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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11화 (1,568/2,000)

1811화. 기이한 일

*

몇 년 뒤, 한립은 밀실 안에서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피부의 자금색 비늘은 사라졌지만 주변의 마기와 전신에서 발산하는 자금색 파문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갑자기 양손을 펼치며 그가 눈을 뜨더니 눈에서 금색 빛기둥을 뿜어 등불처럼 밀실을 비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 너머 만장 하늘의 구름과 그곳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새가 날갯짓을 하자 주변에 미미한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까지 똑똑이 포착되었다.

구유마동의 다른 능력은 확실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특수한 환경에 갇히면 진가를 발휘할 것이 틀림없었다.

시력만 해도 명청령안을 익혔을 때보다 몇 배는 좋아졌으니 말이다.

잠시 후, 두 눈의 이상 현상이 사라지고 보라색 광택도 가시자 은회색으로 돌아갔다.

미소를 머금은 그는 용오 가면을 쓰고 안색이 창백한 평범한 청년의 얼굴과 검은 눈동자를 지닌 모습으로 변신했다.

한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밀실을 나섰다.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경양상인과 열화선존이 찾아왔다 그냥 돌아갔기에 이번에는 그가 먼저 찾아가 볼 요량이었다.

솨아-

엄동설한인 야학곡은 폭설이 내려 온산과 나무가 눈으로 뒤덮였고 바람이 불 때마다 눈가루가 흩날렸다.

고즈넉한 산의 풍경을 즐기며 걷고 있는데, 도중에 못 보던 건물이 보였고 그 뒤로 누군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미 눈이 그쳤는데도 암홍색 종이우산을 펼치고 산골짜기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한립은 아름답게 생긴 사내가 볼에 분을 바른 것처럼 하얗고 몸에는 붉은 외투를 걸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내는 그를 지나치며 미소를 띠고 예를 취했고, 한립도 말없이 예를 취했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멀어져 갔다.

‘골짜기에 새로운 수사가 들어온 것인가?’

산길을 따라 몇 리를 걸어간 한립은 열화선존 동부가 있는 절벽에서 누군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열화 수사,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려 수사, 출관하셨습니까!”

한립의 물음에 멈칫한 열화선존이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수사께서 일전에 다녀가셨다기에 찾아온 길입니다.”

“할 말이 있어 갔는데 폐관 수련 중인 듯하여 그냥 돌아왔지요.”

“오, 하실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큰일은 아니고……. 앞으로 화엽종 장로 영패를 이용해 취곤성 내성에 드나드는 것은 삼가시라 당부드리러 갔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열화선존이 머뭇거리며 하는 말에 한립도 움찔했다.

“휴, 요 2백 년 사이 취곤성 안이 뒤숭숭합니다. 흑산선궁에서 성을 드나드는 이들을 엄밀하게 조사한다고 해서 조심하라는 뜻이었어요.”

“어째서입니까?”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다들 모여 있으니 출관을 하신 김에 같이 가시지요. 가서 찬찬히 이야기 나눕시다.”

미간을 좁히던 열화선존이 활짝 웃으며 동행을 권했다.

“좋지요.”

예전에 경매에서 발생한 일을 떠올린 한립은 의아한 마음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골짜기 깊은 곳의 다른 절벽에 이르러 팔각형 정자에 모인 우자기와 막무설 그리고 단여재를 보았다.

“려 수사, 언제 출관하셨습니까?”

한립과 열화선존이 오는 것을 보고 세 사람이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단여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출관을 했는데 때마침 모두 모여 계셨군요.”

“경양 수사의 말을 들으니…….”

우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옆에서 막무설이 소매를 끌어당기자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미안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괜찮습니다. 지난번에 제련한 단약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해서 다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빙긋 웃은 한립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마음이 강하신 분을 두고 제가 괜한 우려를 했네요.”

막무설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어 보였다.

“세심하게 상대의 감정을 고려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런데 경양 수사께서는 보이지 않으십니다?”

“백년 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더군요.”

우자기가 대답을 해주었다.

한립은 백조산 관련 업무일 거라고 예상하고는 깊이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하하, 경양 수사께서 먹을 복이 부족하십니다. 오늘 함께 나눠마시려고 홍상미주(紅桑美酒)를 준비해 왔는데 말이에요.”

술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한립이 술동이를 꺼내 모두의 잔을 채우고 다른 이들을 살피는데, 이상하게도 우자기도 금을 타지 않고 단여재도 바둑판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열화 수사께 이야기를 듣다 말았습니다. 최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려 수사께서도 오는 길에 새로운 이들이 야학곡에 거처를 둔 것을 보셨을 겁니다.”

술잔을 입가까지 가져갔던 열화선존이 마시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우산을 들고 붉은 외투를 걸친 젊은 사내를 보기는 했습니다. 그 사람도 새로 들어온 수사겠지요?”

“봉경원이란 잡니다. 그처럼 최근 2백 년 사이 나타난 이들이 벌써 5, 60명은 됩니다.”

단여재가 끼어들었다.

“그렇게나 많단 말입니까?”

산맥을 오고 가는 것이 자유롭다지만 한 골짜기에는 많아야 열 명 적을 때는 한 두 명 정도 머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규정을 잘 지키는데……. 이상하게도 최근 몇 년간 산맥 안에서 실종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지난달에는 화월곡(花月谷)의 수사 부부가 하룻밤 사이에 증발했지 뭡니까.”

막무설이 이어받아 우려를 표하고 우자기가 보충했다.

한립은 딱 한 번밖에 마주치지 못한 진선 수사들이었으나 서로를 은혜 하는 마음이 깊어 보였다.

“실종되는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습니까?”

“……화신기 수사부터 금선까지 수행도 다양하고 용모며 성별 그리고 나이까지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사라졌습니다.”

우자기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고 답했다.

“누가 이 일에 대해 알아보지는 않고요?”

“어찌 알아본단 말입니까? 부운곡은 원래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수사들이 모인 곳이라 무슨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종된 이들의 배경도 가지각색이라 원인을 알아내기도 어려운 것을요.”

열화선존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습니다. 그들이 그냥 골짜기를 떠난 것일 수도 있고요. 말없이 왔다가 말없이 떠나는 경우가 없던 것도 아니라서요.”

우자기가 이어서 말했다.

“최근 들어온 수사들과 실종 사건은 분명 관계가 있을 겁니다. 솔직히 그들이 오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요.”

단여재는 어두운 표정으로 의견을 냈다.

“그들을 의심하신다면서 배경을 조사해 보지는 않으셨습니까?”

미간을 좁힌 한립이 물었다.

“겉으로는 평범하기도 하고, 원래 이곳 규정이 내력을 묻지 않는다 아닙니까. 그래도 워낙 분위기가 이상해지니까 몇몇은 암암리에 조사하는 것 같은데 그럴수록 이상한 소문만 더 돌고 있어요.”

우자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떤 소문입니까?”

“무슨 식인 마족이 골짜기에 들어왔다거나, 피에 굶주린 사수가 설치고 다닌다, 아니면 선궁이 이곳을 없애려 수사들을 파견해 분위기를 흐리고 있다 등등 소문은 다양합니다. 심지어 예전에 취곤성에 나타난 은호라는 괴도가 흑산선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부운산에 숨어들어서 이런 사단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어쨌든 의견은 분분하고 다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우자기와 단여재가 연달아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누군가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해 고의로 퍼트린 헛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술잔을 비운 열화선존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부운산에 대량의 산수들이 유유자적하며 모여 살 수 있었던 것은 오래전 등장했던 산수 선배님의 위엄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골짜기 안이 뒤숭숭해진 것을 보면 그것도 이제 끝인가 봅니다.”

막무설도 탄식했다. 다들 술잔을 기울이는 소리만 들리고 말이 없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뭘 그리 걱정들 하십니까? 천하에 우리가 머물 곳이 부운산 야학곡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어차피 세상사 관심 두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간다면 어딜 간들 여기와 다를 바 있겠습니까?”

갑자기 술잔을 탁 내려놓은 열화선존이 호기롭게 외쳤다.

“하하, 그 말씀이 맞기는 합니다만 화엽종 대장로인 수사는 우리처럼 훌훌 털고 아무 곳으로나 사라져 버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한립이 분위기를 풀려는 의도를 알고 일부러 그를 골렸다.

“에이, 왜 그런 소리를 해서 기를 죽이십니까?”

열화선존이 탓하는 눈길로 한립을 보았다.

그걸 보고 있던 다른 수사들도 어쩔 수 없이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오고 무거운 분위기도 많이 사라졌다.

반나절 후, 술을 나눠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각자의 동부로 흩어졌다.

‘겉보기에는 그대로 이건만, 이곳도 점점 복잡해지는구나.’

동부로 돌아온 한립은 화지 동천을 열어 영초와 도병의 상황을 확인하고 밀실에 들어가 진언화륜경 등 몇몇 시간 공법 연구에 들어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야학곡에 큰일이 벌어졌다.

이른 새벽 자리에서 일어나 약재밭의 도병에게 녹색 액체를 뿌려주려던 한립은 단여재가 동부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문을 열고 손님을 맞으려던 그는 상대의 표정을 보고 인사말을 삼켰다.

“무슨 일이시기에 그리 표정이 좋지 않습니까?”

“우자기가 습격을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려 수사!”

“어딥니까?”

“청풍 절벽입니다!”

사정을 들은 한립은 둔광을 일으켜 바람처럼 사라지고 깜짝 놀란 단여재도 그를 쫓았다.

순식간에 청풍 절벽에 푸른빛이 번득이고 한립이 나타났다.

수북하게 쌓인 눈이 피로 물들어 있고, 그 한 가운데에 백포가 피에 젖은 젊은 사내가 초점 없는 눈으로 누워있었다.

바로 습격을 당했다는 우자기였다.

그 옆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막무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은백색 보호막 안에서 우자기에게 선령력을 콸콸 불어넣고 있었다.

“려 수사…….”

한립이 다가가자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일순 희망이 엿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신속히 은백색 장막 안으로 들어가 맥을 잡고 두 눈에서 보랏빛을 반짝였다.

잠시 후 사내의 손목을 잡은 그의 표정이 심각해지고 눈빛 깊은 곳에 분노가 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막무설은 긴장해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갔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살릴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의 한 마디에 막무설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누가 보아도 우자기를 향해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작 도착해 진맥에 방해가 되지 않게 떨어져 있던 단여재도 그 말을 듣고 서둘러 다가왔다.

구유마동을 거둔 한립은 보광이 번득이는 옥돌처럼 생긴 단약을 꺼내 우자기의 입을 벌리고 밀어 넣었다.

우자기는 그것을 삼키지도 못할 정도로 의식이 없어 단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게 기운을 불어넣어야 했다.

파앗.

아랫배에서 하얀빛이 나타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막무설은 우드득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의혹 가득한 눈으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뼈가 다시 자라나면서 나는 소리입니다. 몸을 살피니 누군가 전신의 뼈와 경맥을 끊어놓았고 강제로 추혼술을 하려다 실패해서 우자기 수사의 몸은 다 무너진 집과 같습니다.”

한립이 나지막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수사의 동부를 찾아가 급히 청해온 것입니다.”

단여재가 고개를 아래위로 크게 끄덕였다.

“제가 복용시킨 것은 진선급 단속단(斷續丹)에 불과합니다. 일단 뼈와 경맥을 회복시켜놔야 다음 치료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다행히 이제 목숨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한립의 말에 막무설과 단여재의 얼굴이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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