 했겠군요.”

    단여재가 우자기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의 손상 정도로 보아 상대가 추혼술을 진행하려 할 때 의식 금제가 폭발했을 겁니다. 그러니 추혼술은 실패했겠지요. 이 때문에 화가 난 상대가 둔기를 이용해 우 수사의 전신을 부수고 버려두고 간 듯싶습니다.”

    한립의 말에 막무설이 말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립은 우자기의 미간에 손끝을 대고 무형의 파동을 불어넣었다.

    “역시…….”

    “무슨 일입니까?”

    손을 거둔 한립을 향해 막무설이 급히 물었다.

    “잔인하게도 우 수사의 원영에 금제를 걸어 두어 육체가 죽으면 함께 흩어지게 해두었습니다. 원영이 육체를 벗어나 새로운 육체를 찾을 기회도 빼앗은 것이지요. 다행히 막 수사께서 제때 의식을 봉인하고 선령력을 주입해 제가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셨습니다.”

    “의식을 봉인했다고요? 저는 아닙니다. 선령력을 주입하기도 바빠 의식까지는 살필 여력이 없었어요.”

    그 말을 들은 막무설은 아연한 얼굴이었다.

    “저도 아닙니다……. 가장 먼저 우 수사를 발견한 건 막 선자였고, 막 선자는 려 수사께서 폐관 중일까 걱정해 제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 후에 저도 구할 방법이 없어 수사를 찾아간 것이고요.”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단여재가 고개를 저었다.

    “요즘 골짜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심란한 마음을 털어버리려 아침 일찍 바깥에 나왔다 눈 속에서 호흡이 끊긴 우 수사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죽은 줄로만 알았지요.”

    막무설이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한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 아니라면 누가 우자기의 의식을 봉인해서 목숨을 구했단 말인가?

    “이제 어떻습니까?”

    “몸과 의식 모두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래도 동부로 데리고 가서 오랫동안 돌봐줘야 제대로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막무설은 한립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마치 자기 일처럼 고마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한립의 시선이 우자기에게 오래 맴돌았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 하는 건가?’

    * * *

    보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골짜기로 돌아온 경양상인과 열화선존 등이 한립의 연락을 받고 그의 동부로 모였다.

    해 도인과 마광은 전부 화지 동천 속에 들어가 있어 동부 안에는 괴뢰와 도병만이 남아 마광이 쓰던 밀실에서 요양 중인 우자기를 돌보고 있었다.

    그간 많이 기운이 돌아왔으나 워낙 의식 손상이 심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만나기만 하면 다투던 열화선존과 경양상인이 우자기의 모습을 보고 오랜만에 의기투합해서 이런 일을 벌인 자를 찾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입을 모아 외쳤다.

    “내 진작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운곡의 평안한 나날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빨리 일이 터질 줄은 몰랐습니다.”

    경양상인은 연거푸 술을 들이켜며 속상한 듯 중얼거렸다.

    “경양 수사, 우리가 모르는 소식을 들으신 게 있습니까?”

    막무설이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선원석을 써서 취곤성에서 사들인 정보이니 비밀이랄 것도 없지요.”

    “어서 말해주시지요. 여기 모인 이들은 취곤성에 가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경양상인의 이야기에 한립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뜸을 들이고 있습니까?”

    열화선존도 거들었다.

    “괴도 은호가 취곤성에서 난리를 피운 것은 다들 알고 계실 테지요? 그 후에 말입니다. 흑산선궁의 대궁주가 그 일을 빌미로 한운산을 취곤성의 감찰선사 관리하에 두려 한다고 합니다. 아마 갑자기 한운산에 거주하는 산수들이 늘어난 것도 선궁에서 수사들을 파견한 탓인 듯하고요.”

    다시 한 번 술잔을 비운 경양상인이 알고 있는 바를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우 수사를 공격한 게 흑산선궁 인물이란 뜻입니까?”

    당장 열화선존의 얼굴이 굳었다.

    “저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흑산선궁 수사들이 한운산에 많이 잠입해 분위기를 흐리고 있고, 꽤 많은 역포회(易袍會) 수사들이 이곳에 숨어들어 있다는 것까지가 알려진 사실입니다.”

    경양상인이 손을 내저었다.

    “윤회전 인물들이 골짜기에 섞여 지낸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왜 최근에서야 이런 사고가 터지겠습니까? 선궁 수사들이 벌인 짓일 가능성이 큽니다.”

    단여재는 거의 확신을 갖고 말했다.

    역포회는 십방루, 무상맹과 마찬가지로 선역에 널리 퍼진 윤회전의 지하 세력이었다.

    “그 말씀은 우 수사가 윤회전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한립이 질문을 던지자 열화선존과 단여재는 경양상인을 보다 이번에는 막무설을 보았다.

    한 명은 우자기와 가장 친했고, 한 명은 우자기가 흠모하던 대상이었으니 아는 게 있을 것 아니냐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둘 다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당사자가 깨어나야 알지요.”

    막무설이 우자기가 있는밀실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어찌 되었든 우리도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경양상인도 호리병에 든 술을 꿀꺽꿀꺽 넘기며 씁쓸해했다. 잠시 후 모두 돌아가고 한립은 이곳도 더는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갑자기 떠난다면 오히려 선궁 인물들의 주의를 끌 수 있었고 우자기가 아직 완쾌되지 않아 장기간 요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준비한 진법을 펼치고 우자기 원영의 금제를 풀기 시작했다.

    * * *

    시간이 흐르고 5년 남짓한 세월이 지나갔다.

    이른 새벽 장천병과 비취색 호리병박을 든 그는 호리병박에 녹색 액체를 떨구어주었다.

    계속 녹색 액체를 뿌려주어 색깔이 탁하던 부분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완전히 익지는 않은 듯했다.

    딩!

    호리병박 안에서 듣기 좋은 울림이 들리고 녹색 액체가 남김없이 빨려 들어갔다. 이어서 반짝이는 주술문자를 가득 품은 초록빛이 물결처럼 퍼져 강력한 법칙의 힘을 드러냈다.

    파하아!

    호리병박 안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숙성이 끝난 것일까…….”

    한립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호리병박 입구에서 그윽한 녹색 화염이 떠올라 활활 타올랐다.

    화염이 수십여 초 만에 점점 줄어들고 호리병박은 매끈하게 보광을 반짝이면서 광택이 흐르는 재질로 변해있었다.

    ‘윽…….’

    한립이 반갑게 호리병박을 살피려는데 한쪽 팔에서 불에 댄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서둘러 소매를 걷어 보니 옅은 검 모양의 흔적이 있는 듯 없는 듯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아주 오래전 사라진 현천참령검의 흔적이었다!

    그의 혈관에서 피가 흘러들어 흐릿하던 흔적이 점점 또렷해져 갔다.

    “설마 현천참령검이 부활하려고?”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계의 것이기는 해도 똑같이 법칙의 힘을 지닌 현천의 보물이었으니 진선계에서도 선천선기라 추앙받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가 기뻐하기 전에 팔뚝에서 극통이 느껴지고 암녹색 광선이 피부를 뚫고 나와 호리병박 입구로 쏙 들어가 버렸다.

    깜짝 놀란 한립은 팔이 아프든 말든 일단 호리병박을 미간에 대고 녹색 공간 안을 살폈다.

    녹색 안개가 자욱한 공간 내부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서서히 돌면서 청죽봉운검 72자루를 품고 있었다.

    의식으로 샅샅이 뒤져도 현천참령검의 흔적이 보이지 않자 한립은 두 번째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가 막 두 번째 공간에 도착했을 때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녹색 빛이 번쩍이는 것을 느꼈다.

    허공에는 녹색 구슬 같은 것이 깜빡깜빡 빛이 꺼졌다 들어왔다 하며 기이한 파동을 일으켰고 거기에 현천참령검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의식이 접촉하려 하자 암녹색 광선이 튀어나와 다가오는 의식을 터트렸다. 끙 앓으며 눈을 뜬 한립은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가 점점 정상으로 돌아갔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리병박과 하나로 융합된 것 같아.”

    현천참령검은 부활한 게 아니라 남아 있던 훼멸 법칙의 기운이 호리병박에 흡수된 듯했다.

    “가라.”

    이번 일로 호리병박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해진 한립은 눈을 번득였다.

    슉!

    붉은빛이 가득한 밀실에 불 속성 선검이 튀어나오자 한립은 현천 호리병 아랫부분을 쳐서 녹색 빛을 분출했다.

    그러자 녹색빛에 휩싸인 화염 선검이 멈추고 화염도 사라졌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한립은 멈칫했다.

    그가 수결을 맺자 선검이 녹색빛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챙강!

    그 결과 암녹색 광선이 호리병박 속에서 튀어나와 선검을 조각냈다.

    훼멸광선(毁滅光線)에 산산조각이 난 검의 잔해와 불길이 녹색빛에 이끌려 호리병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한립도 자세히 보지 못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의식을 불어넣어 보았다.

    현천 호리병의 두 번째 공간에 불 속성 선검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잔해들은 사방의 파동 속에서 녹색 구슬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분해되며 수정빛을 흩날렸다.

    그 수정빛들이 공간 내부 벽을 타고 현천 호리병으로 흡수되는 중이었다.

    이에 자세히 살펴보던 한립은 불꽃 크기의 새빨간 빛의 점이 녹색 구슬 주변을 벗어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을 확인했다.

    불의 법칙의 힘은 아직 호리병박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의식을 불러낸 한립이 다른 방법을 써보려다 돌연 호리병박을 거두고 밀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깨어났군.”

    자리에서 일어나 마광이 머물던 밀실로 들어간 그는 우자기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쓰는 것을 보았다.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의식 손상이 심해 잠시 어지러운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한립은 그의 어깨를 살짝 눌러 눕혔다.

    “려 수사께서 저를 구해주셨군요. 의식이 안정되면서 수사의 기운을 감지하기는 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자기는 말도 잘했고 눈빛도 맑아 보였으나 가끔 시선이 풀려 한립을 보지 않고 허공을 보곤 했다.

    “아닙니다. 누가 습격한 것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저도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더군요. 상대가 골짜기 안의 누군가에 대해 말하라고 협박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누구였는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자기가 끔찍한 기억에 고개를 흔들자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상대가 염탐하려던 인물이 그였을 수도 있었다.

    “제가 습격당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아직 5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정신을 잃고 벌써 5년이 지났군요. 려 수사께서 저를 구해주시고 그간 돌봐 주셨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우자기는 감격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은혜라 할 수도 없습니다. 5년 전, 처음 수사를 발견한 막 선자께서 최선을 다해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면 저도 수사를 구할 수 없었을 겁니다. 5년 동안 수시로 이곳을 찾아와 수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간 것도 막 선자이고요.”

    한립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막무설 이야기를 했다.

    “무설이……그녀가 정말 그랬단 말입니까?”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던 우자기의 표정이 흔들렸다.

    “제가 수사를 속여 무엇 하겠습니까?”

    “당연히 려 수사께서 그럴 리는 없지요. 그런데…….”

    “대도를 향한 수행도 과감히 포기한 분이 어째서 애정 문제에는 이리 우유부단합니까. 설마 막 선자가 먼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수사에게 매달리길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건 물론 아닙니다.”

    우자기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감히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때 목숨을 잃었다면 막 선자 일로 후회가 남지 않았겠습니까?”

    한립은 이런 질문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일깨우고 싶었다.

    남녀 간의 문제에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용기를 내서 노력하지 않으면 마음에 둔 사람을 잃을 수도 있었다.

    우자기는 침묵하다 생각을 정리했는지 길게 숨을 토해냈다.

    “려 수사의 말씀에 깨닫는 바가 많습니다…….”

    한립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의식에 도움이 되는 단약을 주고는 밀실을 떠났다. 우자기의 오랜 근심은 사라졌지만 그의 걱정은 날로 깊어져 갔다.

    한 달 후, 우자기가 몸을 대충 회복해 자신의 동부로 돌아가고 한립도 한운산을 떠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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